Home > 독자마당 > 독자와 함께 목록 > 내용   2008년01월30일 제696호
[나의 오래된 물건] 이 없으면 잇몸으로 산다

▣ 황복희 대전시 동구 성남동


사는 집이 20년도 넘은 누옥이다. 처음에 이 집으로 이사를 왔을 땐 화장실이 방 안에 없었다. 대문 곁에 따로 떨어진 재래식 화장실이라서 여간 불편한 게 아니었다. 요즘 같은 겨울에는 고문과도 같았다. 용변을 보기도 전에 문틈으로 들어온 삭풍에 온몸이 사시나무 떨리듯 했다. 당시 중학교를 다니던 딸은 집에서의 용변을 참고 학교까지 가서 해결하곤 했단다. 못산다는 게 얼마나 불편하고 고통스러운 것인지를 그때 절감할 수 있었다.

이 없으면 잇몸으로 산다고 했던가. 궁여지책으로 의료용 변기를 하나 구입했다. 이 변기를 사용해 집 안에서 일을 보고 재래식 화장실로 가져가 ‘처리’하는 형태로 마무리를 했다. 그 뒤 집세를 올리면서 집주인이 방 안에 화장실을 만들어줘 지금은 그같은 고생을 모르고 살고 있다.

한데 사흘 전부터 집 안의 화장실이 속을 썩였다. 급습한 혹한에 어느 부분이 결빙되었는지 물이 내려가지 않았다. 그렇다고 이 엄동설한에 다시 재래식 화장실에 들어가 앉는다는 건 생각만 해도 소름 끼치는 일이었다. 그래서 다락을 뒤져 지난 시절 ‘해결사’ 역할을 해주었던 이 녀석을 꺼냈다. 철제 부분이 약간 녹슬었을 뿐 그 외는 전과 다름없이 튼튼했다. 이 녀석을 이틀간 사용하면서 틈틈이 집 안의 화장실을 손봤다. ‘뚫어 뻥’을 사다가 쏟아붓고 압축기를 사다가 힘을 썼으나 별 소용이 없었다. 하는 수 없어 기술자를 부르려다가 마지막으로 물을 팔팔 끓여 푸짐하게 쏟아부었더니 그제야 화장실의 기능이 정상으로 돌아왔다.

아이들이 어렸을 적부터 사용해왔기에 꽤나 정이 든 녀석이 이 의료용 변기다. 오늘 이 녀석을 다시 깨끗이 닦아 다락으로 올려보내기로 했다. 언제 화장실이 안 막히는 집으로 이사를 갈지 모르니 이 녀석을 상비군으로 집에 모시고 있어야 할 것 같다. 아무튼 이 녀석에게 다시금 신세를 지자니 새삼스럽게 미덥기 그지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