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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섹션 : 독자와 함께 | 등록 2003.10.23(목) 제481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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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자와함께] 479호를 보고 바그다드의 미군과 우리의 미군
피터 아넷의 바그다드 이야기를 주의깊게 보고 있다. 국내 언론들을 통해 보던 이라크의 모습은 답답한 느낌이었는데, 그의 글은 이라크의 생생한 현장을 보여주는 것 같아 시원하다. 미군이 이라크를 ‘해방’시킨 지 5개월이 지났지만 이라크 사람들은 해방의 기쁨이나 희망을 전혀 느끼지 못하는 것 같다. 치안불안, 오르는 물가 그리고 높은 실업률. 과연 미군이 이라크 사람들을 도와주러 온 것인지, 괴롭히려고 온 것인지 그들은 갈피를 못 잡는 것 같다. 지금 이라크에서 벌어지는 혼란이 남의 일 같지 않다. 우리도 미군의 신탁통치를 겪었다. 그리고 50여년이 지난 지금도 미군이 버젓이 우리나라에 주둔하고 있다. 물론 우리나라에서의 미군은 만약을 위한 보험 같은 것이라고 한다. 하지만 자신들의 이익만 좇는 미국이 언제 어떻게 변할지는 이라크 전후처리와 팔레스타인 분쟁에 대한 태도를 보면 쉽게 알 수 있다. 마치 골목대장이 자기가 깬 옆집 유리창을 동네 꼬마들에게 물어내라는 꼴이다. 답답하고 억울하다. 어제 뉴스를 보니 오스만투르크 제국 시절 이라크를 400년 동안이나 지배한 터키가 이라크 치안 유지를 위해 5천~1만명의 병력을 파견한다고 한다. 이런 터키군이 치안 유지를 잘할 수 있을까 곧 터키군을 맞을 이라크 사람들의 표정이 어떨지 벌써부터 머릿속에 그려진다. - 황정현/ 경기도 성남시 분당구
어른스럽게 살라고?
윌리엄 스타이그를 다룬 ‘95살의 어린이 떠나다’를 인상깊게 읽었다. “어린 시절이 즐거웠고, 지금도 어린아이와 있는 것이 어른들과 있는 것보다 훨씬 편하다. 항상 작고 순수한 상태로 있고 싶다. 그것말고는 할 줄 아는 게 없다”라는 부분에 참 공감이 간다. 어린 시절 나의 꿈은 빨리 자라 어른이 되는 것이었다. 아마 대부분 어린이들의 생각도 나와 같으리라. 어른이 되면 모든 것이 해결될 거라는 상상을 해보게 마련이다. 어른들 또한 아이들을 보면 “넌 언제 철들래”하며 야단을 치곤 한다. 철이 들어 어른이 되면 무엇이 그리도 좋아서 그런지. 나 역시 나이가 중년을 향해 달려가고 있는데도 남편이나 시어른께 철이 없다며 핀잔을 듣고 살아가는 주부다. 어른다운 삶이 무엇일까. 어른스럽게 살아가는 것이 더 복잡하고 속상할 때가 많은데 왜 그런 삶을 살려 하는지 의문이 들곤 한다. 난 아이들과 눈높이를 같이 하며 살아가고 싶다. 언제까지나 순진한 아이들과 함께. - 오선옥/ 전북 순창군 동계면
외계어를 다시 본다
온라인상에서 외계어를 사용하는 것이 한글의 고유성과 언어질서를 해칠 것이라는 일부의 생각은 너무 과민반응인 것 같다. 외계어는 초·중·고 교육과정과 사회화 과정 속에서 사용되는 언어와 경계가 뚜렷해, 온라인상의 자유를 오프라인에서도 실현할 가능성은 거의 없기 때문이다. 설혹 실생활에서 쓴다 하더라도 또래 문화 안에서 유대감을 확인하는 범위를 넘지 않을 것이다. 채팅할 때 쓰는 언어가 문어체와 구어체의 영역을 위협할 정도로 대중화된 것이 아니며, 외계어 사용자도 온라인상이 아닌 일상 언어생활에서는 가장 효율적이고 표준화된 형식의 언어를 써야 하기 때문이다. 단지 ‘기존의 방식으로 이해하기 어렵다’는 이유로 너무 배척하는 것은 아닌가. 사용자가 청소년층에 편중되어 있으며, 온라인이라는 특수한 언어환경에서 이루어지고, 청소년기의 한 특징인 기존 문화에 대한 배타적·비수용적 태도의 산물이라는 점을 이해해야 할 것이다. 문자형식의 새로운 디자인이 될 수도 있다는 생각까지는 인정할 수 없더라도 전적으로 없어져야 한다고 일방적으로 얘기해선 안 된다. 정상적이고 균형적인 것에 대한 지나친 믿음은 소수의 문화를 자기편의적으로 무시해버릴 소지가 있다. - 한승우/ 경기도 고양시 일산구
김경 유감
95년 이후 쭉 정기구독하다가 6개월 동안 쉬었다. 다시 정기구독을 시작한 <한겨레21>의 모습은 많이 달라져 있었다. 내지 편집부터 다양한 분야의 외부 필진들까지. 그 중 내내 의아하면서도 불편하게 만드는 글이 있다. 바로 김경의 글이다. 지금까지 5~6편의 기사를 봤다. 도대체 무엇을 말하고 싶은 건가? 그녀가 말하고 싶은 ‘스타일’과 ‘시티’에는 현실이 없다. 마치 할리우드식 로맨틱 코미디를 보는 것 같다. 그녀의 ‘스타일’은 ‘독신, 사치(적어도 내 눈엔), 서구적인 것의 무조건적 동경, 개인, 소비’이고, ‘시티’는 서울의 강남, ‘청담동’이다. 그래서 가족, 실업이 끈적하게 얽히고 외국인 노동자가 거리에 넘쳐나는 중소 ‘시티’에 살고 있는 나는 불편하다. 김경의 글은 다른 잡지에서 신물나게 볼 수 있다. 그런데 왜 여기서까지? 내가 <한겨레21>을 선택하는 이유는 <한겨레21>에만 있는 기사 때문이다. - 한은정
대한민국 군대 ‘성도착증’?
얼마 전 예비군 훈련을 다녀온 남자친구의 얘기에 경악을 금치 못했다. ‘여자, 창녀, 처녀’ 등 여성의 성을 반찬 삼아 씹어내는 그들의 대화(?)는 심지어 자신의 부인과 애인에게까지 적용된다. 그들의 대화에서 여성의 인격이란 없다. 그저 자신의 성욕을 해결하고 호기심을 푸는 인형일 뿐이다. 대체 대한민국에서 군대를 다녀온 혹은 군복무 중인 남성들은 왜 이런 시각을 갖게 되는 것일까?(다분히 일반화의 오류다. 인정! 그래도…) 그런 면에서 이번호에 특집으로 실린 군대의 성문화에 대한 기사를 흥미롭게 읽었다. 특히 가상으로 구성한 콩트 ‘이렇게 싸나이는 태어났다’는 가상이라고 부르기 아까울 만큼 내가 들어온 사실과 가까웠다. 한국 사회의 특수한 현상인 병영문화, 예비역들의 안줏거리인 그 문화는 사실 권위주의와 징병제의 모순, 부정부패, 왜곡된 성의식 등 온갖 그늘로 얼룩져 있다. 한국 사회에서 군대를 열린 장소, 건강한 젊은이들의 집합소로 변화시키는 것은 불가능한 일인가? - 정진이/ 서울시 관악구 신림본동
누가 송두율을 짓밟는가
이슈추적 ‘송두율 사냥, 더 이상 더는’을 읽고 우리 사회의 이념적 취약성을 다시 한번 실감했다. 북한 선수단과 응원단이 남한에 와서 대대적 환영을 받고 수많은 남한 주민이 스스럼없이 금강산과 평양을 다녀오는 가운데 어느 정도는 굳어졌다고 생각했던 화해 분위기가 송두율 사건으로 단숨에 ‘냉전 복귀’ 하는 것을 보며 참으로 암담함을 느낀다. 현 상황에서 핵심적인 문제는 과연 송 교수가 자발적으로 노동당에 입당하였으며 정치국 후보위원이었는지, 후보위원이라면 본인이 그 사실을 인지하고 자신의 지위를 적극적으로 활용하였는지 여부다. 이러한 문제는 수사기관이 법과 원칙에 따라 진실을 밝히고 사법부가 충분한 법리적 검토를 거쳐 처리할 일이다. 그런데 한나라당과 보수세력들은 ‘기획입국설’ ‘거물간첩설’에다 ‘현 정부 내 북한과 연계된 핵심세력 존재’까지 거론하더니 급기야 ‘수사기관의 프로페셔널리즘 회복’ 운운하며 수사의 결론까지 유도하고 있다. 뿐만 아니라 무차별적 색깔공세를 통해 공영방송 길들이기를 시도한다. 이 땅의 자칭 보수주의자들에게 묻고 싶다. 언제까지 매카시즘적 마녀사냥으로 역사의 진전을 가로막을 것인가? 군사독재 정권 시절 온갖 기득권을 누린 수구세력이, 분단의 희생양이 되어 내 나라를 등져야 했던 망명객들의 한과 눈물을 무참히 짓밟을 자격이 있다고 생각하는가? 아울러 지금까지 드러난 송 교수의 혐의라는 것이 과연 우리 사회가 감내할 수 없는 중차대한 것인지 묻고 싶다. 김일성 유일사상의 체계를 확립하는 데 결정적으로 기여한 인물이 국가 정보기관의 호위를 받으며 미국행을 눈앞에 두고 있고, 수백명의 목숨을 앗은 항공기 폭파범도 사회의 보호를 받으며 떳떳이 살아가는 마당에, 형사처벌을 감수하고 귀국하여 국적 회복의 의지까지 보이고 있는 사람을 감싸안지 못할 이유가 무엇인가? - 홍성호/ 부산시 해운대구 반여1동
[독자만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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