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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섹션 : 독자와 함께 등록 2003.06.11(수) 제463호

[독자와함께] 엄마가 토끼를 잃어버렸던 날

내 인생의 봄날

우리 엄마는 어디서나 볼 수 있는 ‘아줌마’랍니다. 몇푼 아끼려고 옥신각신 흥정을 하고, 파란불이 들어오면 재빠르게 뛰어 건너시지요. 오랜 세월 동안 쌓은 생활력으로 단단한 갑옷을 만들어 입은 것만 같은 아줌마, 우리 엄마. 하지만 시계바늘을 잠시만 거꾸로 돌려보면 우리 엄마도 ‘아가씨’라 불리던 시절로, ‘어린 애’라 불리던 시절로 돌아갈 수 있답니다. 내가 엄마에게 ‘엄마의 봄날’을 물어봤을 때 ‘나 같은 사람한테 봄날은 무슨 봄날이냐’고 하시다가 결국 다 말씀하신 걸요.

엄마는 대뜸 ‘국민학교’ 시절 이야기를 꺼내셨습니다. 집에서 학교까지는 5리, 어린아이 걸음으로는 한 시간이나 걸리는 길이었대요. 그 지루한 길을 걸을 수 있게 해준 건 오로지 집에서 키우던 토끼 때문이었답니다. 흰토끼 세 마리와 재색 토끼 두 마리, 이렇게 다섯 마리 토끼는 어리기만 했던 엄마에게 참 신기하고도 재미있는 친구였나 봅니다. 집에 돌아가는 길에 토끼가 좋아하는 씀바귀며 클로버를 잔뜩 따노라면 5릿길이 끝나고 어느새 엄마네 싸리문이 보였대요. 엄마는 마당에 들어서자마자 토끼를 찾았습니다. 옷자락을 여며 한가득 담아온 풀들을 하나씩 토끼장 철망 사이로 밀어넣으면, 토끼들이 엄마 손 앞으로 모여들었겠지요. 오물오물 토끼의 귀여운 모습에 엄마는 시간 가는 줄 모르고 쪼그려 앉아 있었대요. 풀물에 흙물까지 잔뜩 들어버린 앞자락 때문에 할머니한테 욕도 먹었지만, 아무렇지도 않았대요. 그저 토끼 친구가 좋을 뿐.

그날도 어김없이 엄마는 풀을 한아름 갖고 토끼장에 갔답니다. 그런데 토끼장은 텅 비어 있었어요! 순간 엄마가 생각한 건 족제비였습니다. “족제비가 물어간 거야.” 눈물은 훔치기 바쁘게 또 뺨을 타고 흘러내리고, 엄마는 족제비를 원망하면서 단숨에 할머니가 일하고 있는 밭으로 달려갔대요. 그리고 토끼가 어디있냐고 물었겠지요. “포동포동 살쪄서 팔아버렸지.” 할머니의 대답을 듣고 엄마는 그대로 털썩 주저앉아 엉엉 울었답니다. 그 까닭을 알 수 없는 할머니가 꾸지람을 주었지만 눈물은 그치지 않았대요.

토끼와 함께 했던 아주 짧은 단편소설 같던 시절. 엄마 인생에 많은 봄날이 있었지만, 이때만큼 소박함이 강렬한 빛을 발한 봄날은 없었다고 하네요. 아마, 엄마의 첫 봄날이었기 때문일 거예요. 엄마의 이야기를 듣고, 난 엄마의 눈에 그득 고인, 그때의 천진난만한 눈물을 볼 수 있었어요. 그걸 보고 나도 그만, 눈물을 쏟고 말았답니다.

임이혜림 | 서울시 성북구 안암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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