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의 배타주의를 깨자
2주일 전쯤 문화방송 <뉴스데스크>에서 외국인 노동자의 비참한 실태를 보고, 한국의 외국인 노동자 문제에 대해 생각해보기 시작했다. 그 이후 신문이나 잡지에 나온 외국인 노동자 기사를 관심을 가지고 읽었다. 다른 방송사들은 간과하거나 무시해온 외국인 노동자 문제를 심층취재한 방송사를 격려하고자 홈페이지 게시판에 들어갔더니 그 취재에 대해 ‘나라 망신 시키고 있다’며 오히려 비난하는 글이 있어서 깜짝 놀랐다. 비록 외국인이지만 분명 한 인간인데 그들의 존엄성보다 한국의 체면과 민족성만을 더 중요하게 생각하다니. 그 글을 읽고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사회에 굳건하게 존재하는 배타주의와 차별의 벽을 절감했다. 이번호에서 ‘한-베 평화공원’ 기공식 기사를 읽고 그나마 <한겨레21>이 있기에 점점 그 벽이 허물어질 거라는 희망을 느낄 수 있었다.
박미덕/ 서울시 서대문구 북아현3동
노숙자들의 자활을 위해
이번호 사람과 사회 ‘떨꺼둥이에게도 봄은 오는가’를 인상깊게 읽었다. 요즘 지하철역에서 노숙자들을 종종 보게 된다. 날씨가 따뜻해지다 보니까 노숙자들이 구호시설보다는 밖으로 나오는 것 같다. 대다수 노숙자들은 자활에 앞서 상당기간 치료와 요양이 필요한 실정이다. 노숙자들이 자활의지를 갖고 생업에 복귀할 수 있도록 정부와 사회의 많은 지원이 있어야 할 것 같다.
김형남/ 서울시 성북구 석관2동
대학사회의 카스트 구조
꽤 오래 전에 박노자 교수가 신문에 쓴 글을 읽은 적이 있다. 한국사회에서 교수가 조교를 어떻게 대하는지에 관련된 성찰적인 내용이었는데, 신문을 읽으면서 대학에서 행정조교를 하고 있는 내 신세를 보는 듯해서 무척이나 서글펐다. 또 외국인이 느끼는 부당함에 대해서 왜 우리 사회의 교수들은 깨닫지 못하는지 답답했다. 이번호 성역깨기는 치부를 숨기려고 하는 대학 교수사회에 일침을 가한 기사였다. 교수들이 자신의 기득권을 지키기 위해 얼마나 서로를 보호하는지에 대해서 새삼 느꼈다. 자신의 잘못은 뉘우치지 않고 쉬쉬하며 가해자인 교수를 보호하는 학교 당국과 교수사회에 대해서 분노가 일어난다. 정말 카스트 구조는 대학사회를 한마디로 요약해주는 말이다. 교수와 조교, 교수와 학생의 사이에서는 절대적인 복종만이 존재하는 사회가 바로 우리의 대학사회다. 손님의 차대접에서 우편물 정리, 책상 위 먼지를 닦는 것 하나도 자기 손으로 하지 않고 전공에 대한 실력은 대학원생만도 못한 교수들이 얼마나 많은지…. 개인적인 사모임의 업무부터 자신의 교수업적 평가까지도 대학원 학생들에게 맡겨버리는 교수들의 모습은, 최고의 지성인이라 평가받는 교수들이 얼마나 권위적이고 전근대적인지를 나타내준다. 많은 것은 바라지 않는다. 자신이 가진 지위에서 권력을 남용하지 말고, 공과 사는 구분해주는 것, 자신의 잘못을 솔직하게 시인하는 용기, 이것이 정말 그렇게 어려운 일일까. 너무 답답하다.
인터넷 독자
70년대에 맥아더를 욕했다면…
한홍구의 역사이야기 ‘맥아더가 은인이라고?’를 읽고 아무런 의식 없이 그 동상을 바라봤던 오래 전의 일이 부끄럽군요. 그러나 조선시대보다 요즘의 역사인식이 뒤졌다는 데는 변명의 여지가 있습니다. 그 시대엔 요즘처럼 실상을 왜곡하는 거대 매체도 없었으며 이여송을 사실대로 평했다고 해서 ‘반명주의자’로 몰아붙여 삼족을 멸하는 폭력정권도 없었을 것이니까요. 60, 70년대에 맥아더를 사실대로 말했다간 반미주의자에 무슨 색깔까지 칠해서 살아날 수 있었겠습니까?
김방규
낯선 프랑스?
다른 신문·잡지들도 그렇지만, <한겨레21>도 프랑스에 대한 환상에서는 자유롭지 않은 것 같다. 르펜의 성공과 거리에 나선 프랑스 시민들의 모습을 보면서 왜 한국 사람이 낯설어해야 하는지 모르겠다. 이선주 통신원의 글에서는 늘 “프랑스는 역시 그렇다”는 안도 아니면 “프랑스가 왜 그렇게 됐을까” 하는 안타까움이 묻어 있다. 프랑스가 혁명의 나라나 관용의 나라인지 제국주의 국가, 배타적 국가인지는 보기 나름이다. 프랑스혁명의 민주주의는 그들의 식민지에는 적용되지 않은 자기들만의 민주주의였고, 관용적이라고도 보였던 이민정책은 이민자가 자신의 문화를 완전히 포기하는 것을 전제한다. 기자가 관점을 갖는 것이 잘못된 일은 아니나 이선주 통신원의 관점은 별로 근거가 없는 애정에 필요 이상으로 젖어 있다. 우리나라에서 사회주의를 부르짖는 후보가 20%의 지지를 얻고 다음날 대규모 시위가 이어진다면 한국 주재 프랑스 특파원은 어떤 기사를 쓸까.
손화철
독자만화
이성열 ddiry@hanmail.ne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