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독자와 함께 ] 2000년10월10일 제329호 

[독자와함께] 327호를 읽고…

교단 전체를 매도해선 안 됩니다

저는 34년째 성직의 길을 걸어온 목사입니다. 지금은 당진에서 환경선교에 열심히 참여하고 있습니다. 326호 교회 내 성폭력을 다룬 ‘성역깨기’ 기사를 읽고 몇 가지 문제점을 느끼고 편지 드립니다.

교회가 성역일 수 없음은 잘 알고 있습니다. 일그러진 교회의 모습은 매체에 많이 보도됐고, 또 알려지지 않은 부분도 있습니다. 그러나 기사의 지적처럼 교회 내 성폭력이 위험수위에 이르지는 않았다고 생각합니다. 물론 저라도 교회 내 성폭력의 희생자를 만나게 된다면 그들을 도와 손해배상을 받게 하고 범죄를 저지른 목사가 소속된 교단에 제보와 압력을 넣어 파면하게 할 것입니다. 그러나 교회에는 선량한 신도와 목회자가 훨씬 많고, 교단도 팔짱만 끼고 있지는 않습니다. 몇몇 교회에서 일어난 불미스러운 일로 교회 전체가 매도돼서는 안 됩니다. 성역에 도전하는 의욕을 존중하지만 좀더 책임있는 기사를 부탁드립니다.

노정길·초락교회 목사/ 충남 당진군 석문면

아직도 ‘검사동일체’인가

검사동일체의 원칙이란 검찰총장을 정점으로 검사들이 피라미드형 조직을 형성, 유기적 통일체로 활동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범죄수사와 공소제기, 재판집행 등의 검찰권 행사가 전국적으로 균형과 통제 속에서 이루어지기 때문에 검사들이 양심에 따라 수사를 하지 못한다. 이로 인해 부패된 특권층이 형성되어 부정부패가 발생됐다고 생각한다. 나는 1992년 검찰권 남용으로 구속된 적이 있다. 천신만고 끝에 대법원에서 무죄확정 판결을 받았으나 검찰의 권력남용에 대해서는 어느 누구도 책임지지 않았다. 사건의 진위를 밝히기 위해 7년이라는 긴 세월 동안 고통을 받았고, 이로 인한 스트레스 때문인지 암이라는 병마까지 얻게 되었다. 나는 지금까지 계속되는 사법 피해자들을 보면서 현 정부가 과거 야당 시절에 근절하겠다고 말한 법조비리가 과연 사라졌는가를 다시 생각해본다. 공정한 검찰권 행사를 위해 반드시 고쳐야 할 악법들을 그대로 방치한다면 그 법에 내 가족이 피해를 입게 된다는 사실을 명심해야 할 것이다.

박경자/ 수필가

그의 용기있는 결단을 지켜보며

얼마 전 평소에는 그냥 지나치곤 하던 신문 가판대를 유심히 지켜보았던 적이 있다. 홍석천씨가 동성애자임을 밝혔다는 기사가 눈길을 끌었기 때문이다. 한국사회에서, 그것도 연예인이 ‘커밍아웃’ 한다는 건 전례없는 일이다. 그가 대단한 결단을 내렸구나라는 생각과 함께 기사의 어휘선택에 문제점을 느꼈다.

이번호 ‘누가 그의 결단을 유린했는가’를 읽으며 홍씨 스스로의 커밍아웃이 아니라 모 언론에 의해 ‘아우팅’당했다는 사실을 알고 분노를 금할 수 없었다. 동성애 기피증이 만연한 현실에서 무책임하게 내놓은 기사는 개인의 심적 고통뿐 아니라 가족에게 정신적 충격을 줄 것이 분명하기 때문이다.

우선 상식 밖의 행동이라고밖에 표현이 안 되는 일을 저지른 기자의 사과를 요구하고 싶다. 그 기자의 사과를 통해 동성애자에 대해 과도한 편견을 가지고 있는 언론이 자기반성의 기회를 만들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사람들의 눈총과 사회적 불이익에 맞서 싸워야 하는 홍씨에게 박수를 보낸다.

김은혜/ 전주시 완산구 서신동

생활 속의 미학을!

문화면 ‘절규하는 간판은 가라’는 일상적인 공간의 문화를 다시 한번 생각하게 해주는 기사였다. 솔직히 거리마다 조잡하게 붙어 있는 간판은 그 자체로도 ‘공해’가 아닐 수 없다. 간판을 가지고 창작의욕을 불태우는 ‘시장통 메이크업’전의 시도가 신선하게 느껴졌다. 앞으로 우리도 생활문화에 더 깊은 관심을 기울여야 한다. 미술은 미술관이나 화랑에만 갇혀 있는 것이 아니다. 문화의 세기를 맞아 간판 하나에도 ‘아름다움’을 고려하는 자세가 필요할 때다.

김정호/ 서울시 강서구 화곡동

<독자모니터>

토론의 당사자의 참여도

‘시시vs비비’란의 청소년보호법에 대한 논쟁은 토론의 성격을 빌리긴 했으나 두 사람의 입장차가 너무나 확연하게 드러난 까닭에 논쟁의 핵심을 하나로 모아나가지 못했던 점을 문제점으로 지적하고 싶다. 또 한 가지 문제는 청소년의 입을 통하지 않은 채 청소년이 주체인지, 보호의 대상인지를 묻는 것 자체가 어떤 의미가 있을까라는 점이다. 이러한 문제점은 ‘서태지도 권력인가’에서도 그대로 이어지는데, 당사자 서태지를 제외한 채 그의 존재의미를 ‘평론가’들의 입을 빌려 따지는 것에서부터 이 토론은 이미 ‘반쪽’이 될 수밖에 없었던 것은 아닐까. 서태지는 얼마 전 모 언론매체에서 그에게 부과된 ‘저항, 사회성’의 담론을 스스로 부정한 바가 있기에 그러한 의구심은 더하다.

정치면 ‘DJ 정권의 위기’에서는 현 김대중 정권의 위기 원인을 ‘인물론’에서만 찾으려 한다는 느낌이 들었다. 물론 최고통수권자를 비롯한 정책요직에 눌러앉은 이들의 자질, 성격이 중요한 것은 틀림없는 사실이지만, 제대로 된 언로구조와 효율적인 정책시스템이 갖춰져 있지 않은 상태에서는 누가 어떤 자리에 앉든 간에 그 자질을 제대로 발휘하기가 어렵게 마련이다. 따라서 진보적, 개혁적인 정책수립을 방해하는 구조적인 측면의 저해요소를 다뤄야 했다고 본다.

‘사람과 사회’란에 실린 ‘누가 그의 결단을 유린했는가’를 보면서 허탈감보다는 분노를 느꼈던 것은 비단 우리의 생각만이 아니었으리라. 한 개인의 소중한 내면고백을 돈벌이의 수단으로 전락시킨 언론매체가 저지른 인권유린의 잔혹함. <한겨레21>이 지적한 대로, 이번 사건은 단순한 파파라치의 폭로전을 넘어선 한 개인의 인권을 박탈한 잔인한 ‘범죄’였다. 이런 관점에 동의한다면, 이와 관련된 보도는 피해자인 홍석천씨를 중심으로 하기보다는, ‘아우팅’을 저지른 <일간스포츠>의 오태수 기자, 그리고 홍씨를 경질하려 한 문화방송의 ‘윗분’들을 집중분석하는 것이 필요했다는 생각이 든다. 그러나 ‘테러’를 저지른 이들에 대한 보도는 홍석천씨의 입을 빌린 것 외엔 없었다.

연세대학교 언론동아리 씨알(아래아)ssial@yonsei.ac.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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