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독자와 함께 ] 2000년08월08일 제321호 

[독자와함께] <조선일보> '민주적 절차'의 신화

독자논단

소설가 황석영씨가 조선일보사의 동인문학상 심사대상 되기를 거부한 것은 문화권력의 문제와 함께 근본적으로 언어의 사회성과 미학성의 문제와 연결된다. 문화는, 그람시가 지적한 것처럼, 사회적 통찰과 뗄 수 없는 관계에 있다. 황석영씨가 김동인의 문학에 대해, 미적으로는 좋은 글일지 모르나 사회적으로는 문제가 있다는 판단에서 그다지 좋은 평가를 내리지 않는 것도 같은 맥락인 것으로 보인다. 미적 기준이란 사회와 역사에 따라 변하는 것이다. 이를 초월한 영원한 아름다움은 존재하지 않는다.

아무리 아름다운 언어와 세련된 구조를 갖춘 글이라 해도, 한 시대와 사회에서 그것이 어떻게 받아들여지느냐에 따라 그 글의 가치가 결정된다. 우리는 이제까지 셰익스피어의 극적 재미나 세련만을 즐겨왔지, 그것이 지니는 사회적인 함의, 또는 그것이 우리에게 수용되는 과정에서 겪었던 굴절과 왜곡에 대해서는 거의 관심을 기울이지 않았다. 그것은 우리가 셰익스피어를 이제까지 올바로 알지 못했다는 뜻이다. 그래서 테리 이글턴은 “모든 문학 작품은 그것을 읽는 사회에 의해 다시 쓰여진다”고 말했다.

민주적 절차에 의한 합의의 창출은, 한편으로는 다수의 이름으로 소수를 생략해버리는 비민주적인 제어 기제로 작동할 수 있다. <조선일보>가 그 막대한 판매 부수와 강력한 조직을 바탕으로 정치·경제·문화·사회 등 모든 면에서 합의를 도모하는 것은, 민주적 절차에 따른 것이라 강변할 수 있을지 몰라도, 그 실효까지 민주적이냐 하는 데에는 의문의 여지가 크다. 소설가 이문열씨가 <조선일보>의 극우적 논조가 왜 문제가 되는지 모르겠다고 주장하는 것도 민주적 ‘절차’를 염두에 둔 것으로 보이는데, 그렇다면 그는 극좌적 의견의 존재도 인정하고 수용할 수 있어야 한다.

한편의 글이 좋으냐 나쁘냐의 문제는 그 글이 얼마나 자기 정당성을 확보하느냐 보다는, 그 글이 우리의 삶과 맞물려 윤리적·정치적 함의를 얼마나 잘 생산하느냐에 따라 결정되어야 한다. 물론 “그래도 명필은 명필이지 않으냐”는 반문도 나올 수 있다. 그러나 우리는 명필이 그가 속한 사회와 어떠한 관계를 맺으며 그 속에서 어떤 의미를 지니느냐 하는 질문을 생략할 수 없다.

비트겐슈타인은 “언어의 한계에 대항하는 것이 바로 윤리”라고 말한다. 글쓰는 사람은 자신에 대해 끊임없이 되묻는 존재이자 사회적 책임감을 지닌 존재인 한에서 가치가 있다. 이는 곧 윤리적 주체의 시작이기도 하다.

박상진/ 부산외대 교수·이탈리아어문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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