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독자와 함께 ] 2000년07월19일 제318호 

[독자와함께] 제316호를 읽고...

시사SF, 날카로움이 좋다

잡지를 받으면 제일 먼저 보는 것이 시사SF이다. 이번호의 ‘난 한놈만 패’도 한주 동안 서너번 되풀이해볼 정도로 인상깊었다. 이번 롯데호텔노조 사건을 보며 현 정부의 폭력성에 실망을 금치 못했다. 전경들의 진압 방식은 그동안 김대중 정부에 가졌던 큰 기대를 일시에 무너뜨리고 말았다.

어떠한 목적도 폭력을 정당화할 수는 없다. 호텔 노동자들의 투쟁을 집단이기주의로 몰아서도 안 된다. 호텔노조 파업은 의약분업을 둘러싼 의사들의 파업과는 다르다. 그들은 인간답게 살 권리를 되찾기 위해 처절하게 싸우고 있는 것이다. 어쨌든 이번호 시사SF의 날카로운 비판은 매우 마음에 든다.

민병현/ 서울시 동대문구 이문동

베트남 캠페인에 희망을 걸며

함석헌의 <뜻으로 본 한국사>를 읽으면서 바보같이 당하기만 하고 제대로 대응도 못한 우리의 역사가 부끄러워 때론 눈물을 찔끔거리기도 하고, 가슴을 치기도 했다. 또 최근 매향리 사건을 보면서는 정말 분노가 치밀어 오르기도 했다.

<한겨레21>의 베트남 캠페인을 보면서 또 한번 부끄러움을 느꼈다. 정말 우리의 ‘부끄러운 역사’를 반성할 필요도 있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던 것이다. 그러나 웬일인지 이번 사건을 보면서 ‘희망’을 읽을 수 있었다. <한겨레21>이 진실의 입장에서 굳건히 서 있는 모습을 보면서 언젠가는 모든 상처를 딛고 새로운 화합과 공존의 장이 만들어질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베트남에 용서를 구하는 모습. 그것이 지금 내게 가장 아름다운 모습으로 다가온다.

문근숙/ 경기도 수원시 장안구 신풍동

여름 휴가, 일탈도 필요하다

여름 휴가 특집 ‘도발적으로 떠나보자’는 아주 재미있고 유익한 기사였다. 보통 휴가특집이라고 하면 판에 박힌 관광지나 문화유적을 소개하는 것으로 끝나게 마련이다. 기사에 소개된 기발한 아이디어들은 여행을 더욱 보람있게 만들 수 있을 것 같다. 특히 ‘여행은 일탈이다’라는 딴지그룹 여행팀장 윤용인씨의 말이 인상적이다. 양복과 넥타이에 얽매인 자신을 깨고 한번쯤은 머리를 염색하고 떠나볼 필요도 있는 것 같다. 단순히 외모를 바꾸는 행위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규칙과 위계에 억압된 우리의 정신을 해방시킬 수 있는 계기가 될 수 있기 때문이다.

김철환/ 대전시 동구 가양동

‘나누는 삶’의 의미

‘잃어버린 목소리를 찾는 아이들’을 읽고 감동을 받았다. 정신지체아 아이들과 교육연극을 만든다는 것이 말처럼 쉬운 일은 아닐 것이다. 어려운 상황에서도 포기하지 않고 아이들과 함께 한 교사들의 노고에 마음속 깊이 찬사를 보낸다. “연극놀이를 하며 부쩍 큰 느낌”이라는 한 교사의 말은 다른 사람을 도우며 성장하는 우리 삶의 본질을 깨닫게 해준 것 같다. 앞으로도 이처럼 보이지 않는 곳에서 의미있는 일을 하는 사람들을 많이 소개해 줬으면 한다. <한겨레21>만이 이런 기사들을 제대로 담아낼 수 있는 매체라 생각한다.

조영호/ 서울시 서대문구 북가좌동

통일의 시작은 상호 이해

문화면 ‘남과 북, 하나되기엔 너무 먼 당신’을 보고 통일 논의가 활발한 시점에 아주 적절한 기사였다고 생각한다. 사실 통일에 있어 가장 걸림돌이 되는 것은 정치나 경제의 문제가 아니라 문화의 문제다. 50년밖에 되지 않는 짧은 분단의 시기에 남북의 삶의 방식은 너무도 다르게 변해버렸다. 통일 뒤 어떻게 서로를 이해하고 화합해 갈 것인가는 정말 중요한 문제가 아닐 수 없다. ‘탈분단 시대를 열며’라는 책의 내용은 여러 가지 점에서 흥미로웠다. 남성·권력 중심적이라는 점에서 두 체제가 사실은 동질적이라는 지적은 여러 가지를 시사해준다. 이 폐쇄적인 두 사회가 충돌하면 문제가 발생하는 것이 당연하다. 지금부터라도 상호이해의 기반을 조성할 수 있는 다양한 학술연구와 정책이 쏟아져 나와야 한다. 통일 열기에 무작정 들뜨는 것이 그리 좋은 일만은 아니다. 가장 중요한 것은 차분히 상호 이해와 교류의 폭을 넓히는 것이다.

김성희/ 충남 홍성군 갈산면

유랑극단 젊은이들의 신선한 패기

언제나 ‘사람이야기’는 가장 재미있는 난이다. 이번호 역시 다양한 사람들의 독특한 이야기가 내 눈을 사로잡았다. 특히 ‘유랑극단’ 젊은이들의 신선한 시도가 가장 재미있었다. 난해함에 젖어 있는 단평영화의 틀을 깨고 마음대로 자신들의 ‘끼’를 발산하는 그들의 패기가 부러웠다. 앞으로도 이들의 활발한 활동을 기대한다.

윤미라/ 경기도 의정부시 신곡동

<조선일보>의 슬픈 통일관

<조선일보> 7월11일자 사설은 “일부 사람들이 <조선일보>를 ‘반통일신문’이라 매도해왔다”며 <조선일보>의 통일관을 분명히 하고 있다. 이 사설은 “<조선일보>는 정녕 통일에 반대하는가? 결코 아니다. 다만 저들이 말하는 통일과 <조선일보>가 말하는 통일이 다를 뿐이다. 지금 우리의 현실로 볼 때 통일에는 두 가지 길이 있다. 남쪽의 체제와 이념에 따른 통일이 있고, 북쪽의 이념과 주의에 따른 통일이 있다. 두 체제가 절충되어 중간에서 만나는 통일은 현실적으로 불가능하다”고 전제하고, 북측의 <조선일보> 입국 거부를 비판했다.

이 사설에 따르면 <조선일보>는 남과 북이 서로 불상용적이기 때문에, 쌍방 중 일방이 자기 체제와 이념을 포기하고 굴복할 때에만, 어느 일방의 승리로 통일은 가능하다는 관점에 서있다. 이는 <조선일보>가 지난 반세기 동안 남과 북이 추구했던 냉전 대결적인 통일관을 그대로 견지하고 있음을 천명한 것이다. 그러니 <조선일보>를 ‘반통일적’이라고 말하는 것은 적절치 않다. <조선일보>는 분명 ‘멸공통일’을 계속 주장하고 있기 때문이다.

문제는 이 탈냉전의 시대에 <조선일보>가 언론자유를 빙자하여 냉전 대결적 통일관을 계속 고창하고 있다는 사실에 있다. 우리 민족은 남과 북을 막론하고 지난 반세기 동안 “이것이냐 저것이냐”의 택일적 통일을 위해 온갖 피땀을 흘려왔다. 이에 대한 역사의 응답은 과연 무엇이었는가? <조선일보>는 과연 그 길이 “현실적으로 가능한” 길이었다고 보는가? 남과 북이 상대방을 타도하고 자기식으로 통일을 실현하려하는 한 냉전 대결적 통일노선이 헛된 노력이었음은 이제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다. 이런 쌍방의 통일 노력에도 불구하고 아직 분단상태는 계속되고 있으니 말이다.

냉전시대에 남과 북이 추구했던 대결적 통일은 상대방에 대한 타도를 전제로 하는 것이었다. 그런데 지난날 역사가 허락하지 않은 ‘타도통일’의 길을 지금도 계속 추구한다면, 역사는 21세기 탈냉전의 시대에 우리 민족을 낙오자로 만들것이다. 그런 맹목적 대결의식은 우리 민족을 전멸케 하는 전쟁을 초래할 수 있다는 냉엄한 현실을 인식할 필요가 있다.

<조선일보>가 주장하는 택일적 통일 노선이야말로 비현실적이다. 오히려 평화적으로 실현 가능한 통일은, <조선일보>가 “현실적으로 불가능하다”고 전제했던, “두 체제가 절충되어 중간에서 만나는 통일”이거나, 아니면 상이한 두 체제와 이념을 지지하는 사람들이 ‘한 나라’ 안에서 ‘평화적으로 공존’할 수 있는 새로운 방식의 통일을 추구할 수밖에 없는 것이 현실 아닐까?

<조선일보>는 하루 빨리 21세기 탈냉전시대 민족의 화해와 평화공존체제 창조에 어울리는 새로운 통일관을 정립하기 위해 노력하기 바란다.

노중선/서울시 영등포구 양평동 5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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