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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섹션 : 이슈추적 등록 2003.12.03(수) 제487호

[이슈추적] 수능고사 ‘시효 만료’

학교교육 부실화 초래해 사교육 영향력 강화… 범정부 차원의 대입제도 개선기구 설립하라

지난 11월5일 예년보다 열흘쯤 일찍 시작된 수학능력고사(수능)는 입시 한파 없이 평온한 날씨 속에 치러졌다. 전날 학교에서 출정식(?)을 마친 ‘전사’들은 후배들의 격려를 받으며 ‘전장’에 들어섰다. 이들은 12년간 연마해온 자신들의 능력을 이날 단 한번의 5지선다형 시험에 맡겨야 했다. 학교는 금연구역이었지만 수험생들은 쉬는 시간마다 초조한 심정을 담배 연기에 날렸고, 처음 맛보는 절망감에 자살까지 결심하는 학생들도 있었다.

교육제도 근본 개혁 촉구하는 목소리

여기까지는 여느 수능 때 모습과 다를 게 없었다. 그러나 이번 수능은 예년과 다른 ‘후폭풍’이 몰아쳤다. 수능의 ‘부실공사’를 질타하는 언론보도가 줄을 이은 것이다. 출제위원 중에 입시학원 강사 출신이 포함됐다는 사실이 밝혀지더니, 언어영역 등에서 정답에 대한 이의제기가 봇물처럼 터졌다. 또 출제위원 가운데 특정대학 출신이 58%나 되고, 출제자 중 70%가 참고서 집필 경험이 있다는 사실도 드러났다. 결국 지난 11월26일 교육과정평가원은 수능 사상 처음으로 한 문제의 정답을 두개로 인정하는 조치를 단행했고, 28일에는 윤덕홍 교육부총리가 대국민 사과와 함께 문제 유출 등에 대해 수사를 의뢰하는 사태가 벌어졌다. 이번 수능과 관련된 모든 사건들은 그동안 은폐됐던 수능의 문제점들을 적나라하게 드러냈다. 입시제도를 포함한 교육제도의 근본적 혁신을 요구하는 목소리가 교육계 안팎에서 이는 것은 너무도 당연했다.

수능은 지난 1994년 학교교육을 단편지식 암기 위주에서 벗어나 종합적 사고력을 키워주는 학습으로 유도한다는 취지에서 도입됐다. 하지만 올해로 10년째를 맞은 이 제도는 학교교육을 망가뜨리는 주범이 되고 말았다. 수능은 외형상 종합적 사고력을 측정하는 통합교과 형식으로 출제되고 있다. 그러나 프랑스의 바칼로레아와 독일의 아비투어가 논술형 시험을 통해 종합적인 측정을 하는 것에 비해, 수능은 수리II의 일부 문항을 제외하고는 5지선다형으로 출제되고 있다. 이런 형태의 시험이 10년 동안 치러지는 바람에 예문과 문제의 형태가 유형화되고, 학생들은 이에 대비한 요령을 익히는 식의 학습을 받고 있다. 사교육기관은 통합적 사고력을 키우기보다는 출제자는 누구인지, 예상 지문은 무엇인지를 추적하는 데 전력을 다하고 있다. 교과서의 단편지식을 암기하는 학습에서 벗어나기 위해 도입한 수능이 오히려 학교교육을 왜곡하고 사교육기관의 영향력을 강화하는 결과를 빚은 것이다.

현행 대입제도는 수능과 함께 내신성적을 전형 요소에 포함하고 있다. 그러나 내신이 절대평가제로 운영되는 바람에 일선 고등학교에서는 학생들에게 불이익을 주지 않겠다며 공공연히 ‘성적 부풀리기’를 하고 있는 실정이다(실제로 한 과목당 평균이 80∼95점이 되도록 시험 문제를 쉽게 내는 학교가 수두룩하다). 대학에서는 이런 내신이 변별적 타당성을 갖기 어렵다는 이유로 입시 반영 비율을 낮추고 있다(현재 대학의 내신 반영률은 3% 내외에 머무른다). 상황이 이렇다보니 학생들은 입시에 절대적 영향을 미치는 수능에 매달리게 된다.

강남권 학생들의 학업성취도가 낮은 이유

한양대 입학관리실에서 최근 재학생의 5년간(1997∼2001) 학업성취도를 분석한 결과는 수능의 허상을 잘 드러낸다. 사교육의 최대 수혜자라 할 수 있는 서울 강남권 출신 학생들이 대학에 들어와서는 서울의 다른 지역이나 지방 학생들에 비해 학업성취도(학점)가 떨어지는 것으로 나타났다. 이것은 이른바 ‘족집게 과외’라 불리는, 문제풀이 요령을 가르치는 사교육이 자기주도적 학습을 해야 하는 대학교육에서 더 이상 통하지 않음을 드러낸다. 해마다 60만명이 참가하는 점수경쟁식 줄세우기 시험은 우리 아이들에게 진정한 창의성과 주체적 학습능력을 길러주지 못하고 있다. 수능 고득점을 위한 족집게 과외가 위력을 발휘하면서 이른바 일류강사들은 수능을 앞두고 한 과목에 1천만원이 넘는 돈을 챙기고 있다. 또 부모의 경제력이 대학 진학을 결정하는 법칙이 고착화되면서 계층간 갈등이 심화되고 있다.

이런 상황에서는 더 이상 수능을 존속해야 할 이유가 없다. 이번 수능의 문제점을 총체적으로 분석하고 문제유출 등 모든 의혹을 철저히 규명한 뒤 대입제도 개선기구를 범국가적 차원에서 구성해 새로운 입학제도를 만들어야 한다. 학생들이 고교과정을 어떻게 마쳤는가를 종합적으로 판단하는 것이 대입전형의 중심이 돼야 한다. 가르친 사람이 평가한 것을 상급학교에서 존중하는 ‘상식’이 지켜질 때 학교교육이 살아날 수 있다. 지구촌 대다수 나라가 이 원칙을 지킨다. 미국의 대학입학자격시험(SAT)이나 독일의 아비투어 등은 이 원칙을 기본으로 하는 제도다. 이런 ‘상식’을 지키지 못한다면, 입시에서 수능이 절대적 비중을 차지할 수밖에 없고 교사들은 내신 부풀리기에 의해 스스로 권위를 잃는 사태에 직면할 수밖에 없다.

입시제도 개혁은 근본적인 해결방안을 찾는 방식으로 진행돼야 한다. 과도기적으로 내년 입시부터는 내신에 상대평가제도를 우선적으로 도입해야 할 것이다. 수능은 자격고사나 졸업고사로 전환하고, 그 형태는 프랑스의 바칼로니아처럼 종합적 사고력을 평가하는 형태로 바뀌어야 한다. 입시제도의 개혁과 함께 어느 대학 어떤 학과를 나왔는가에 목숨을 걸어야 하는 왜곡된 사회구조를 바로잡는 작업도 진행돼야 할 것이다. 국민의 70%가 학벌사회와 대학 서열화 문제의 심각성을 인식하고 있다. 학벌사회의 수혜자인 서울대 학생들조차 그 폐해를 인정하는 실정이다. 따라서 국립대학의 공동학위제 도입 등 서울대를 정점으로 한 대학 서열화를 완화하는 획기적인 정책을 시급히 마련해야 한다.

내신에 상대평가제 시급히 도입해야

12월2일 수능 결과가 발표된 뒤 우리 사회는 또 한 차례 논란에 휩싸일 것이다. 우리는 이미 무엇이 문제이고, 무엇을 고쳐야 하는지 너무도 잘 알고 있다. 이제는 버려야 할 것과 얻어야 할 것을 분명히 해야 한다. 우리 아이들은 학교와 학원을 전전하는 것이 당연한 일이 된 세상에서 매일 아침밥도 못 먹고 하루에 5시간도 못 자면서 청소년기의 꿈과 창의력을 잃어버리고 있다. 선발을 위한 경쟁만이 남고 교육은 사라지면서 우리 아이들은 시들어가고 있다. 수능을 개선하는 과정은 단순한 입시제도 개선이 아니다. 그것은 실종된 우리 아이들의 인간적인 삶을 회복하는 길이다.

한만중 | 남서울중학교 교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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