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슈추적 ] 2003년11월12일 제484호 

파병으로 주권 회복?

정부, 미국 압력 없다며 독자적 결정 강조… ‘안정화군’으로 전투 · 비전투 논란 회피 꾀해

이라크 추가파병 결정 과정이 어지럽다. 뭐가 어떻게 돌아가는 걸까. 정부 파병협의단이 미국을 다녀오고 2차 정부합동조사단이 이라크에 갔다왔지만, 정부는 파병 규모를 ‘완전 백지 상태’에서 재검토할 방침이다. 정부는 11월11일 오전 노무현 대통령 주재로 비공개 안보관계장관 회의를 열어 이라크 추가파병 계획을 집중 재검토했다. 그렇지만 이라크 추가파병 철회로 이어질 가능성은 거의 없어 보인다. 한-미 동맹을 중시해 ‘되도록 빨리 많은 (전투)병력을 보내자’는 주장에 맞서던 청와대 ‘비둘기’들도 파병 철회 가능성을 묻는 질문에는 하나같이 고개를 가로저었다.


사진/ 정부는 이라크 추가파병을 독자적으로 결정할 방침이라고 한다. 이수혁 외교부 차관보가 파병 문제에 관한 기자회견을 하고 있다.(연합)


“미국과 협의해도 결정은 우리가”

그렇다면 노무현 정부는 도대체 뭘 어떻게 하겠다는 것일까. 이 질문에 청와대 한 비둘기파는 집안 이야기부터 꺼냈다. “요즘 집에 들어가면 피곤합니다. 아내가 ‘지난달 전격적인 추가파병 결정 때처럼 이라크에 전투병을 보내기로 다 정해놓고 또 현지 조사단을 보내는 등 쇼하는 게 아니냐’고 따집니다.” 이 관계자는 “아내에게 ‘추가파병 방침만 결정됐지 다른 것은 미정이다. 내가 거짓말할 사람이냐’고 하소연합니다. 이러다 파병 논란 때문에 가정 파탄나게 생겼습니다. 하긴 지난번 추가파병 결정 과정이 매끄럽지 못했으니 국민들 불신은 이해가 갑니다. 파병 결정을 돌이킬 수 없더라도 전투병 파병만은 막아야 하고, 또 막을 수 있다고 봅니다”라고 말했다.

정부는 10월18일 이라크 추가파병을 발표하면서 파병 부대의 성격, 형태, 규모, 시기 등에 대해 ‘독자적 결정’을 유독 강조했다. 당시 나종일 청와대 국가안보보좌관은 ‘독자적 결정이 무슨 뜻이냐’는 기자들 질문에 “독자적이라는 말이 좀 지나친가. 미국과 협의를 거치겠으나 궁극적인 결정은 우리가 스스로 한다는 뜻이다. 미국과의 협의가 유일한 요소가 아니고 다른 요소도 있다는 것을 참작해달라. 파병 부대 성격이 모호하다는 것은 맞는 말이다. 성격, 규모 등 이런 것에 관해선 앞으로 숙고해 결정해야 한다”고 설명했다.


사진/ 미국이 요구하는 ‘안정화군’은 전투 상황에 대비할 수밖에 없다. 지난 11월9일 이라크 현지에서 조사활동을 벌인 2차 정부합동조사단이 귀국하고 있다.(연합)


10월31일부터 10일 동안 이라크 현지 조사활동을 벌인 김만복 정부합동조사단장은 “이라크 치안 상황이 불안해졌다. 이라크 현지인과의 면담에서 전후 복구 지원을 위한 파병을 원한다는 느낌을 받았다”고 말했다. 10월5·6일 미국 워싱턴을 방문한 정부 파병협의단은 한-미 두 나라의 생각이 매우 다르다는 것을 확인했다. 한국은 이라크 재건 지원을 위한 비전투병(공병과 의료부대) 2천명과 이들을 보호할 경비병력 1천명 등 3천명을 파병하겠다는 입장이고, 미국은 2개 연대, 5천명 규모의 ‘안정화군’(Stabilization Forces) 파병을 요청한 것으로 알려졌다. 파병협의단을 이끈 이수혁 외교통상부 차관보는 11월9일 파병 지역과 관련해 “한국은 이라크 남부 나시리야나 바스라처럼 안정화된 지역에 가고 싶다는 희망을 피력했고, 미국은 (한국군이) 안정화 작전을 벌여주기를 바랐다. 그러나 파병 성격이 먼저 정해져야 하며, 지역은 그에 따라 결정되는 부차적인 문제”라고 말했다.

불안한 치안 상황… 한-미의 시각차

미국은 한국더러 위험한 곳을 안정화시켜 달라고 한 데 비해, 한국은 안정화된 곳에 가겠다는 것이다. 이런 의견 차이는 파병 부대의 성격을 놓고 견해가 엇갈리기 때문이다. 두 나라의 파병 협의 때 핵심 쟁점은 파병 부대의 성격이었다. 부대 성격이란 어떤 기능 수행에 무게가 실리느냐는 문제다. 먼저 부대 성격이 정해져야 부대 편성과 구조, 임무, 주둔 지역에 대한 구체적 내용이 나온다. 한-미 정부는 전투병 대신 ‘안정화군’이란 공식 용어를 쓴다. 미국은 지난 9월 한국에 추가파병을 요청할 때부터 이라크에서 치안유지를 맡을 안정화군이란 용어를 사용한 것으로 알려졌다. 미국이 설명한 안정화군은 전쟁이 끝난 뒤 치안유지를 위해 자위와 소요·테러 진압을 위한 일정한 수준의 무력을 갖춘 병력이다.

얼마 전까지 공병·의료 부대와 대칭적 개념에서 전투병이란 말을 쓰던 우리 정부 당국자들도 최근 미군 사상자가 속출하면서 입을 맞춘 듯 안정화군이란 말을 쓰고 있다. 전투병이란 어감이 너무 과격해 이라크 사람들을 쓸데없이 자극하고, 국내에 공연한 불안감을 불러일으킨다는 이유다. 하지만 안정화를 책임진 지역의 치안 유지를 위해서는 순찰과 수색, 검문을 해야 하며, 이 과정에서 이라크 저항세력과 교전이 벌어질 수 있다. 이라크에서 안정화군이 경찰처럼 민생 치안만 맡을 수 없기 때문에 내용상 전투병과 다를 바 없게 된다.


사진/ 지난 11월7일 미군의 블랙호크 헬기가 격추된 뒤 현지 주둔군들이 시내 정찰을 하고 있다.(AP연합)


그런데 정부 일각에서는 전투병과 비전투병이란 구분은 의미가 없다고 주장한다. 김희상 청와대 국방보좌관은 11월10일 “공병도 상황에 따라서는 전투병이 될 수 있고 동티모르에 간 평화유지군도 모두 특전사 병력이다. 부대의 성격보다는 현지에 가서 무슨 임무를 수행하는지가 중요한 것”이라고 말했다. 다른 군 관계자도 “의료부대나 공병부대는 비전투병이고 보병부대는 전투병이니, 비전투병을 보내야 한다는 이분법적 발상은 비전문가들의 단견이다. 공병이나 의무병이나 모든 군인은 기본적으로 전투병이다. 만약 파병 부대의 인명 손실을 걱정해 비전투 부대를 보내야 한다는 주장도 있지만, 전투력이 강한 병력을 많이 보내 부대 방호력을 강화하고, 만약 공격받았을 때 바로 대응할 수 있는 능력을 확보하는 게 인명 피해를 줄이는 방법”이라고 말했다. 이런 주장을 펴는 쪽은 독자적 작전 수행이 가능한 5천명 이상의 병력을 보내야 한다는 입장으로 알려졌다.

이라크 안 치안 상황이 갈수록 악화되는 것과 함께, 최근 터키의 파병 철회 결정도 변수다. 터키가 11월7일 파병을 공식 철회하자 한국은 유엔 결의안 통과 이후 ‘유일한’ 이라크 파병 결정국이 됐다. 미국 처지에서는 한국에 많은 전투병력을 되도록 빨리 보내달라는 압력을 가중시킬 수밖에 없고, 한국은 미국 눈치와 국민 여론, 악화된 이라크 현지 상황을 놓고 저울질하고 있다.

최후의 선택 앞두고 힘겨루기 치열

한쪽에서는 서울에서 열리는 한-미 연례안보협의회(11월17·18일)에서 도널드 럼즈펠드 미국 국방장관이 참석하는 것을 놓고 이때 추가파병 부대의 성격 등 큰 가닥이 잡히는 게 아니냐는 분석도 나오고 있다. 하지만 이런 분석에 대해 다른 쪽에서는 “아시아-태평양 경제협력체(APEC) 정상회의에서 조지 부시 미 대통령을 만나기 바로 전에 추가파병을 결정하더니 이번에는 미 국방장관을 만나 추가파병의 윤곽에 합의하면 우리는 국제사회에서나 국민들로부터 ‘미국의 봉’이란 오명을 쓰게 된다”고 그럴 가능성을 낮게 봤다. 비전투병 파병을 내심 최후의 방어선으로 여기는 청와대 안 비둘기파들은 아직은 노무현 대통령과의 코드 일치를 믿는 눈치다.

앞으로의 일정을 고려하면 11월 안에 파병 부대의 성격과 규모 등에 대한 정부안이 결정되고, 12월 초 국회에 파병 동의안이 제출될 것으로 보인다. 국회 이라크조사단이 11월18일부터 8박9일 일정으로 이라크를 다녀온 뒤 12월9일 정기국회 폐회 이전에 국회에서 파병 동의안이 처리되려면, 정부가 12월 초에 파병안을 국회에 제출해야 하기 때문이다. 11월 하순까지 추가파병 결정 철회, 비전투병 파병, 전투병 파병 등 ‘최후의 선택’을 두고 정부와 청와대, 시민사회 안팎의 논쟁과 힘겨루기가 치열해질 것으로 보인다.

권혁철 기자 nura@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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