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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섹션 : 이슈추적 | 등록 2003.10.23(목) 제481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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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슈추적] 13만5천원, 그 잔인한 대가 누구도 거들떠보지 않던 한 노조위원장의 죽음…태풍 매미에도 크레인을 지켜야 했던 까닭
세상의 무관심이 또 한 사람의 노동자를 죽음으로 내몰았다. 민주노총 금속노조 한진중공업 지회장 김주익(40)씨. 그는 부산 영도 앞바다가 내려다보이는 35m 높이의 ‘골리앗’ 크레인에서 무려 129일 동안 ‘고공 농성’을 벌이다 지난 10월17일 새벽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태풍 ‘매미’가 부산을 강타한 날에도 크레인에 머물며 ‘투쟁 의지’를 다진 그가 죽음을 선택한 까닭은 무엇일까.
노조 때문에 나라가 망한다고?
김 지회장은 자살을 결심하기 전에 두장의 ‘유서’를 남겼다. 크레인 조정실에서 발견된 그의 유서에는 죽음을 선택할 수밖에 없었던 인간적 고뇌와 분노가 담겨 있다. ‘…이 회사에 들어온 지 만 21년. 그런데 한달 기본급은 105만원, 세금 등을 공제하면 남는 것은 팔십 몇만원…. 해가 갈수록 더욱더 쪼들리고 앞날이 막막한데, 이놈의 보수언론들은 입만 열면 노조 때문에 나라가 망한다고 난리니 노동자는 다 굶어 죽어야 한단 말인가.’ ‘…집사람과 애들한테 무엇 하나 해준 게 없는데, 휠리슨지 뭔지 집에 가면 사준다고 애들하고 약속했는데, 약속을 못 지켜 정말 미안하구나.’ ‘…손해배상 가압류에 고소고발, 구속에 해고까지…. 노조를 식물노조로, 노동자를 식물인간으로 만들려는 노무정책을 바꾸지 못한다면 우리 모두 벼랑 아래로 떨어지고 말 것이다….’ 실제로 한진중공업 노조원들은 극심한 노조탄압과 저임금으로 고통을 받고 있다고 호소한다. 한진중공업은 지난 2001년 93억원의 당기순이익을 냈고 지난해에는 7600억원의 매출 목표를 달성하는 등 부산 지역에서 우량기업으로 손꼽히지만, 임금은 지난 2년 동안 단 한푼도 오르지 않았다. 한 노조원은 “임금이 다른 경쟁업체에 비해 한달에 많게는 70만원 이상 차이가 난다”며 “잔업과 특근을 해야 그나마 생계를 유지하는데, 노조활동을 하면 잔업, 특근에서 차별을 받기 때문에 고통스럽다”고 호소했다. 특히 노조 간부들은 회사쪽의 임금 가압류 조치까지 더해져 이중고에 시달려왔다. 회사쪽은 2002년 파업과 관련해 노조 간부 20명의 임금 50%를 지난해 5월부터 가압류해왔다. 이 조치로 입사 22년차인 김 지회장의 경우 임금과 상여금을 합해 매달 평균 59만원을 받았다. 회사쪽은 지난 1월 두산중공업 노조원 분신 사건으로 가압류에 대한 여론이 나빠지자 4월부터 가압류를 풀었다. 그러나 파업이 계속되자 지난 10월13일 특수선 사업장 노조원들에게 가정통신문을 발송해 “현업에 복귀하지 않을 경우 손해배상청구와 가압류를 하겠다”고 다시 협박하고 나섰고, 이는 김 지회장을 비롯한 노조 간부들에게 엄청난 부담으로 작용했다. 회사쪽은 파업에 참가한 노조원들을 교묘한 방법으로 괴롭혔다. 회사쪽은 노조가 지난 7월22일 전면 파업에 돌입하자 파업 참가자들에게 무노동 무임금을 적용해 임금을 지불하지 않았다. 대신 노조원들의 파업 참가를 막기 위해 출근을 하지 않도록 독려하고 이들에게 임금의 70%를 명휴수당(기상조건이 나빠 작업을 할 수 없을 때 임금 대신 지급하는 돈) 형태로 지급했다. 이런 교묘한 정책 탓에 부산 영도, 다대포, 마산, 울산의 4개 공장 1265명의 노조원 중 고작 300여명만이 파업에 참가했다. 한진중공업은 또 노조 간부들을 업무방해 혐의로 고소해, 이 중 김 지회장 등 6명은 체포영장이 발부된 상태다.
회사는 노조탄압·저임금도 모자랐을까
이런 회사쪽의 다양한 압박으로 노조 간부와 노조원들은 궁지에 몰린 상태다. 회사쪽은 지난 7월 중순 노동부 중재로 진행된 노사협상에서 노조와 손배가압류 철회, 해고자 복직, 임금인상 등에 합의했으나, 5일 뒤 열린 회사 임원회의에서 이를 번복하기도 했다. 이에 대해 회사쪽은 “당시 노조와 합의한 것은 아니었다. 지금도 노조와 이견을 좁히기 위해 계속 노력하고 있다”고 해명했다. 한진중공업의 노동쟁의는 어제오늘의 일이 아니다. 한진그룹은 지난 1991년 대한조선공사를 인수했을 때부터 노조와 극한 대립을 빚었다. 한진중공업 노조는 91년 박창수 노조위원장이 경찰 조사를 받던 중 의문의 죽음을 당하자 파업에 돌입했고, 회사쪽은 노조 간부 12명에 대해 7200여만원의 손배소송 청구와 가압류 조치를 취했다. 당시 야당인 민주당은 노무현 의원을 단장으로 진상조사단을 구성해 노동부(당시 장관 최병렬 현 한나라당 대표) 등을 상대로 조사에 나섰으나 진상을 밝히지 못했다. 한진중공업은 이후 5차례나 더 노사분규를 겪어야 했고, 회사쪽은 그때마다 노조원들에게 수억원에 이르는 손배청구와 가압류 조치를 취했다. 이번 파업은 지난해 3월 회사쪽이 단행한 희망퇴직제도가 불씨가 됐다. 회사쪽은 650여명의 노조원에 대해 희망퇴직을 실시했는데 노조는 이 조치가 단협을 위반한 것이라며 반발했다. 이 충돌은 노사간의 뿌리깊은 불신을 자극했고, 결국 파업과 고소고발, 손배가압류 등 극한 대립으로 치달았다.
회유와 협박에 노조원들도 농성장 떠나
김 지회장은 지난 6월11일 밤 혼자 85호기 크레인으로 올라갔다. 이날은 김 지회장 등 노조 간부들이 마음을 다잡기 위해 삭발을 한 날이었다. 김 지회장은 다른 노조원들에게 부담을 주지 않기 위해 아무한테도 알리지 않고 ‘골리앗’의 철제 난간에 몸을 실었다. 그는 이후 단 한 차례도 크레인에서 내려오지 않았다. 1평 남짓한 크레인 조정실은 다리를 뻗고 누울 수 없을 정도로 비좁았지만 그는 아랑곳하지 않았다. 두 아들과 딸의 ‘회유’ 편지와 20도 이상의 일교차도 그의 의지를 꺾지 못했다. 심지어 지난 9월10일 부산항의 컨테이너 운반용 대형 크레인까지 쓰러뜨린 태풍 ‘매미’가 불어닥칠 때도 그는 크레인에서 내려오지 않았다. 매미는 ‘골리앗’을 몇 바퀴나 회전시켰지만 김 지회장은 조정실 의자에 매달려 간신히 살아남을 수 있었다. 이렇듯 목숨을 건 고공농성이 계속됐지만 회사쪽의 반응은 냉담했다. 회사쪽은 ‘노조위원장이 크레인에서 내려오면 협상하겠다’며 다른 간부들이 나선 협상을 외면하다, 지난 10월 초 협상 테이블에 나와 ‘파업에 따른 손실 150억원에 대해 손배소송을 내겠다’고 압박했다. 냉담한 것은 회사뿐만이 아니었다. 김 지회장이 크레인에 가지고 올라간 소형 텔레비전 속의 기자들은 연일 ‘전투적인 노조가 경제를 망친다’고 떠들어댔다. 보수언론의 ‘왜곡 보도’도 참을 수 없었지만, 이를 접한 세상 사람들이 노조를 부정적으로 보는 것은 더욱 견디기 어려웠다. 아예 노조 문제에 무관심한 사람들도 많았다. 보수언론과 회사의 공세에 노조원들도 흔들리는 듯했다. 파업 돌입 때 700여명으로 늘어났던 파업 참가자들은 추석을 앞두고 하나둘씩 농성장을 떠났다. 급기야 지난 10월14일 새벽 회사이 노조원들이 점거한 선박을 도크에서 빼내자 농성장에는 300여명의 노조원만 남게 됐다.
“아빠, 내가 일자리 구해줄 테니까…”
‘아빠, 내가 일자리 구해줄 테니까 그 일 그만하면 안 돼요? 그래야 운동회, 학예회도 보실 수 있잖아요!’ 딸 혜민(10)양의 간절한 ‘애원’도 외면할 정도로 우직했던 김 지회장을 죽음으로 내몬 것은 무엇이었을까. 그것은 회사의 천문학적인 손배가압류도, 언론의 왜곡 보도도 아니었다. 그를 죽음으로 내몬 것은 세상의 무관심이었다. 김주익 위원장은 거대한 자본에 맨몸으로 맞선 ‘다윗’이었지만, 세상의 무관심 앞에서는 ‘다윗’도 어쩔 수 없었다.
부산= 글 이춘재 기자 cjlee@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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