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슈추적 ] 2003년09월05일 제475호 

북-미 충돌 ‘째깍째깍’

베이징 6자회담서 북핵 타결의 실마리 찾지 못해… 미 강경파 독무대에서 북한은 궁지에 몰려

북한과 미국은 만나면 만날수록 오히려 불신만 쌓이는 걸까. 북-미 관계가 아무리 봐도 심상치 않다. 한국 정부 관계자들은 회담의 성과를 부각시키려 애쓰고 있지만 문제가 그렇게 간단치 않아 보인다. 이는 이번 베이징 6자회담(8월27∼29일)에서 북-미간 메우기 힘든 깊은 불신의 골을 다시 한번 확인시켰기 때문이다.

8월29일 베이징에서 끝난 첫 6자회담에서 북한이 한 주장의 핵심은 이렇다. “미국이 대북 적대시 정책을 바꾸고 위협하지 않는다면 핵계획을 포기하겠다. 적대시하지 않는다는 판단의 기준은 북-미 사이에 불가침조약이 체결되고, 외교관계가 수립되며, 미국이 우리와 다른 나라들 사이의 경제거래를 방해하지 않는 때로 볼 수 있다. 북-미 사이의 핵문제 해결을 위한 조처들은 동시행동으로 맞물려 행해야 한다. 일방적인 조기사찰은 어떤 경우에도 절대로 허용할 수 없다.”


사진/ 미국의 대북 적대시 정책에 6자회담은 성과를 기대하기 힘들었다. 지난 8월27일 회담 개막에 앞서 각국 대표들이 회잠장에서 손을 맞잡고 기념사진을 찍었다.(한겨레 황석주).

차라리 북미는 만나지 말아야 하는가

이에 맞서는 미국쪽 주장을 보자. “북한이 핵무기 계획을 검증 가능하게 불가역적으로 완전히 포기해야 안전 담보와 정치·경제적 혜택 문제에 대해 논의할 수 있다. 핵문제 해결을 위해 미-북간 양자회담을 추구하지 않을 것이다. 북한이 핵 계획을 포기한 다음에야 관계 정상화를 목표로 한 미사일·재래식 무기·위조화폐·마약거래·테러·인권·납치 등의 문제들에 대해 양자회담을 할 수 있다. 불가침조약은 적절치 않으며 필요하지도 않고, 흥미도 없다.” 미국은 북한이 지난해 10월 2차 핵위기를 자초한 우라늄 농축방식에 의한 비밀 핵개발프로그램과 1994년 제네바 기본합의를 어기고 재처리해온 플루토늄을 검증 가능한 방식으로 먼저 폐기해야 북한과 진지한 대화에 응하겠다는 확고한 뜻을 다시 밝힌 셈이다.

미국의 주장대로라면 핵문제 해결을 위한 첫 단추는 북한이 꿰어야 하고, 검증 수단으로 당장 조기사찰에 응하는 방법 외에는 대안이 없다. 미국 강경파 관점에서는 조기사찰 수용만이 북한이 신뢰를 회복하는 길인 셈이다. 이번 6자회담에서 미국 대표단이 북한이나 한국 등 다른 나라들과 달리 별다른 대안 없이 단출한 협상 보따리를 들고 온 이유다. 북한의 선 핵포기에 대한 ‘대가’를 논하기에는 아직 한참 이르다는 입장이다. 북한은 비밀 핵개발프로그램의 존재 자체를 부인하고, 조기사찰은 더더구나 허용할 수 없다는 단호한 입장이어서 타협의 여지를 발견하기란 쉽지 않다.

이번 6자회담은 엄밀한 의미에서 주고받는 협상의 장이라기보다는 나머지 5개국이 북한의 선도적 조처를 요구하는 자리의 성격이 강했다. 이는 미국이 이번 회담에 대해 유난히 흡족한 반응을 보이는 배경과 무관치 않다. 미국은 당장 핵문제 해결 자체보다는 명분 확보에 집착하고 있는 듯하다. 부시 정권의 노련한 외교안보팀들은 북한이 아무런 대가 없이 핵을 먼저 포기하지 않으리라는 것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다. 그렇다고 기존 대북외교 기조를 바꿀 수는 없는 노릇이다. 부시 정권의 버팀목인 강경파들이 물러설 가능성은 거의 없기 때문이기도 하다. 이들은 미국 내부나 국제사회의 대북 협상 요구에 적절히 부응하면서도, 부시 정권이 유지해온 기존의 대북 인식이나 정책의 타당성과 정당성을 입증하기 위한 장으로 6자회담을 활용하려는 의도를 갖고 있다.

<뉴욕타임스>는 8월29일 북한의 핵 위협 발언에도 불구하고 부시 행정부의 고위 관리들은 이번 회담이 어떤 면에서 ‘기대 이상의 성과’를 거둔 것으로 평가했다고 보도했다. 이번 6자회담을 통해 “중국과 러시아, 한국, 일본이 북한은 적대적인 태도를 버리고 핵프로그램을 포기하는 것 외에는 방법이 없다는 미국의 입장에 동조한 데 대해 부시 정부 관리들이 만족을 나타냈다”는 것이다. 미국쪽 수석대표인 제임스 켈리 국무부 동아태담당 차관보도 8월30일 이번 회담과 관련해 “생산적인 출발을 했다”고 밝힌 대목도 같은 맥락으로 분석된다.


사진/ “우리는 미국의 들러리가 되지 않으련다.” 6자회담 북쪽대표 김영일 부상이 지난 8월26일 베이징공항에 도착해 손을 흔들고 있다(왼쪽,연합). 6자회담에 참여한 각국 대표단이 첫날 전체회의를 하고 있다(오른쪽,한겨레 황석주).

미국 명분 얻기에 활용… 북한은 백해무익

미국의 이례적인 긍정적 평가와 달리 북한은 매우 불편한 심기를 감추지 않고 있다. 이는 애초부터 회담에 임하는 미국과 북한의 목표나 의도가 상이했음을 잘 보여준다. 북한 외무성 대변인 등은 8월30일 “이번 회담은 우리의 기대와는 너무도 어긋나는 탁상공론에 불과했으며, 오히려 우리의 무장해제를 위한 마당으로 되고 말았다”며 “우리는 이런 백해무익한 회담에 더는 그 어떤 흥미나 기대도 가질 수 없게 되었다”고 밝혔다. 6자회담 대표단도 베이징을 떠나기 직전 내놓은 성명에서 “이런 종류의 회담은 필요 없다”고 강조했다. 애초 기대와 달리 북한은 미국의 ‘기존의 선 핵포기 주장보다 더 후퇴한 날강도적 요구조건’(외무성 대변인, 8월30일 발언)에 직면하게 된 셈이다. 북한은 이번 회담에서 문건이 아닌 선언 차원에서라도 회담이 진전되기를 기대한 것으로 드러나고 있다. 이는 <조선중앙통신>이 8월29일 “우리측은 이번 회담에서 최소한 ‘미국의 정책전환 의사 대 조선의 핵포기 의사’ 표명 정도라도 합의가 이룩되어 모처럼 마련된 대화과정이 계속 이어지기를 기대하였다”고 밝힌 데서도 잘 드러난다.

북한이 회담 개최 직전까지도 미국이 6자회담에 응하면서 북한과의 양자접촉이나 체제보장과 관련한 진전된 안을 제시하는 등의 태도 변화에 적지 않은 기대를 걸고 있었음을 짐작케 한다. 김계관 외무성 부상 등 미국을 오래 상대해온 강경파 대신 비교적 온건한 이미지로 비쳐지는 김영일 부상을 처음으로 수석대표로 앞세워 회담장에 내보낸 것도 미국과 대결하기보다는 최소한의 타협을 이끌어내려는 북한 지도부의 계산이 작용했기 때문인 것으로 알려진다.

하지만 이번 6자회담에서 미국의 대북 적대시 정책의 견고함을 재확인한 북한으로서는 이전보다 더 막다른 골목에 서게 됐다. 북한 외무성 대변인이 8월30일 “우리로 하여금 자주권을 고수하기 위한 자위적 조치로서 핵억제력을 계속 강화해나가는 것 이외에 다른 선택의 여지가 없음을 더욱 확신하게 하고 있다”고 밝힌 대목에서도 이전과는 질적으로 다른 북한 지도부의 절박감을 읽을 수 있다. 북한을 더욱 초조하게 만드는 것은 핵개발 위협이 이전과 달리 제대로 먹혀들지 않고 있는 점이다. 부시 행정부 강경파들은 북한의 ‘핵 공갈’에 굴복하지 않겠다면서 핵위협을 철저히 무시하는 전략을 취하고 있다.

이번 6자회담에서 북한 수석대표가 발언한 ‘핵 보유국 선언 및 핵실험 실시 용의’에 대해 미 언론들이 호들갑을 피운 것과 달리, 부시 행정부 관리들은 입을 맞춘 듯 시큰둥한 반응을 보였다. 물론 부시 행정부 관리들의 이런 미지근한 반응을 북한의 핵보유를 그냥 눈뜨고 지켜보겠다는 뜻으로 해석해서는 큰 오산이다. 어쩌면 부시 행정부 강경파들은 북한이 주변 당사국들도 용인하지 못할 금지선 넘기를 유도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미국이 회담에서 수용하기 어려운 제의를 던져 북한의 반발을 유도해 ‘국제사회의 문제아’로 부각시키고 고립시키는 전략의 최종 목표인 셈이다.

핵 안에 든 북한의 벼랑 끝 전술은?

이제 관심사는 북한이 미국의 기대를 저버리지 않고 기존 관성대로 사태를 더욱 악화시키는 특유의 벼랑 끝 전술을 구사할 가능성이다. 이럴 경우 북한에게는 6자회담이 함정이 될 수도 있다는 점에서 우려를 자아낸다. 2차 6자회담 개최를 고대하고 있는 미국과 달리 어떻게든 6자회담에서 빠져나오려는 북한의 처지는 쫓고 쫓기는 지금의 미묘한 위기 상황을 잘 보여준다. 북핵 문제 해결을 김정일 체제 교체와 연계시키는 전략을 채택하고 있는 부시 행정부의 강경파들은 북한이 국제사회의 요구에 부응하기보다는 더욱 상황을 악화시키는 조처를 취하는 등 기존 행태를 답습해 함정에 빠지기를 숨죽여 지켜보고 있다.

임을출 기자 chul@hani.co.kr







.




↑Back to the top