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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사법 독립군’을 보았다” 대법관 파동, 자문위원 회의에서 판사와의 대화까지… 멋진 판결을 하고 싶었던 판사는 끝내 좌절하나
1954년 미국 연방대법원은 흑인소녀 린다 브라운의 아버지 올리버 브라운이 토피카 교육위원회를 상대로 낸 소송에서 역사적인 판결을 내렸다. 워런 대법원장은 판결에서 “우리는 공공교육 분야에서 ‘분리하되 평등하면 된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처사”이며 “분리된 교육 시설물들은 본질적으로 평등하지 않은 것”이라고 밝혔다. 이에 따라 1896년 이른바 ‘플레시 대 퍼거슨’ 사건에서 “분리되어 있지만 평등하기만 하면 흑백 학생들의 분리는 합헌”이라는 인종분리 교육정책은 막을 내렸다. 흑인 민권운동사에 한획을 긋는 판결이었다. 그렇다. 그는 그런 판결을 해보고 싶다고 했다. 8월13일 사퇴서를 내던지고 기자실에서 닭똥 같은 눈물을 흘리던 그는 “평생 단 한번만이라도 그런 판결을 해보고 싶다”고 기자에게 말한 적이 있다. 18년 동안 걸쳐온 ‘법복’을 벗은 박시환 서울지법 부장판사였다. 많은 판사들이 그렇듯 승진을 못해서, 아니면 돈이 필요해 개업할 결심을 한 게 아니란다.
대법관 인사는 법원의 장래 결정할 사안
그는 기자들에게 “새 대법관 선임이 종전과 아무런 차이점이 없이 기존의 기준과 방식에서 한 걸음도 나아가지 못했다”면서 “이는 사법부의 변신을 기다린 국민과 법관들의 기대를 저버리는 일이며 시대의 엄숙한 요구에 대한 중대한 외면”이라고 강조했다. ‘대법관 한 사람의 제청 때문에 이렇게까지 할 필요가 있느냐?’고 기자들이 물었다. 그는 단호한 어조로 “사무칠 만큼 뼈저린 문제였다. 응어리진 문제들이 풀렸으면 한다”고 답했다. 사실 그의 사퇴는 전날 있었던 회의가 직접적인 계기가 됐다. 8월12일 오후 대법원 6층 대회의실. 대법원장이 대법관 제청자문위원회로부터 새 대법관 후보에 대한 ‘자문’을 받는 자리였다. 대법원장이 제시한 3명의 후보들은 사법시험 10회 1명에 11회 2명으로 모두 현직 법원장들이었다. 시민사회와 법원 내부의 개혁적 흐름을 정면으로 거스르는, 기수에 따른 퇴행적 조처였다. 애초 위원회는 위원회 내규에 묶여 대법원이 깔아놓은 ‘멍석’에서 벗어날 수 없었다. 회의 중간에 당연직 위원이자 ‘법조삼륜’의 두축인 강금실 법무장관과 박재승 대한변호사협회장이 퇴장했다. 이들은 나란히 사퇴서를 법원 기자실 팩스로 보내왔다. “대법원이 기존 관행에 따라 대법관 후보군을 정하는 상황에서 자문위가 실질적인 의미를 살리기 어렵다고 판단했다”는 게 강 장관의 견해였다. 현 자문위원회가 대법원장의 뜻을 추인해주는 요식 절차에 불과하다는 것이다. 박 회장 역시 “대법원장이 3명을 미리 정해놓고 그 안에서 토의해 말해달라는 것은 대법원장의 의중 그대로 통하는 거 아니냐. 이게 무슨 자문회의냐”고 꼬집었다. 13일 박시환 부장판사의 사퇴는 들불처럼 번져나갔다. 이날 서울지법 북부지원 이용구 판사 등 재경지역의 단독판사들 일부가 분주히 움직였다. 이 판사는 법원 내부 게시판에 “대법관 제청에 관한 법관들 의견 수렴 - 대법원장의 재고를 촉구하며”라는 글을 띄우고 사시 17회 이상의 부장판사들과 평판사들을 상대로 대법원장에 올릴 연판장에 서명을 받았다. 당일 오후 99명의 판사들이 서명에 참여했다.
제대로 된 판결을 위한 숨가쁜 순간들
“대법관 선임이 법관 승진의 최종 단계로 운영됨으로써 대법원이 지나치게 동질적인 연령·배경·경험을 지닌 법조인들로만 구성됐다. 이런 인사제도가 법원 내적으로 수직적인 관료구조를 심화시켰고, 외적으로는 다양해지고 복잡해지는 사회적 분쟁에 대한 재판에서 이해관계를 적절히 반영하지 못하고 있다.” 연판장에는 서명 판사들의 뜻이 오롯이 녹아 있었다.
이날 밤 서울지법 부장판사 5~6명은 서울 시내 한 식당에 모였다. “박 부장의 사퇴가 찻잔 속 태풍으로 끝나서는 안 된다”는 데 모두들 동의했다. 사태 추이에 따라서는 대법원장의 사퇴를 요구해야 한다는 의견들도 쏟아져나왔다. 이들 부장판사는 ‘공’을 넘겨받은 대법원이 어떻게 나올지 지켜보자며 자리를 정리했다. 한 부장판사는 모임 뒤 밤늦은 시각에 기자와 전화통화를 했다. “이번 사태는 해프닝으로 우연하게 생긴 게 아니며 전근대적이고 폐쇄적·밀행적인 사법부 문제점의 빙산의 일각에 불과하다. 법관 인사제도개선위원회나 대법관 제청자문위원회는 문제를 풀려는 형식적 시늉일 뿐이지 진실성이 없다.” 과격해 보이지 않았던 취재원들의 입에서 과격한 발언들이 쏟아져나왔다. 하루 종일 산더미처럼 쌓인 소송서류을 헤집고 다녀야 하는 이들에게도 이런 뜨거운 가슴이 살아 있었구나! “법률가로서 할 만큼 했다는 결론을 내리고 싶은 그런 재판을 원없이 해보고 싶다. 늘 찜찜하다. 미봉하거나 때운다는 생각 때문에 제대로 재판을 했다는 생각이 안 든다. 오죽하면 판사들이 사건을 ‘뗐다’고 표현하겠느냐?” 넋두리는 계속됐다. 그의 ‘바람’과 ‘현실’은 너무 멀어 보였다.
연판장 서명 판사와 침묵하는 판사
8월15일 광복절. 서명을 주도한 소장판사 5~6명은 이날 밤 서울 시내 한 식당에 모였다. 이들은 ‘대안’을 놓고 토론했다. 한쪽에서 “우리가 전달하고 싶은 내용은 의견서에 다 담았다. 의견을 개진한 것으로 우리의 행동은 끝났다”는 의견이 나오자, 다른 한쪽에서는 “우리의 요구가 무시된 채 대법관 후보 제청이 강행된다면 어떤 식으로든 의사표시를 해야 하는 거 아니냐?”는 의견이 잇달았다. 모임에 참석한 한 판사는 “일단 대법관 후보 제청 때까지 지켜보겠다. 추가적인 집단행동에 나설지 아니면 다른 어떤 행동을 할지는 그때 가서 결정하겠다는 입장을 정리했다”고 모임 분위기를 전했다. 이날 대법원은 전국 법원 판사 150여명을 상대로 설문조사를 벌였다.
주말을 거치면서 잠잠해 보이던 사태는 18일 월요일 갑자기 고빗사위로 치닫기 시작했다. 대법원은 오전 10시 전국법관회의를 소집했다. 유례없는 일이었다. 그동안 부장판사들의 의견을 수렴해오던 서울지법 문흥수 부장판사가 오후 2시30분에 기자회견을 자청했다. ‘사법개혁의 전도사’라는 별명을 지닌 그는 또 어떤 입장을 밝히려는 걸까. 법원 출입 경력이 3년째로 접어들지만, 이런 긴장감은 처음이었다. 이런 와중에도 연판장 서명 판사들과 다른 의견을 지닌 판사들도 많았다. 서명에 참여한 판사는 1900여명 가운데 10%도 못 미치는 수치다. 이날 판사실에서 기자를 만난 서울고법의 한 판사는 “침묵하는 다수가 과연 심정적으로 집단서명에 동의하는지 의문스럽다”고 말했다. 그는 이어 “사표를 안 낸 분들이 현 상황에 대한 생각을 달리해 사표를 안 낸 것인지, 아니면 용기가 없어서인지 따져봤을 때 후자보다는 전자라는 생각이 든다”고도 했다. 슬프게도 이번 사태에 관심을 보일 수 없을 만큼 재판에 쫓기는 판사들도 많았다. 오후 들어 대법원의 강경 분위기가 전해졌다. 이번 제청에서는 대법원장이 추천하는 인물들로 그대로 제청하는 방법 외에는 다른 방법을 찾을 수 없다는 얘기였다. 오후 법관회의가 빛 좋은 개살구로 끝날 가능성이 높아지고 있었다. 문흥수 부장판사의 방에 기자들이 모여들었다. ‘조건부 사퇴’가 그의 발표내용이었다. 그는 법원 내부 통신망에 “순교자의 심정으로 이 글을 쓴다”로 시작하는, ‘법관으로서 드리는 마지막 글’을 띄웠다. “지난주 대법관 제청 건의 사태는 우발적인 것이 아니라 필연적인 것이다. 과거 일제시대 사법제도를 이어받은 우리 사법부가 군사독재를 거치면서 더욱 비민주적·전근대적·관료적·폐쇄적 제도로 고착되고 있지만, 그에 대한 근본적 개선 시도는 한번도 성공하지 못했고 매번 땜질식 처방에 그쳤다.”
정녕 사법개혁 의지가 있는 것인가
오후 3시. 법관회의가 시작됐다. 긴 기다림 끝에 밤 10시40분께 회의가 끝났다. 회의가 끝나기 전에는 박수소리도 간간히 들렸다. “솔직히 의견 개진했다”거나 “할 말을 다 했다”고 말하는 판사들이 많았다. 그러나 애초 대법원장이 제시한 후보들로 제청이 다시 이뤄질 수밖에 없을 것이라는 대법원 관계자의 설명이 이어지면서 불안한 느낌을 감출 수 없었다. 대법관 제청을 재고해야 한다고 목소리를 높여온 판사들이 이대로 숨죽일 수 있을까. 파문은 새로운 국면으로 접어들고 있었다.
류이근 기자 / 한겨레 사회부 ryuyigeun@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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