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www.hani.co.kr/h21 |
|
| 기사섹션 : 이슈추적 | 등록 2003.07.31(목) 제470호 |
|
[이슈추적] 뜨겁다, 올 데까지 온 주5일제 노동조건 후퇴 없는 주5일제가 사업장별로 도입되자 다급히 ‘정부안’ 통과 외치는 재계
지난 2000년에 노동계가 사회적 이슈로 던진 뒤 무려 4년여를 끌어온 노동시간 단축, 즉 주5일제를 둘러싼 논란이 또 다시 가열되고 있다. 주5일제 관련 근로기준법 개정안은 이미 지난해 10월 국회에 제출된 바 있다. 이른바 ‘정부안’인데, 이를 놓고 노사정이 막판 대화를 통해 최종 합의를 이끌어내기로 했으나 교착 상태에 빠져 있었다. 그런데 정치권에서 갑자기 7월에 법안 강행처리 방침을 밝히면서 주5일제 문제가 수면 위로 급부상했다. 하지만 노동계의 반발에 부닥쳐 강행처리는 무산됐고 주5일제는 다시 재협상 국면으로 들어섰다. 국회가 재협상 시한을 8월15일까지로 일단 못 박아놓은 가운데 민주노총과 한국노총은 재협상에 대비한 노동계 단일안 마련 작업에 착수했다. 양대 노총은 8월6일까지 단일안을 마련한 뒤 8월8일부터 국회 환경노동위원회의 중재 아래 노·사·정 재협상을 시작할 예정이다.
주5일제의 네 가지 풍경
노·사·정간 막판 절충은 노사정위원회 채널 등을 통해 그동안 수차례 있었다. 그러나 ‘합의(를 위한) 대안’까지 내건 막판 시도는 타결이 될듯 하다가 번번이 틀어지고 말았다. 그런데 지금은 사정이 판이하게 달라졌다. 한사코 주5일제 도입에 반대해왔던 전국경제인연합회와 한국경영자총협회가 느닷없이 정부안을 조기에 법제화해달라고 요구하는 진풍경이 벌어지고 있다. 겉으로만 보면, 노동계가 요구해온 주5일제를 사용자쪽이 오히려 빨리 도입하자고 촉구하는 형국이다. 왜 이런 이상한 일이 벌어지고 있는 것일까? 주5일제를 둘러싼 몇 가지 ‘현실적 풍경’부터 보자. 풍경 하나. “주5일제 시행 이후 1년간 나뿐 아니라 동료들의 일상이 크게 바뀌었다. 주말도 없이 힘들게 일하고 여름휴가를 목매어 기다렸던 옛 풍경이 사라지고 있다. 이틀간의 주말 휴일마다 가족들과 시간을 많이 보내서 그럴 것이다.” 신한은행 영업부 직원 신아무개씨의 말이다. 주5일제 실시로 노동의 피로가 줄어들었기 때문에 ‘장시간 노동으로부터의 해방’을 뜻했던 기존 여름휴가를 이제는 꼭 떠나지 않아도 된다는 얘기다. 지난해 7월부터 주5일제로 바뀐 은행 노동자들의 삶의 질이 달라진 것이다. 은행의 주5일제는 연·월차 휴가와 특별휴가 등 총 26일의 휴가를 활용해 1년 52주의 토요일 휴무를 실시하는 방식인데, 임금삭감을 수용하되 일부 휴가에 대해서만 임금을 보전받고 있다. 풍경 둘. 삼성SDI 직원들은 지난 7월17일(제헌절)부터 20일까지 무려 나흘을 푹 쉬었다. 토요 휴무에다가 샌드위치데이인 금요일까지 임시휴무일로 정했기 때문이다. 이 회사는 석가탄신일(5월8일)이 낀 5월에도 같은 방식으로 나흘을 쉬었다. 남들은 명절 때조차 나흘을 쉬기 어려운 판인데, 5월부터 시작된 삼성그룹의 주5일제에 따라 벌써 두번이나 긴 연휴를 보낸 것이다. 삼성SDI 류준형 과장은 “주말을 이용해 멀리 있는 가족이나 친지를 만나러가거나 어학공부를 하는 직원이 많다. 무의탁 독거노인이나 장애아동 봉사활동을 펼치는 등 새로운 주말 풍속도가 생겨나고 있다”고 말했다. 한편 LG그룹, 삼성그룹, 포스코에 이어 SK텔레콤도 8월부터 주5일제 근무제를 도입하기로 했다. 물론 노동시간을 주40시간으로 단축하는 방식이 아니라 현행 주44시간 노동을 전제로 연·월차 휴가를 빼서 토요일을 쉬는 ‘편법적인 주5일제’다. 지난해 11월부터 주5일제를 도입한 증권회사도 평일 퇴근시간을 30분 연장하는 대신 토요일을 쉬고 있는데 역시 엄밀한 의미에서 주5일제라고 할 수 없다.
“호미로 막을 것을 가래로 막은 격”
풍경 셋. 안산 반월공단에 있는 중소 자동차부품업체인 동서공업, SJM 그리고 동양엘리베이터 등은 개별 단협을 통해 3년 전부터 ‘노동조건 후퇴 없는 주5일제’를 실시하고 있다. 대기업이나 은행처럼 연·월차 휴가를 공제하는 방식이 아니라 주44시간 노동을 주40시간으로 실질적으로 단축했다. 금속노조 경기지부 이승규 부장은 “이런 사업장을 보면 기를 쓰고 여름휴가를 가겠다는 조합원이 별로 없다. 토요 휴무라서 금요일에 월차휴가 하루만 내면 언제든 길게 쉴 수 있기 때문이다. 처음에는 할증 붙은 임금을 타먹는 재미로 토요일에도 나와 특근하는 버릇이 있었는데 얼마 안 있어 토요 휴무가 자연스럽게 정착됐다”고 말했다. 대원산업·창화공업 등 중소 자동차부품업체들은 대부분 단협에 “대기업 원청이 주5일제를 도입하면 같은 조건으로 주5일제를 동시 실시한다”는 부속합의서를 맺어놓고 있다. 풍경 넷. 7월15일 금속노조 산별 중앙교섭에서 100개 금속사업장 노사는 주5일제를 올해 10월부터 실시하기로 합의했다. 특히 이번 합의는 재계가 충격 속에 정부안 전격수용으로 급선회한 직접적인 계기로 작용했다. 합의안에 따르면 교섭에 참여한 전 사업장은 오는 10월부터 시작해 늦어도 2005년까지 ‘기존 임금을 삭감하지 않는’ 주5일제를 도입하기로 했다. 반면 국회에 제출돼 있는 정부안은 사업장 규모별로 2010년까지 단계적으로 주5일제를 도입하고, 연·월차 휴가일수 축소나 연·월차 수당 폐지 등 대폭적인 임금삭감을 담고 있다. 노동자쪽에서 볼 때 금속노조가 정부안보다 훨씬 나은 조건으로 ‘실질적인 주5일제’를 따낸 셈이다. 특히 이번에 합의한 사업장은 대부분 중소부품업체들이다. 현대자동차에 앞서 오히려 중소 사업장이 먼저 도입한 것인데, 주5일제를 확산시키는 결정적인 전환점이 마련됐다는 게 노동계의 평가다. 전경련과 경총이 다급해진 건 당연하다. 주5일제 법안 제정이 미적거리는 와중에 개별 사업장에서는 금속노사 사례처럼 단체협약을 통해 이미 주5일제가 빠르게 확산되고 있기 때문이다. 사용자쪽은 현장의 주5일제 도입이 급물살을 타고 있을뿐 아니라 ‘노동조건 후퇴 없는 주5일제’라는 노조의 요구가 관철되는 양상으로 단체협상이 전개되고 있는 ‘현실’에 크게 당혹스러워하고 있다. 경총 김정태 상무는 “경총 회장단이 비공식적으로 국회를 방문해 주5일제 법안의 조속한 통과를 촉구하고 있는 중”이라며 “금속노사의 주5일제 합의는 사용자쪽에서 볼 때 법안 처리가 늦어지는 바람에 호미로 막을 것을 가래로 막은 격이 됐다”고 말했다. 노사 모두 공식적으로 정부안에 반대해왔는데, 사업장마다 사용자쪽이 힘의 논리에서 노조를 당해내지 못하자 재계가 태도를 바꾼 것이다. 오히려 법안을 빨리 제정하는 것이 주5일제 불길을 차단하는 길이라고 판단한 것이다. 민주노총 손낙구 실장은 “재계도 그동안 정부안에 반대한다고 겉으로 주장해왔지만, 실상은 유리한 몇 가지 조항을 더 챙기려는 심산에서 ‘할리우드 액션’식으로 일부러 반대해온 것일 뿐”이라고 말했다.
민주노총, 협상 주요 방향 놓고 고심
네 가지 풍경의 공통점은 뭘까? 뚜렷한 공통점은 거의 없다. 다만 주5일제가 법제화되지 않은 단계에서 사무직과 생산직 또는 업종별로 여러 혼란스런 형태로 주5일제가 도입되고 있다. 또 장시간 노동에 지친 노동자들의 삶의 질 개선은커녕 임금과 휴일휴가 등에서 노동조건 후퇴를 겪고 있는 주5일제 노동자들도 있다. 특히 지난해까지 노동조합마다 주5일제 법안 통과 뒤에 단협을 통해 주5일제를 도입하는 쪽으로 가닥을 잡았는데, 이제 더 이상 법안 통과를 기다리지 않고 사업장별 도입으로 나아가고 있는 양상이다. 결국 ‘올 데까지 온’ 주5일제는 이제 논란에 종지부를 찍어야 하는 막판에 이르렀다. 재협상은 △임금보전 △연·월차 휴일휴가 일수 △시행시기 △생리휴가 무급화 △연·월차 수당 삭감 등 복잡한 쟁점들을 놓고 정부안을 소폭 수정 및 절충하는 방식으로 진행될 공산이 크다. 노사간 완전 합의는 거의 불가능하고, 법안이 처리된다면 노사 모두 상대쪽의 반발을 최소화할 수 있는 몇 가지 명분을 주고받는 선에서 끝날 가능성이 높다. 사실 주5일제를 바라보는 시각은 기업마다 노동자마다 천차만별이다. 계절업종은 탄력근로제가, 3교대 제조업종은 초과노동 할증률이 어떻게 바뀔 것인지가 관심사이고, 근속연수가 높은 노동자는 연·월차 수당에, 중소영세 비정규노동자는 시행 시기에 촉각을 곤두세우고 있다. 민주노총쪽은 “‘임금삭감 없는 주5일제’와 ‘중소영세·비정규직 희생 없는 주5일제’ 중 어느 쪽을 재협상의 주요 방향으로 잡고 갈 것인지가 고민”이라며 “일터에서 주5일제를 요구할 노조가 없는 중소영세·비정규직 노동자들이 주5일제 혜택에서조차 차별받는 일은 없어야 한다는 게 큰 원칙”이라고 말했다.
조계완 기자 kyewan@hani.co.kr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