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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 핵타령 ‘고무줄 장단’ 군축에 관한 국제 조약·협정 훼손하는 이율배반… 특정국가 희생양 삼아 지구촌 안정 깨뜨려
“핵확산금지조약 당사국은 핵 보유국이든 비 보유국이든 조약을 강화하기 위한 모든 노력을 기울여야 한다. 일부 국가들이 의무를 이행하지 않고, 조약의 중요한 성과를 훼손하는 현실을 국제사회가 더 이상 좌시해서는 안 될 것이다.” 지난 4월28일 스위스 제네바에서 시작된 핵확산금지조약(이하 NPT) 평가회의 준비위원회에 참석한 존 울프 미 국무부 비확산담당 차관보는 국제사회를 향해 목소리를 높였다. 콜린 파월 국무장관의 성명을 대신 읽어 내려가던 그는 “미국은 NPT가 부과한 의무를 성실히 이행할 것임을 분명히 밝힌다”고 강조한 뒤, 북한과 이란 등 몇몇 나라의 조약 의무 불이행 사례를 조목조목 거론했다.
신형 핵무기 금지에도 ‘벙커 버스터’에 미련
비슷한 시각, 미국 수도 워싱턴에서는 반핵·평화단체 활동가들이 숨가쁘게 움직이고 있었다. 4월11일부터 28일까지 봄철 휴회에 들어갔던 미 의회가 이틀 후인 30일 개회를 앞두고 있는 탓이다. 이번 회기가 중요한 것은 부시 행정부가 추진하는 ‘저강도(low-yield) 핵무기’ 연구·개발 예산이 포함된 2004년도 국방예산에 대한 논의가 상하 양원 국방위원회에서 진행되기 때문이다. 미 하원은 지난 1994년 신형 핵무기 개발을 금지하는 이른바 ‘스프랫-퍼스 수정안’을 통과시킨 바 있다. 당시 존 스프랫 의원(민주당-사우스캐롤라이나주)과 엘리자베스 퍼스 의원(민주당-오리건주)의 주도로 향후 5킬로톤 이하 저강도 핵무기 연구·개발을 금지하는 수정조항을 국방예산안에 포함시키는 데 성공했다. 그 뒤 공화당 강경파 의원들을 중심으로 이를 폐기하려는 시도가 몇 차례 있기는 했지만, ’스프랫-퍼스 수정안’은 미국의 소형 핵무기 개발을 막는 효과적인 견제장치 역할을 해왔다. 그러나 부시 대통령이 집권하면서 상황이 급변하기 시작했다. 행정부 관료와 공화당 강경파 의원들은 이른바 ‘벙커 버스터’로 불리는 소형 핵무기 개발의 필요성을 기회 있을 때마다 강조했다. “지하 깊숙이 숨겨놓은 생화학무기 등 대량살상무기를 파괴하기 위해서는 소형 핵무기 개발이 필수적”이라는 것이다. 이에 따라 미 에너지부는 이미 연간 1500만달러를 들여 지하 시설물 파괴용 소형 핵무기 개발의 타당성에 대한 3개년 검토작업을 진행 중이다. 물론 수정안의 금지규정을 피하기 위해 지금까지는 새로운 핵탄두 개발이 아니라 기존 탄두 성능개량에 초점을 맞춰왔다. 그런데 미 국방부가 최근 2004년 국방예산안을 통해 다시 한번 수정안 폐기를 요청했다. 이와 때를 같이해 공화당 하원 정책위원회도 국방부 입장을 지지하는 보고서를 내놨다. 예산안 자체가 법률로 효력을 발휘하는 미국에서 국방예산이 원안대로 통과되면 저강도 핵무기 개발을 억제해온 수정안은 자연 폐기된다. 울프 차관보의 공언과 달리 미국은 NPT가 부과한 회원국으로서의 의무를 정면으로 부인하고 있는 셈이다. 부시 행정부 외교·안보 정책의 핵심과제는 ‘테러와의 전쟁’과 ‘대량살상무기 확산방지’다. 이미 두 차례 전쟁 아닌 전쟁을 치른 것도 모두 이들 정책과제를 해결하는 것이 명분이었다. 9·11 테러 공격의 보복 차원에서 벌인 아프간 전쟁이 ‘테러와의 전쟁’이었다면, 사담 후세인 정권을 무너뜨린 미·영 합동군의 이라크 침공은 ‘대량살상무기 확산방지’라는 이름으로 단행됐다. 그러나 정작 부시 대통령은 이런 정책목표와 사뭇 배치되는 행태를 보여왔다.
ABM 조약 내팽개치고 NSA 약속 저버려
지난 1970년 미국과 러시아(옛 소련)는 유엔 총회에서 NPT에 대한 최종 합의를 이끌어냈다. 1967년을 기준으로 당시까지 핵무기를 갖고 있거나 핵실험에 성공한 나라(공교롭게도 유엔 안보리 상임이사국인 미·러·영·프·중 등 5개국)만 핵무기를 계속 보유하고, 나머지 나라들은 앞으로 영원히 핵무기를 갖지 않는다고 선언하는 것이 그 뼈대다. 대신 핵 보유국은 비 보유국에게 핵 에너지의 평화적 사용을 위한 기술을 이전해주기로 했다. 여기에 핵 영구보유국이 궁극적으로 핵무기를 근절하겠다는 약속을 조약 제6조에 명시했다. 태생적 불평등성에도 핵확산금지조약이 냉전시대 인류를 핵전쟁의 공포로부터 막아주는 든든한 버팀목 구실을 할 수 있었던 것도 이 때문이다. 조약의 효력이 만기에 다다른 1995년, 제5차 재검토회의에서 미국은 NPT를 무기한 연장하면서 회원국에 대한 핵무기 사용 또는 사용하겠다는 위협을 하지 않겠다는 이른바 ‘소극적안전보장’(NSA)을 약속했다. 핵무기 비보유국들은 이를 법적 효력이 있는 선언으로 받아들였다. 그로부터 5년 뒤인 2000년 5월 NPT 6차 평가회의가 미국 뉴욕의 유엔본부에서 열렸다. 조약 가입 180여개국 대표들은 회의에서 △미국과 러시아 등 핵보유 5개국의 핵무기 완전제거 약속 △무기용 핵분열 물질 생산 금지조약 5년 이내 타결 △탄도탄요격미사일(ABM) 제한조약 유지·강화 등을 주요 내용으로 하는 합의문을 만장일치로 채택했다. 1970년 조약 발효 이후 5년마다 열려온 평가회의에서 합의문이 채택된 것은 1985년 이후 15년 만에 처음이었다. 그러나 불과 3년여 만에 세계는 급격히 달라진 안보환경에 놓이게 됐고, 미국은 당시의 약속을 대부분 파기하거나 이행하지 않고 있다. 핵무기 완전 제거를 위한 노력은 전무했고, 무기용 핵분열 물질 생산 금지조약을 위한 논의는 시작조차 되지 않았다. 그리고 미국은 ABM 조약을 헌신짝처럼 내팽개쳤다. 우선 미국은 2001년 국방부가 내놓은 ‘핵태세검토보고서’(NPR)를 통해 ‘소극적 안전보장’ 약속을 저버렸다. 핵공격이 아닌 경우에도 생화학무기 또는 급작스런 군사적 상황 아래서 핵무기를 사용할 수 있다고 선언했다. 그러나 핵태세검토보고서가 북한·이란 등 이른바 ‘무법국가’에 대한 부시 행정부의 유일한 ‘도발’은 아니었다. 2002년 9월 발표된 국가안보전략과 같은 해 12월 발표된 대량살상무기 대응전략 등을 통해 부시 행정부는 테러와 관련 있는 나라가 대량살상무기를 보유하려 할 경우 선제공격도 가능하다는 입장을 분명히 했다. 여기에는 핵무기를 동원할 수도 있다는 게 미 정부 입장이다. 실제로 미·영 합동군은 이라크 침공에 앞서 “사담 후세인 정권이 생화학무기를 사용하면, 핵무기로 보복할 것”이라고 밝힌 바 있다. 여기에 북한을 비롯한 ‘깡패국가’의 위협을 들먹이며 탄도탄요격미사일 제한협정을 일방적으로 파기하기까지 했다.
진정 누가 NPT 체제를 위협하고 있는가
레베카 존슨 영국 애크로님연구소 사무총장은 “부시 행정부는 핵무기 보유나 배치가 문제인 것이 아니라, 이런 능력이 잘못된 자들의 손에 들어가는 것이라고 주장한다. 이런 잘못된 접근법은 핵확산을 막으려는 국제사회의 노력에 보탬이 되지 않을 뿐 아니라, 오히려 상황을 악화시켰다”고 지적했다. 그는 특히 핵확산금지조약과 관련해 부시 행정부의 잘못된 외교정책이 치명적 결과를 낳고 있다고 말한다. 그에 따르면, 부시 행정부의 외교·안보 정책은 두 가지 점에서 NPT 체제를 위험에 빠뜨렸다. 먼저 2000년 제5차 평가회의에서 약속한 ‘검증 가능하고 돌이킬 수 없는 핵 군축’ 약속을 뒤집었다. 핵태세검토보고서가 나온 뒤인 2002년 5월 미국과 러시아는 2012년까지 전략핵탄두를 1700~2200기까지 줄이는 것을 뼈대로 하는 모스크바 조약을 맺었다. 부시 행정부는 이를 두고 “핵 군축을 향한 결연한 의지를 보여주는 것”이라고 주장했지만, 이는 현실과는 거리가 멀다. 기존 전략핵무기감축협정(START)과 달리 모스크바 조약은 핵탄두나 대륙간탄도미사일 등 핵탄두 장착이 가능한 운반수단 파괴 조항이 없다. 또 협정 이행 여부를 검증할 수 있는 제도적 장치도 전무하다. 990004 게다가 부시 행정부는 “모스크바 조약은 실전 배치된 탄두에 대해서만 효력이 있다”고 강조한다. 이에 따라 수천기의 핵탄두가 이른바 ‘대응력’이라는 이름으로 몇주 또는 몇 개월 안에 다시 배치될 수 있도록 보관됐다. 이는 ‘돌이킬 수 없는 핵군축’을 규정하고 있는 NPT 체제에 정면으로 배치된다. 부시 행정부가 전략 핵무기 ‘준비태세’를 낮추려는 시도를 하지 않고 있다는 점도 주목된다. 이를테면 대륙간탄도미사일에서 핵탄두를 분리해 보관하는 것만으로도 핵무기의 실제 사용 위험을 크게 줄일 수 있다. 그러나 현재 미국과 러시아는 각각 약 2천기에 달하는 핵탄두를 명령만 떨어지면 몇분 안에 발사할 수 있도록 준비태세를 유지하고 있다. 특정국가를 ‘깡패·무법자’로 몰아세우며 다른 한편으로 신형 핵무기 개발에 열을 올리는 부시 행정부의 이중적 태도에 대한 비판의 목소리는 미국 내에서 오히려 높다. “북한의 NPT 탈퇴 및 핵보유 선언 등에 대해서는 비난의 목소리가 높지만, 정작 미국이 NPT에서 규정한 의무사항을 지키지 않고 있다는 사실은 간과하고 있다.” 존 버로 미국 핵정책변호사위원회 사무국장은 “북한이나 이란 등에 들이대는 잣대는 미국에도 똑같이 적용돼야 한다”고 강조한다. 평화운동 진영만 부시 행정부를 비판하는 것은 아니다. 지난 4월29일 미 워싱턴의 군비통제협회(ACA)가 주최한 토론회에서 미 정계의 대표적 진보파로 불리는 에드워드 케네디 상원의원(민주당-매사추세츠주)도 부시 행정부의 행태에 대한 비판의 날을 세웠다. 케네디 의원은 “부시 행정부가 소형 핵무기 개발을 추진하면, 이는 자칫 다른 나라에 ‘핵무기가 실제 전투에서 반드시 필요한 무기’라는 인상을 줄 수 있다”고 경고했다. 다이앤 페인스타인(민주당-캘리포니아주) 상원의원도 “우리가 새로운 핵무기 개발 계획을 추진하면서, 어떻게 다른 나라에는 핵무기를 개발해선 안 된다고 설득할 수 있느냐. 핵무기에 대한 우리의 태도가 분명치 않으면, 우리가 그토록 노력해온 핵무기 확산을 피할 수 없을 것”이라고 지적했다.
“웬만하면 남 신경 끄고 니나 잘하세요”
냉전시대의 극단적 대결이 막을 내린 지 10여년이 흘렀지만, 인류는 핵전쟁의 위험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핵무기를 근절하겠다는 NPT의 애초 약속도 공허하기만 하다. 오히려 핵무기의 실전 사용 가능성은 심각한 수준까지 높아져버렸다. 이런 위험을 부추기는 것은 누구인가 존 울프 차관보의 발언 다음날인 4월29일 연단에 나선 알리 코쉬루 이란 외교부 차관은 이렇게 되묻는다. “미국을 제외한 어떤 나라가 재래식 무력충돌이 벌어져도 핵무기를 사용할 수 있다고, 전투계획에 맞춰 새로운 핵무기를 개발하겠다고 했는가 없다. 미국말고 누가 핵무장을 하지 않은 NPT 회원국을 상대로 핵공격의 목표물이 될 수 있다고 했는가 없다. 핵 보유국 가운데 우주에 핵무기를 배치할 계획을 추진하고 있는 나라가 있는가 포괄핵실험금지조약을 비준하지 않고 있는 핵 보유국이 미국말고 있는가 없다. 왜 미국은 탄도탄요격미사일 제한협정에서 일방적으로 탈퇴하고, 세계의 전략적 안정을 위협하는가 군축 관련 국제조약과 협정을 미국처럼 훼손한 나라가 있는가 없다.”
정인환 기자 inhwan@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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