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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섹션 : 이슈추적 등록 2003.03.06(목) 제449호

[이슈추적] 언론, 원칙으로 풀면 풀릴까

가판 구독 금지·청와대 기자실 개방 등 ‘위스키&캐시’를 버린 노무현 정부 언론개혁 정책

저녁 6시, 대기업 홍보실 김아무개(35) 과장은 여느 때처럼 서울 광화문 이순신 장군 동상 앞에 서 있다. 김 과장과 비슷한 처지의 사람들이 하나둘 모이기 시작한다. 내일자 조간신문 가판을 기다리는 기업과 관공서의 ‘홍보쟁이’들이다. 가판신문은 서울에 있는 대부분 조간신문사들이 발행일 전날 오후 6시쯤에 서울시내 지하철·가판대 판매 등을 위해 1만부 안팎씩 발행하는 신문이다. 광화문 동아일보사옥 근처에는 오후 6시30분이면 대부분 조간신문 가판이 도착한다. 김 과장은 자기 회사 기사가 실렸는지 살피고 있다.

“세무 제재, 뒷조사도 하지 않겠다”

저녁 7시 무렵이면 서울시내 각 기업체·관공서·정당·언론사 등에는 다음날 아침신문 가판신문이 도착한다. 기다리던 직원들은 익숙한 손놀림으로 자기 조직 관련기사를 자르기 시작한다. 저녁 8시 무렵이면 다음날 아침신문 가운데 해당 기업체나 관공서 관련기사 스크랩을 만들어 최고책임자에게 보고한다.는 용어보다는 가판이라는 용어가 일반적으로 사용되고 있다. 관공서와 기업체 홍보실에서 초판신문을 검토하고 보고하는 업무관행을 ‘가판근무’로 부른다.

최근 한국언론학회보 겨울호에 실린 ‘가판근무 게이트키핑 유형과 이에 대한 언론홍보 실무자들의 평가’라는 이종혁 미 아이오와대 저널리즘스쿨 객원 연구원의

논문은 가판에 대한 실증적 분석을 담고 있다. 논문은 대기업·관공서 등의 홍보 실무자들이 가판신문에 불리한 기사가 실렸을 경우 △삭제 △수정 △멘트 삽입 △오보 정정 △기사 축소 △익명 처리 △기사 교체 △제목 수정 등 8개 유형의 활동과 청탁을 펼친다고 설명했다. 이씨는 홍보 실무자들조차 가판신문에 근거한 이런 활동을 다른 홍보활동보다 비효율적·비윤리적이라고 평가했다고 말했다.

한편 한겨레신문사 등 신문사에 따라서는 현지인쇄를 할 수 없거나 멀리 떨어져 운송시간이 많이 걸리는 지역에 신문을 보낼 목적 등으로 가판을 찍기도 한다.

신문업계의 관행이던 가판에 대해 노무현 대통령은 정면으로 문제제기를 했다. 노 대통령은 2월22일 <오마이뉴스> 인터뷰에서 “옛날에는 정권에 불리한 보도가 나오면 소주파티 등 향응을 제공하며 보도를 빼달라거나 고쳐달라는 로비 방법을 썼다. 취임 후 한두달 안에 가판 구독을 전부 금지할 것이며, 정부 각 부처도 마찬가지다. (가판 보도를 보고) 비정상적으로 협상하는 것을 일체 금지하는 대신 사실과 다른 보도에 대해서는 원칙대로 정정·반론 보도를 요청할 방침”이라고 밝혔다.

이는 김대중 정권이 초기 이른바 ‘위스키와 캐시’(술과 현금) 방식을 통한 언론과의 협력관계 만들기에 나선 것과 대비된다. 박지원 전 문화관광부 장관은 집권 초기 이래 언론사의 민원을 들어주는 대가로 협조를 구하곤 했다. 언론계 안팎에서는 박 전 장관이 언론사를 방문할 때 고급양주를 들고 다닌 것을 빗대 ‘위스키와 캐시’ 방식이라고 꼬집었다. 노 대통령은 이날 인터뷰에서 “언론개혁을 하려고 (언론사에) 금융 제재나 세무조사, 뒷조사를 통한 압력을 행사하는 것은 불법일뿐더러 효과도 없다”고 전제한 뒤 “새 정부에서는 기존의 정권과 언론의 유착관계를 완전히 끊고 원칙대로 해나갈 생각”이라고 밝혔다.

딴지 거는 <조선일보>

<조선일보>는 다음날인 2월23일 ‘당선자의 부정적인 언론관’이란 사설을 통해 “가판 구독을 금지한다는 발상도 언론의 속보성과 정보성을 무시한 일방적 제동장치에 불과할 뿐이다”고 반박에 나섰다. 2월25일 ‘조선데스크’의 비판은 한층 직설적이다. “노 대통령은 언론개혁과 관련해 가시적인 조치로 정부부처 가판신문 구독 금지를 얘기했다. 이는 노 대통령의 언론에 대한 개인적 편견을 드러낸 것은 아닌가 우려된다. 가판신문은 기사 보고 빼달라는 로비를 하라고 만드는 게 아니다. 초저녁, 내일 아침 뉴스를 알고 싶어하는 독자들을 위해 만드는 것이다.”

하지만 노무현 대통령의 결심은 흔들리지 않을 것으로 보인다. 청와대는 2월26일 저녁부터 가판 구독을 중단했고, 3월1일부터 재정경제부·산업자원부·국정홍보처가 가판을 구독하지 않는 등 정부 부처들 사이에 가판 구독 중지 움직임이 넓게 퍼지고 있다.

가판 구독 중지뿐만 아니라 노무현 대통령은 취재시스템 등 언론계 관행 등을 잇달아 바꾸고 있다. 6월부터 청와대 기자실이 ‘출입기자단제’에서 ‘개방형 등록제’로 바뀐다. 지금까지 청와대 취재는 대통령 경호와 보안상의 이유를 근거로 ‘출입기자단’에 소속된 언론사 기자에 허용돼왔다. 6월부터는 청와대는 출입을 희망하는 언론사에 대해 등록신청을 받아 신원조회를 거쳐 출입증을 발급, 취재토록 하는 ‘출입기자 등록제’를 실시한다. 이 경우 청와대 취재 언론사는 현재 49개사에서 최대 133개사까지 늘어나고 인원도 현행 85명에서 두배 정도 늘어날 것으로 보인다. 청와대 기자실 개방에 대해 전국언론노조는 성명을 내어 “출입기자단 중심의 폐쇄형 구조에서 국내외 모든 온라인·오프라인 매체에 취재가 허용되는 개방형으로 바뀐다는 점은 21세기 뉴미디어시대에 걸맞은 의미 있는 진전으로 환영한다”고 밝혔다.

2월28일 청와대는 기자실 개방 방침에 따라 출입 언론사가 크게 늘어나 종래의 언론사별 인터뷰를 지속하기 어렵다고 보고 각 언론사의 창간기념 인터뷰를 원칙적으로 폐지키로 했다고 밝혔다. 청와대 관계자는 “언론사 기념행사 참석 여부는 사안마다 대통령이 직접 판단해 결정할 것”이라고 말했다. 널리 알려진 것처럼 노 대통령은 <조선일보>의 취재에 응하지 않겠다고 여러 차례 공언했다. 공교롭게도 3월5일이 <조선일보> 창간기념일이다.

시민단체 대체로 반색

한편 노 대통령이 당선 이후 국내 언론과 당선자의 집무실에서 직접 만나 정식 인터뷰를 한 언론사가 2월22일 인터넷언론 <오마이뉴스>가 처음이었다. 노 대통령은 취임 3일 전 <오마이뉴스> 창간 3주년을 맞아 인터뷰를 했다. 언론계 안팎에서는 <오마이뉴스> 창간 인터뷰를 한 노 대통령이 취임 뒤 <조선일보> 창간기념일을 닷새 앞두고 언론사 창간기념 인터뷰를 ‘원칙적으로’ 폐지한 배경에 주목하고 있다.

노무현 대통령은 2월27일 오후 청와대에서 기자회견을 열어 신임장관 인선 과정을 국민에게 직접 밝히며 인선 배경과 원칙, 어려웠던 점 등을 상세히 설명했다. 이날 노 대통령은 역대 다른 대통령처럼 근엄한 표정에 무미건조한 이야기가 아니라 감성적 호소와 솔직한 심경 토로 등 파격적 방식으로 기자회견을 했다. 청와대는 노 대통령이 언론사 창간 인터뷰를 없앤 대신 앞으로 국민적 관심사나 자신의 직접적인 사실관계 확인이 필요한 사항 등에 대해 시간이 허용하는 대로 직접 언론과 국민에게 브리핑을 하겠다고 밝혔다. 직접 국민을 상대하겠다는 뜻으로 보인다.

노무현 대통령이 언론계의 취재 시스템, 관행 등 언론환경을 바꿔나가는 것에 대한 평가가 미묘하게 엇갈린다. 언론계와 시민단체 한쪽에서는 김대중 정권의 실책을 되풀이하지 말고 정권 초기부터 언론정책의 틀이나 정기간행물법 등과 같이 법과 제도를 중심으로 구체적인 언론개혁 프로그램을 마련해야 한다고 주문한다.

하지만 그동안 언론개혁을 주장해온 시민단체들은 대체로 노무현 대통령의 권언 유착을 끊겠다는 의지와 기자실 문제 등 언론환경 개선 움직임을 반기고 있다.

최민희 민주언론운동시민연합 사무총장은 “노 대통령이 늘 밝혀온 권언 유착을 끊겠다는 것에 주목한다. 정기간행물법 개정은 대통령의 의지나 지시로 되는 게 아니다. 시민단체·학계·언론계 등이 토론 과정과 사회의제화를 거쳐 왜 정간법이 개정되어야 하고 소유지분 30% 제한이 왜 필요한지 꾸준히 설득해야 한다”고 말했다. 주동황 광운대 신방과 교수도 “좀더 두고 봐야겠지만 외형적 치중보다는 내용적 면에 치중하며 언론계 취재 관행과 언론환경을 바꿔나가는 것도 좋은 방법이다”고 평가했다.

권혁철 기자 nura@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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