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무현 당선자의 ‘감축 가능성 및 대비책’언급에 정치권 논란… 냉정하게 득실 따져볼 때
어린 넋을 위로하는 촛불행렬은 해가 바뀌어도 그칠 줄 모른다. 한-미 동맹 50주년의 해를 맞아 ‘새로운 동반자 관계’를 모색해야 한다는 자성의 목소리가 높아지고 있다. 그럼에도 주한미군의 지위와 역할에 대해 근본적 물음을 던지는 것은 아직도 우리 사회의 성역으로 남아 있다. 마치 열어서는 안 되는 신화 속 ‘판도라의 상자’처럼 미군 감축이나 철수를 입에 올리는 것은 여전히 금기로 치부된다.
발끈한 한나라당
사진/ 효순이·미선이를 추모하는 서울 세종로의 촛불행렬. 정치권에서는 주한미군을 둘러싸고 논란이 치열하다. (김종수 기자)
새해 벽두부터 정치권을 중심으로 주한미군을 둘러싼 논란이 치열하다. 노무현 대통령 당선자가 지난해 12월30일 육·해·공 3군 참모총장에게서 합동 업무보고를 받는 자리에서 ‘주한미군 감축 가능성 및 대비책’을 언급한 것이 발단이 됐다. 노 당선자는 이날 충남 논산 계룡대 3군본부를 방문해 “주한미군 감축 전력을 한국군이 어떻게 보강할 것인지, 장기적 대비책을 마련해놓았는지 들은 바 없어 묻고 싶다”고 말했다. 노 당선자는 “주한미군에 대해 미국이 스스로 감축한다는 전략을 세운 적이 있으며, 국방전략에 따라 감축얘기가 나왔다가 중단되기도 했다. 그런데 최근 주한미군 감축 얘기가 다시 나온다. 군은 변화된 상황에 대처할 수 있도록 5년 또는 10년, 20년 계획을 세워 대비하도록 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발언내용이 알려지자 한나라당은 강력히 반발하고 나섰다. 서청원 대표최고위원은 12월31일 주요 당직자 회의에서 “노 당선자는 누구에게 무슨 얘기를 들어서 (미군) 감축을 기정사실화했는지를 밝히라”고 요구했다. 서 대표는 또 “미군 철수를 기정사실화할 것이 아니라 철수가 안 되도록 모든 힘을 기울여야 한다. 미군이 철수하면 한반도에 어떤 영향을 미치는가는 삼척동자도 다 안다. 국내에 파급되는 경제·사회적 혼란을 누가 책임지겠느냐”고 질타했다.
몇몇 언론도 발빠르게 움직였다. “주한미군이 갑자기 철수하거나 감축하면 한국의 안보는 물론 경제 측면에서도 기업활동·증시·무역·재정 등 각 분야에 치명적 악영향을 끼칠 가능성이 높다”는 우려가 쏟아졌다. 현행 한-미 합동방위체계에서 미군이 차지하는 비중을 감안할 때, 미군 철수에 따른 공백을 메우기 위해서는 140억~259억달러(약 17조~31조원)에 이르는 천문학적 비용이 들 것이라는 추정치도 나왔다.
논란이 커지자 노 당선자는 기자간담회를 통해 “이런 중요한 문제에 대해 국가적 대응 프로그램이나 선택 가능한 여러 시나리오가 잘 준비돼 있지 않다는 생각이 들었다. 지금까지 여러 번 주한미군 감축 얘기가 있었으나, 대체로 한국의 의사가 아니라 미국의 국방전략 변화에 따라 감축됐다. 미국이 또 그런 결정을 했을 때 무기·병력 체계, 작전지휘권 등에 대해 국민이 믿고 안도할 수 있는 대응 프로그램이 준비돼 있어야 한다”고 밝혔다.
노 당선자의 지적대로 주한미군은 그동안 여러 번 철수와 감축을 되풀이해왔다. 해방과 함께 우리 땅에 진주한 미군은 한반도를 미국의 방위선에서 제외하기로 한 이른바 ‘애치슨 선언’에 따라 1949년 6월 철수했다. 그러나 이듬해 한국전쟁이 터지면서 미군은 유엔군의 이름으로 다시 한반도에 발을 디뎠다. 반세기를 이어온 불평등한 한-미 동맹의 시작이다.
80년 후반에도 미국서 심도있게 논의
사진/ 한미합동군사훈련. 주한미군의 지위와 역할에 대해 근본적 물음을 던지는 것은 아직도 우리사회의 성역으로 남아 있다. (한겨레 이정용 기자)
전쟁이 끝난 뒤 다시 주한미군 철수 움직임이 나온 것은 1969년이다. 그해 7월 베트남전 패배에 자극을 받은 미 정부는 무력분쟁시 미국의 직접개입 범위를 줄이는 대신 당사국의 방위역할을 강조한 이른바 ‘닉슨 독트린’을 내놨다. 이에 따라 1971년 3월부터 주한미군 6만1천여명 가운데 약 2만명이 한반도를 떠났다. 박정희 정권이 ‘자주국방’을 부르짖기 시작한 것도 이 무렵이다.
1977년 1월 집권한 카터 행정부는 미 지상군 철수계획을 세워 실행에 옮겼다. 당시 카터 행정부는 4년 동안 3단계에 걸쳐 1982년 중반까지 병력 철수를 마무리할 계획이었다. 그러나 한국 정부는 물론 미 군부와 공화당의 강력한 반대로 철군계획은 사실상 철회됐고, 결국 카터 대통령 재임기간에 실제로 철수한 미군은 3천여명에 그쳤다.
1980년대 후반에도 미군 철수 문제가 워싱턴 정가에서 심도 있게 논의됐다. 탈냉전에 따라 동북아 안보환경이 급변한데다, 미국의 무역·재정 적자가 심화하면서 주한미군 감축과 역할 조정, 방위비 분담문제가 제기된 것이다. 이에 따라 1989년 8월 미 상원은 이른바 ‘넌 워너 수정안’을 채택하기에 이른다. 이는 1989년 4월 미 국방부가 의회에 제출한 ‘아시아·태평양 지역에 대한 전략구조: 21세기를 향해’라는 보고서에서 밝힌 3단계 방안을 뼈대로 하고 있다.
먼저 제1단계(1990~92)로 1993년까지 주한 미 공군 2천명과 지상군 비전투요원 5천명을 포함해 모두 7천명을 감축하도록 했다. 또 제2단계(1993~95)에서는 미 제2사단의 2개 여단과 제7공군 1개 전투비행단 규모로 재편하며, 1994년 말까지 평시 작전통제권을 한국군에 반환하기로 했다. 마지막으로 제3단계(1996~2000)에서는 한국이 자국의 방위를 주도적으로 담당하고, 주한미군은 전쟁 억지력을 유지하기 위한 최소규모만을 남기고 모두 철수한다는 방침이었다. 이 단계에서 미국은 전시 작전통제권을 한국군에 반환하고 한·미 간에 병렬적 군사지휘체제를 발전시키며 용산기지도 이전하는 계획이 제시됐다. 그러나 3단계 감축안은 제1단계에 따라 7천명의 주한미군만 감축된 채 북한 핵문제를 계기로 전면 중단됐다. 감축안이 그대로 실행에 옮겨졌다면, 현재 한반도에는 극소수의 ‘상징적인’ 주한미군 전력만 남아 있을 가능성이 높다.
미국의 이해에 따라 춤춰온 사안
이처럼 주한미군 감축이나 철수는 우리 사회 내부의 뜻과 상관없이 미국의 전략적 이해판단에 따라 이뤄져왔다. 언제든 자국의 이익을 위해 필요하다고 판단하면, 주한미군은 우리 땅을 떠날 수 있는 것이다. 지금까지 그래온 것처럼 주한미군 감축 시기와 규모는 우리의 상상을 초월할 만큼 빠르고 클 수 있다. 미국의 대표적 보수논객 윌리엄 새파이어가 지난해 12월26일치 <뉴욕타임스>에 쓴 칼럼은 이런 현실을 극명히 보여준다. “주한미군 덕분에 지난 반세기 동안 자유를 누려온 한국의 유권자들이 이번 대통령 선거에서 클린턴 행정부 때 무익한 대북정책을 답습하려는 지도자를 선택했다. 미국은 제국주의 국가가 아니므로 미국을 원하지 않기로 결정한 나라에 미군을 주둔할 필요가 없다. 미군 철수로 휴전선 부근에 전방배치된 미 지상군이 북한의 대규모 보복공격의 인질이 되지 않게 되면, 북한의 위험한 핵시설을 무력화하기 위한 미국의 행동반경이 더 넓어질 것이다.”
평화네트워크 정욱식 대표는 “한-미 동맹은 남북의 적대적 대결구도와 분단, 한국전쟁과 떼놓고 생각할 수 없는 쌍둥이와 같다. 동맹의 탄생배경이 그렇다면, 구조적인 문제를 풀어가는 과정에서 반드시 짚고 넘어가야 할 과제다. 주한미군의 득과 실을 냉정하게 따져봐야지 주한미군의 주둔이 목적이 될 수는 없다”고 지적했다. 미군의 주둔을 통해서든 철수를 통해서든, 한반도의 평화와 안정이라는 상위가치를 얻어내는 것이 더 중요하다는 것이다. 남-북 관계 개선과 급변하는 동북아 안보환경에 발맞춰 주한미군의 역할과 지위에 대한 본격적 논의를 시작해야 하는 까닭이 여기에 있다.
정인환 기자 inhwan@hani.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