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슈추적 ] 2002년10월31일 제432호 

이익치 '꼼수' 정몽준 '혼쭐'?

현대전자 주가조작 정몽준 개입설 폭로 파장… 치밀하게 계산된 발언의 후폭풍이 몰아친다


사진/ 이익치 전 현대증권 회장의 폭탄 발언이 정치권을 뒤흔들고 있다. 이 전 회장은 현대그룹의 핵심 인물로 현대전자 주가조작 혐의로 지난 99년 9월에 구속됐다. (한겨레 강창광 기자)


DJ정부 들어 누구보다 많은 사건과 뉴스를 몰고다니는 인물을 들라면 단연 이익치 전 현대증권 회장을 꼽을 수 있을 것이다. 그는 정주영 전 현대 명예회장의 최측근으로서 외환위기 이후인 지난 99년 ‘바이코리아펀드’를 만들어 주식열풍을 일으켰으며, 현대의 대북사업에서 핵심적인 역할을 수행해온 장본인이다. 그는 또 현대전자(현재 하이닉스) 주가조작과 정몽구·정몽헌 회장 사이 왕자의 난 등 현대가(家) 내부의 숱한 분쟁에 깊숙이 개입해온 인물이기도 하다. 물론 현대의 사세가 하락일로를 걸으면서 그도 현대를 떠나 이젠 야인의 몸으로 해외에 체류한 지 벌써 2년이 다가오고 있다.

이처럼 국민의 뇌리에서 잊혀가던 그가 대통령 선거를 앞두고 대선 구도를 바꿀 수 있는 폭풍의 핵으로 떠올랐다. 정몽준 의원이 98년 현대전자 주가조작 사건에 연루됐을 것이란 가능성을 강력하게 내비치고 나선 것이다. 사실 여부와 상관없이 그의 말은 이미 정치권의 뜨거운 현안으로 떠올랐다. 특히 그가 수십년 동안 정주영 전 현대 명예회장의 측근으로 활동해왔다는 점에서 그의 발언은 정 후보에게 치명적인 타격을 줄 수도 있을 것으로 보인다.

“주가조작의 몸통은 따로 있다”

이익치 전 회장은 10월27일 도쿄에서 기자회견을 갖고 “지난 98~99년 현대전자 주가조작 사건의 책임을 모두 나에게 떠넘기는데 정 후보는 솔직해질 필요가 있다”며 “(현대중공업의) 인사와 자금은 100% 정 후보가 결재권을 갖고 있었기 때문에 (주가조작에 사용된 현대중공업 자금 1800억원도) 정 후보가 아니면 핸들링할 사람이 없다”고 말했다. 이어 “현대전자 주가조작 사건으로 검찰로 불려가는 날 아침 정주영 전 현대 명예회장이 ‘몽준이에게 별일이 없도록 해달라’고 당부했다”고 덧붙였다.

이 전 회장은 정몽준 의원이 사건에 직접 개입했다고는 말하지는 않았지만 사실상 정 후보가 이를 알고 있었으며, 책임이 있다고 주장했다. 물론 정 후보는 “언급할 가치도 없다”며 이를 일축했다. 당시 그룹 차원에서 진행된 일이었기 때문에 자신이 전혀 관여할 수 없는 사안이었다는 것이다. 현재로서는 양쪽의 주장이 팽팽히 맞서 있는 셈이다.

현대전자 주가조작은 지난 98년 5~11월 현대가 현대중공업 자금 1882억원과 현대상선 자금 250억원을 동원해 주가를 1만4800원에서 3만2천원까지 끌어올린 사건이다. 이 과정에서 현대중공업은 모두 1900여회에 걸쳐 높은 가격에 주문을 내 주가를 끌어올린 것으로 검찰조사 결과 밝혀졌다. 그리고 이에 대한 사법처리는 지난 99년 말 현대중공업 부사장을 동원한 이익치 전 회장의 단독범행으로 결론이 난 상태다. 검찰은 당시 정몽헌·정몽준 형제 등 오너들의 개입 여부에 대해 면죄부를 줬으며, 이들을 기소조차 하지 않았다.

그러나 기업의 관행으로 볼 때 그렇게 많은 돈이 오가면서 사실상 오너였던 정 후보에게 보고되지 않고 주가조작이 이뤄진다는 것은 있을 수 없다는 것이 재계 관계자들의 평가다. 따라서 당시에도 정 후보의 관련설이 여러 차례 제기됐다. 중요한 것은 현대의 핵심 인물이었던 이 전 회장이 직접 그러한 주장을 제기했으며, 물증을 제시할 수도 있다는 암시를 했다는 사실이다. 만약 조금 더 구체적인 정황이나 물증이 제시된다면 정 후보 진영은 큰 혼란에 휩싸일 수밖에 없다. 정 후보 진영이 조기진화에 나서는 것도 이런 이유 때문이다.

배상 피하려 차기 정권에 ‘보험’설도


사진/ "주가조작 드러나면 대선출마 않겠다." 정몽준 의원은 이 전 회장의 발언 관련 기자회견을 갖고 국정조사와 특검제 실시를 제안했다. (한겨레 이종근 기자)


사실 정치권과 현대 안팎에서는 정 후보의 관련설은 진상을 밝히기 어려운 사안으로 보고 있다. 어차피 재수사를 할 수도 없고, 또 수사를 한다 해도 결론이 날 수 없는 사안이라는 것이다. 중요한 것은 이 전 회장이 대선을 앞둔 미묘한 시기에 왜 그런 폭탄 발언을 했느냐 하는 것과 그 발언이 미칠 정치적 파장이다.

그렇다면 이 전 회장은 왜 그런 돌출 발언을 했을까 쉽게 추측할 수 있는 것은 대선을 앞둔 정치적인 상황이다. 정 후보쪽은 이 전 회장의 발언에 대해 노골적으로 한나라당을 배후로 지목하고 있다. 한나라당이 여러 차례 비슷한 주장을 제기해왔으며, 이 전 회장과 이회창 한나라당 후보의 동생 이회성씨가 경기고 동기동창이란 사실을 들어 양쪽의 사전조율 가능성을 제기하는 방식으로 역공을 하고 있다.

그러나 이런 정황만으로 그의 의도를 설명하기엔 부족하다. 중요한 것은 현대증권 회장으로 있으면서 관련됐던 수많은 분쟁과 사건에서 그가 아직 헤어나고 있지 못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일단 현대전자 주가조작 사건과 관련해 참여연대가 소액주주들을 대표해 제기한 손해배상청구소송 항소심이 진행 중이다.

그뿐 아니다. 현대전자와 현대중공업의 지급보증 분쟁에서도 그는 어려운 입장에 처해 있다. 현대전자는 지난 97년 캐나다 CIBC은행으로부터 2400여억원의 외자를 유치하면서 현대중공업으로 하여금 지급보증을 서게 했다. 외자유치를 주선한 현대증권의 이익치 전 회장은 대신 현대중공업에 아무런 피해가 가지 않도록 하겠다는 각서를 써줬다. 그러나 현대중공업은 CIBC가 3년 뒤 투자자금을 회수해감으로써 그 돈을 자신이 지불하게 되자 현대전자, 현대증권, 이익치 전 회장을 상대로 소송을 제기했다. 2002년 1월 서울지법 1심 판결은 “현대전자·현대증권·이익치 3자가 원고인 현대중공업쪽에 1718억원을 배상하라”는 것이었다. 이 전 회장은 특히 어려운 처지다. 법원이 그가 써준 각서에 대해 “이사회 결의를 거치지 않은 불법행위”라고 판결했기 때문에 수백억원의 돈을 개인적으로 배상해야 할지도 모르는 상황이다.

더구나 최근에는 현대상선의 4천억원 대북지원설과 관련해 이 전 회장의 개입 가능성까지 거론되고 있다. 실제로 그는 현대의 대북사업에도 깊숙이 개입했다. 현대전자 주가조작 사건으로 구속됐다 풀려난 뒤에도 북한을 오가며 금강산 사업에 핵심적인 역할을 한 것이다. 대선 이후 정권이 한나라당에 넘어갈 경우 그는 누구보다 먼저 청문회에 서게 될 1순위 후보자인 셈이다. 이익치 전 회장은 이미 재계에서 물러나 야인이 된 몸이지만 그가 현대증권 회장으로 있으면서 벌려놓은 각종 사안에 대한 분쟁은 아직도 그에게 족쇄를 물리고 있다.

그런 배경을 감안할 때 이 전 회장의 발언은 돌출발언이라기보다는 치밀하게 계산된 정치적 발언일 가능성이 높다. 특히 미국에 머물던 그가 한국의 바로 코앞인 일본까지 와서 기자회견을 자청한 것은 단순하게 보아 넘길 사안이 아니다. 일단 앞으로 그에게 다가올 정치·경제적 곤경을 탈피하기 위해 대선을 앞둔 현재 시점을 모종의 거래를 위한 적기로 판단했을 것이란 추측이 가능하다. 물론 그가 생각하는 거래의 대상이 정 의원쪽인지, 아니면 한나라당쪽인지는 알 수 없다.

정치적 계산의 노림수는 과연 무엇일까

이익치 전 회장은 현대그룹에서도 핵심 중 핵심이었다. 그는 정주영 전 명예회장이 생전에 출근해서 가장 먼저 만나는 사람 가운데 한명이었다. 현대 관계자는 “정 전 명예회장이 새벽에 출근하면 이 전 회장이 대기하고 있다가 바로 뒤따라 들어갔다. 그리고 몇분 뒤에 두 사람이 크게 웃는 소리가 바깥에 들리곤 했다”며 “이 전 회장은 하루도 빠짐없이 정 전 명예회장을 이런 식으로 독대했다”고 말했다. 그러나 그는 지난해 초 정 전 명예회장이 숨진 뒤 현대쪽으로부터 홀대를 받아왔다. 그는 당시 정 명예회장의 빈소를 찾았다가 정몽준 의원으로부터 모욕적인 대우를 받은 것으로 알려졌다.

DJ정권 출범 이후 이 전 회장은 현대그룹의 모든 사안에 깊이 개입해왔다. 그리고 현대는 DJ정권과 상당한 밀월관계를 유지해왔다. 따라서 그가 이번처럼 폭로에 나설 경우 경제계는 물론 정치권에도 엄청난 폭풍이 불어닥치지 않을 수 없는 상황이다. 이번 발언은 현대전자 주가조작 사건에 관한 것이지만 다음 발언은 또 무엇이 될지 알 수 없다. 그런 점에서 이번 발언은 “내가 입을 열면 많은 사람이 다친다”는 하나의 경고일 수도 있다.

정남기 기자 jnamki@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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