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슈추적 ] 2002년09월18일 제427호 

“진심으로 1천만원 털렸습니다”

금고 도난 뒤 벙어리 냉가슴… 한나라당 이재오 의원과 ‘도둑’의 기연


사진/ 은평경찰서 수사계 사무실에 놓인 이재오 의원의 안방 장롱 철제 금고. 경찰은 금고를 뜯은 솜씨가 프로수준이라고 보고 있다.


대도. 현대 한국사회가 낳은 이 시대적 반영웅상은 다분히 활극적인 이미지로 포장된다. 가장 최근에는 김강룡이 비슷했고, 직전에는 신창원이 근접했으며, 조세형은 이미 오래전 확고한 반열에 올랐다. 대개 대도는 도둑질을 하면서도 나름대로 의협심을 과시하는 전형적 인물로 그려진다. 그러나 아무리 뛰어난 도둑도 대도 대접을 받으려면 혼자 잘난 체해서는 어림없다. 피해자의 협조가 반드시 필요한 것이다. 도둑맞은 사람들이 피해 사실을 애써 감추거나 축소할 때야 비로소 대도로서의 요건은 완성된다.

처음엔 4천만원에 미화 2천달러 신고


사진/ 정형근·김문수 의원과 함께 한나라당 기자회견에 선 이재오 의원. 그는 대한민국 정치인 가운데 가장 극적으로 변신에 성공한 인물로 꼽힌다.


지난 9월7일 한나라당 이재오 의원의 서울 은평구 구산동 자택에 도둑이 들었다. 얼마 전까지 다수당 원내총무를 지낸데다 홍준표·정형근·김문수 의원 등과 함께 대표적인 대여 강경파로 분류되는 유명 정치인의 집을 누군가 겁 없이 털어간 것이다. 도둑은 토요일 오후 집이 빈 틈을 타 안방 장롱 속에 든 철제 금고를 뜯어 ‘무언가’를 훔쳐갔다. 안방 장롱만을 뒤진 것으로 보아 금고 위치를 미리 알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경찰은 금고를 뜯은 솜씨가 프로 수준이라 본다. 적어도 좀도둑은 아닌 셈이다.

세간의 관심은 한건의 도난사건이 아니라 그 도둑이 대도로서의 ‘떡잎’을 갖췄는가에 쏠렸다. 하지만 유감스럽게도 도둑의 행방은 오리무중이다. 경찰은 동일수법 전과자 등을 대상으로 수사를 벌이지만, 아직 이렇다 할 성과를 거두지 못한 상태다. 그렇다고 세간의 궁금증이 곧바로 수그러들 것 같지는 않다. 확인되지 않은 게 도둑의 행방만은 아니기 때문이다. 이 의원 집의 피해물품과 피해규모를 두고 설왕설래는 계속되고 있다. 따라서 대도 출현에 거는 세간의 기대도 여전히 잠재해 있다.

현재 경찰의 피해물품 수사대상은 ‘현금 1천만원’이다. 피해자의 ‘공식’ 신고액이다. 그러나 9월7일 밤 피해자쪽에서 처음 경찰에 도난신고했을 때에는 현금 3천만∼4천만원에 미화 2천달러였다. 다음날 아침 파출소에 찾아가 피해액을 ‘현금 1천만원뿐’으로 바로잡은 사람은 이 의원이다. 이 의원은 왜 현금 4천만원에 미화 2천달러가 1천만원인지, 아니 왜 현금 1천만원이 현금 4천만원과 미화 2천달러로 부풀려졌는지를 기자에게 소상하게 설명했다.

“3,4천만원을 신고한 적이 없다. 도둑 맞고 경황이 없는 상태에서 오간 말이 와전됐을 뿐이다. 결혼을 두달 앞둔 큰딸 결혼비용 문제를 두고 며칠 전 아내와 의논하면서 그 정도 돈이 들지 않겠느냐고 했는데, 도둑이 들었다기에 아내가 이미 결혼자금을 구해놓은 줄 알았다. 그래서 집에 온 경찰에 삼, 사천만원 얘기가 들어간 것 같다. 그런데 알고 보니 잃어버린 돈은 며칠 전 둘째딸이 직장을 그만두면서 받은 퇴직금을 언니 결혼비용에 보태라고 맡겨놓은 것이었다. 그게 1천만원쯤 된다.”

‘김강룡 대도’ 만들기에 앞장섰는데…


사진/ 금고가 털린 서울 은평구 구산동 이 의원의 자택. 피해규모를 두고 설왕설래가 계속되고 있다.


이 의원은 미화 2천달러에 대해서도 “16대 들어 외국에 한번도 나갔다 오지 않았기 때문에 15대 때 쓰고 남은 달러가 금고 안에 있는 줄 알았는데, 알고 보니 둘째딸이 두 차례 외국 출장을 다녀오면서 그 돈을 다 썼다고 하더라”고 밝혔다. 이 의원은 “나는 재야활동 하면서 수없이 감옥에 다녀온 사람이다. 상황이 불리하다고 해서 사실을 왜곡하거나 거짓말하는 사람이 아니다”라고 덧붙였다.

그의 말대로라면 이 사건의 범인은 대도와 거리가 멀다. 검소한 재야 출신 정치인 집안을 턴 파렴치범일 뿐이다. 그러나 도둑맞은 사람이 오히려 곤욕을 치르는 낯익은 패턴은 이번에도 잦아들지 않는다. “3, 4천만원을 처음 얘기한 사람은 이 의원이 아니라 처음 사건을 신고한 큰딸이다”라거나 “이 의원이 ‘1천만원으로 해달라’고 했다”는 얘기가 경찰 안팎에서 숨죽여 돌기도 한다. 1천만원이든 4천만원이든, 그런 돈이 왜 현금으로 집안 금고에 들어 있었을까 하는 의문도 풀리지 않는다.

이 의원이 이번 사건을 계기로 ‘도둑’과 기묘한 인연을 이어가는 것도 화제가 되었다. 그와 도둑의 가장 강력한 인연은 1999년에 맺어졌다. 그해 ‘준대도’ 김강룡이 잡히자 이 의원은 가진 자들의 치부를 드러내는 유리창으로 김을 십분 활용했다. 김강룡이 검거된 뒤 유종근 전북지사와 김성훈 농림부 장관의 집에서 각각 미화 12만달러와 운보 그림 등을 털었다고 주장해 큰 사회적 파문을 일으켰다. 당시 이 의원은 인천구치소까지 김을 찾아가 만난 뒤 면담내용을 폭로하는 등 김강룡 대도 만들기에 앞장섰다.

이 사건으로 유종근 전북지사는 재판정에 증인으로 불려나가 12만달러를 도둑맞은 사실이 있는지 등을 두고 김강룡과 설전을 벌이는가 하면, 일부 의혹에 대해서는 끝까지 진술을 거부하고 버티는 등 큰 곤욕을 치렀다. 김성훈 농림부 장관은 끝내 ‘도둑맞은 혐의’를 벗었지만 한동안 여론의 따가운 눈길을 견뎌야 했다. 당시 김강룡의 입을 빌려 두 사람 공격의 최선봉에 선 이 의원이 3년 뒤 몰릴지도 모를 처지가 된 것은 우연치고는 매우 기이한 우연이다.

보수정당에서 잘 나가는 '유명 재야인사'

이 의원과 ‘도둑’의 기연은 여기에서 그치지 않는다. 이 의원은 지난 8월13일 국회 법사위원회에서 “‘도둑놈’ 말은 믿으면서 ‘도둑놈’ 말을 부인하는 대통령 후보의 말은 왜 믿지 않느냐”고 목소리를 높였다. 전과 6범인 전 의무 부사관 김대업씨의 폭로가 계속되자 이회창 후보를 방어하기 위해 김씨를 ‘도둑놈’으로 몰아붙인 것이다. 이 의원은 또 김대업씨가 얼마나 파렴치범인가를 증명하기 위해 그가 사는 대구까지 내려가 주변을 샅샅이 뒤지고 다니기도 했다.

이 의원은 대한민국 정치인 가운데 가장 극적으로 변신에 성공한 인물로 꼽힌다. 유명한 재야인사로 5차례에 걸쳐 10년 동안 감옥살이까지 한 그가 보수 정당에서도 가장 잘 나가는 인사가 된 것이다. 그는 전민련 조국통일위원장 시절인 89년 범민족대회 실무회담을 하러 판문점으로 가다 구속까지 됐으나, 2001년에는 8·15방북단 파문 직후 이 책임을 물어 임동원 당시 통일부 장관 해임건의안 처리를 주도했다. 86년 유성환 통일국시 발언초고를 쓴 그는, 이제 정치적 라이벌에게 거침없이 색깔공세를 퍼붓는다.

이 의원의 태도 변화는 이어진다. 97년 이회창 후보 아들들의 병역비리 의혹을 문제삼으며 대선 후보 재검토를 강하게 주장한 그는 지금 ‘김대업정치공작진상조사단’을 이끌고 있다. 이 의원은 “5년 전에는 문제가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그렇게 한 것이었고, 이제는 모든 것이 검증되었다고 판단하기 때문에 입장을 바꾼 것”이라고 말했다.

대도를 바라보는 세상 사람들의 태도는 ‘흉포하고 영악한 범죄자’와 ‘카타르시스를 안겨주는 자기 동일시의 대상’으로 크게 나뉜다. 그리고 사람들의 시각은 대개 자신이 놓인 위치에 따라 갈린다. 도둑은 이재오 의원에게 어떤 존재일까.

안영춘 기자 jona@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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