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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의의 ‘타임머신’을 만들자 시간 흐르면 면죄부 받는 반인권 국가범죄… 의원들이 ‘공소시효 배제법안’입법에 나섰다
“공소권 없음, 약오르지롱!”
73년 10월19일. 서울대 법대 최종길 교수는 중앙정보부 건물 앞에서 의문의 변사체로 발견됐다. 중정은 “간첩으로 조사받다 7층 화장실 창문으로 투신자살했다”고 발표했다. 몸 여기저기 남아 있는 고문 흔적들은 은폐됐다. 사망 뒤 발표된 ‘유럽 거점 대규모 간첩단’에 버젓이 그의 이름까지 올렸다. 그 뒤 강산이 세번이나 변했다. 2002년 5월27일, 의문사진상규명위원회는 “최종길 교수가 중정에 의해 고문·살해됐다”고 발표했다. 그것으로 끝이다. 고문·은폐·조작에 가담한 수사관들은 지금도 버젓이 거리를 활보한다. 유족은 처벌을 바라지만 역시 공소시효가 지났기 때문이다. 84년 10월14일 청송교도소에서 교도관들의 집단폭행으로 죽은 뒤 지난 16년 동안 ‘심장마비 사망자’로 둔갑한 박영두, 술에 취한 상관이 쏜 총에 맞아 죽은 뒤 자살자로 처리된 허원근 일병, 80년 삼청교육대에 끌려가 죽은 449명…. 모두 비슷한 처지다. 국민의 인권을 보호하는 법이 오히려 반인권 범죄의 방패막이가 되고, 면죄부를 주는 부조리한 현실. ‘법적 안정성’을 지킨다는 명분 아래 도입된 공소시효의 이름으로 용서되고 합리화된다.유족들은 단죄를 바란다. 하지만 공소시효를 규정한 형사소송법이 딱 버티고 있다. 최근 몇몇 국회의원들이 법과 정의가 충돌하는 부조리를 타파하겠다고 나섰다. 국가기관이 저지른 반인권 범죄에 대해 공소시효를 배제하는 법안을 만들자는 것이다. 지난 8월26일 한나라당 김원웅·서상섭 의원, 민주당 이미경 의원 등 여야 의원 21명은 ‘중대한 인권침해 행위에 대한 공소시효 부적용 촉구 건의안’을 국회에 제출했다. △정부는 중대한 인권침해 범죄에 대해 공소시효를 배제하는 법적·제도적 장치를 정비하고 △공소시효 조항이 인권침해 행위자에게 면죄부를 주는 것을 막기 위한 입법조처를 취하라는 것이다. 김원웅 의원은 “허 일병이나 수지 김 사건처럼 국가권력이 조직적으로 개입해 은폐·조작한 사실이 명백해진 반인권 범죄까지 공소시효를 적용해 용서하면 진정한 법적 정의를 세울 수 없다. 일본의 정신대나 미군의 노근리 학살에 대한 진상 규명과 책임자 처벌을 제대로 요구하기 위해서도 법을 고쳐야 한다”고 말했다. 우리 안의 모순은 물론 국제사회를 상대로 요구해온 정의를 관철하기 위해서도 국내 법률을 시급히 정비해야 한다는 것이다.
국회가 침묵을 깨기까지
건의안은 8월29일 국회 법사위에 회부돼 정식 심의를 기다리고 있다. 국회 통과 여부는 불투명하다. 헌법이 규정한 형벌불소급 원칙(헌법 제 13조 1,2항)과 형사소송법의 공소시효 조항(형법 326조 3호)에 어긋난다는 논란이 촉발될 가능성이 높다. 하지만 입법권자인 국회의원들이 공소시효 배제를 공개 건의하고 나선 것 자체가 적잖은 의미가 있다. 시민·사회단체와 피해유족들은 지난 3월부터 반인권 범죄에 대한 공소시효 부적용을 외쳤고, 범국민 서명운동과 규탄집회도 잇따랐다. 참여연대, 민간인학살진상규명위원회, 김옥분·최종길·박영두씨 유족 등은 지난 5월21일 ‘반인도범죄 등의 시효 등에 관한 특례법’을 국회에 청원하기도 했다. 국가기관이 반인도적 범죄의 실체를 조작·은폐하기 위해 직무유기·직권남용·범인은닉·증거인멸 등을 행할 경우 그 사실이 드러날 때까지 범죄에 대한 공소시효를 정지하자는 게 핵심 내용이다. 하지만 국회는 침묵했다. 청원 직후인 5월24일 한나라당 이주영 의원이 요구를 일부 수용한 ‘형사소송법 개정안’을 냈을 뿐이다. △내란 및 외환의 죄 △국가기관이 직무를 행함에 있어 형사피의자 또는 기타 사람을 폭행해 상해·사망케 한 행위 등은 공소시효를 적용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진전이었다. 하지만 이 법안은 앞으로 발생할 행위만을 적용대상으로 하고 있다. 유족들과 시민단체가 요구한 과거의 명백한 반인권 범죄에 대한 단죄는 여전히 불가능했다. 이들의 요구는 확고하다. 형법상 공소시효 제도 유지 근거는 △범행 뒤 장기간이 경과하면 증거가 사라져 진실 발견이 어렵고 △범인 스스로 형벌에 상응하는 고통을 받는다는 점 등을 고려한 것이다. 하지만 수지 김, 최종길 교수 사건 등에서 확인되듯 범죄자들은 어떤 사죄나 반성·고통이 없었다. 인권운동사랑방 상근활동가인 범용씨는 “범죄인들이 상응하는 고통을 받는 것은 고사하고, 진실이 밝혀진 뒤에도 공소시효가 지났다며 법대로 하라는 식으로 유족에게 상처를 주고 있다. 헌법이 보장한 인간의 존엄과 가치를 직접 해친 이런 범죄에 대해 시효를 적용하는 것 자체가 헌법 파괴고, 이런 범죄를 고무하는 것”이라고 말했다.
입법과정에서 논란과 충돌 불가피
논란이 어디로 흐를지 아직 예측하기 어렵다. 조용환 변호사(한국인권재단회장)는 “공소시효는 어떤 범죄행위를 처벌하느냐 마느냐는 본질적 문제가 아니다. 그저 법절차일 뿐이다. 더욱이 공소시효는 국가기관이 범죄자를 끊임없이 추적했다는 기본 전제 아래서만 성립할 수 있다. 결국 국가기관이 은폐·조작한 반인권 범죄들은 입법의지만 확고하면 얼마든지 공소시효 논란을 넘어설 수 있다. 하지만 우리는 아직 사회적·법리적 논쟁이 미흡하다. 입법과정에서 논란과 충돌도 불가피하다”고 전망했다. 국회 심의가 본격화되면, 형벌불소급 원칙을 침해하며 ‘타임머신’을 만드는 것이라는 비판론이 촉발될 수 있다. 하지만 국가기관이 저지른 반인권 범죄에 대한 면죄부 발행을 더 이상 묵인해서는 안 된다는 공감대가 계속 확산되고 있다. 민주당 함승희 의원은 “9월 정기국회에서 ‘특정범죄의 공소시효 등에 관한 특례법’을 제출해 과거의 반인권 범죄행위를 단죄토록 하겠다”고 밝혔다. 민간인 학살이나 국가기관이 고문·살해·은폐·조작한 범죄는 사건 발생 당시 공소유지 자체가 불가능했던 만큼 그 사실이 밝혀진 뒤부터 공소시효를 적용하는 법안을 내놓겠다는 것이다. 과연 국회는 반인권 범죄를 단죄할 ‘타임머신’을 만들어낼 수 있을까.
신승근 기자 skshin@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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