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슈추적 ] 2002년08월21일 제423호 

시동걸린 북한, 계속 달려라

장관급회담 등에서 전향적인 자세 보여…합의사항 이행 위해 속도 늦추지 말아야


사진/ 이번 장관급회담에서 합의된 남북관계 개선 일정표를 보면 10월19일 평양에서 열리는 8차 장관급 회담까지는 숨가쁜 교류가 이어질 것으로 보인다. (사진공동취재단)


북한이 요즘 부쩍 서두르고 있다.

6·29 서해 교전사태에 대한 유감 표명을 하고 난 뒤부터다. 남쪽을 대하는 자세가 훨씬 부드러워졌음은 물론이다. 말꼬리를 붙잡고 따지려 들지도 않는다. 소모적인 논쟁을 피하려는 자세가 확연하게 드러난다. 지난 시절 남쪽 회담 관계자들을 지치고 질리게 만들었던 ‘구태들’은 점차 꼬리를 감추고 있다. 8월14일 막을 내린 7차 남북장관급회담 때도 그랬고, 8·15 민족통일대회 때도 그랬다. 북한의 이런 유연한 태도가 일시적인 전술의 변화 때문인지, 아니면 앞으로도 죽 그렇게 나올 것인지는 분명치 않다. 분명한 것은 북한이 최근 보이는 정책 변화가 더 근본적·구체적·현실적이며 이와 함께 북한 엘리트들의 사고와 처신도 더불어 변하고 있다는 점이다. 오랫동안 이들을 상대해온 정부 관계자들조차도 북쪽의 태도변화에 입을 다물지 못할 정도다. 한 관계자는 “북쪽과의 신의상 말할 수 없는 내용들이 많다. 이런 내용들까지 다 공개하면 아마 일반인들도 크게 놀랄 것”이라고 귀띔했다.

북·일 관계 개선에도 적극적

정세현 통일부 장관은 18일 한국방송 제1텔레비전 <일요진단>에 나와 “제7차 남북장관급회담에 임하는 북쪽의 자세가 상당히 부드러웠고 언쟁을 비켜가려는 태도가 분명히 감지됐다”고 말했다. 또 “(북쪽이) 따지기 시작하면 일을 못하지 않느냐는 자세로 나와 이행 시각표를 짜는 데 도움이 됐다”는 말도 했다. 북한의 이런 태도는 8월 초 금강산에서 열렸던 남북 당국자간 실무대표접촉에서 일찌감치 감지됐다. 남북 회담에서 흔히 볼 수 있었던 회담 직전의 치열한 신경전이나 벼랑 끝 대치 없이 첫날부터 일사천리로 진행됐다는 게 회담 관계자의 전언이다. 물론 아직도 북한이 뜸을 들이고 있는 것들이 한두 가지가 있다. 남북 간의 군사적 문제와 관련해서다. 전문가들은 군사 문제는 대미 협상과도 밀접한 관계를 맺고 있기 때문에 북한 당국이 다른 의제에 견줘 신중을 기할 수밖에 없을 것이라고 평가한다.

북한은 비단 남쪽에만 미소를 보내는 것이 아니다. 지난해 12월 동중국해에서의 괴선박 침몰 사건 이후 날카로운 발톱을 내보인 채 으르렁거리며 싸웠던 일본에 대해서도 은근슬쩍 화해의 손을 내밀고 있다. 북한은 8월18일 <조선중앙방송>을 통해 8월25∼26일 평양에서 열릴 북·일 외무성 국장급 회담에 진지하고 성의 있는 노력을 기울일 것이라고 밝혔다. 방송은 “조(북)·일 사이의 적대관계가 선린우호 관계로 전환된다면 긴장된 동북아시아의 전반적 정세는 크게 완화될 것”이라고 덧붙였다. 전문가들은 회담을 앞두고 북한 당국이 이런 우호적인 자세를 미리 비치는 것은 드문 일이라고 평가했다. 북한은 일본과의 수교 예비 회담에서 괴선박 사건 이후 중단된 식량지원 재개 문제가 타결되기를 기대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진다. 일본은 2000년, 2001년에 걸쳐 50만t의 식량을 지원하는 등 최대 공여국의 자리를 지켜왔으나 괴선박 사건 이후 북한에 대한 식량지원을 일절 그만뒀다.

서해교전 이후 부담 느껴


사진/ 북한은 군사문제에 대해서는 신중한 태도를 견지하고 있다. 2000년9월 1차 남북국방장관 회담을 마친 뒤 남북 대표들이 회담장을 나서고 있다. (한겨레 장철규 기자)


그렇다면 북한은 왜 이렇게 서두르는 것일까. 정세현 장관은 “서해교전 이후 국민정서가 들끓었고, 미국이 특사 방북 일정을 취소해 국제여론도 나빠져 북한이 부담을 느꼈을 것”이라고 설명했다. 또 “최근 북한이 실시한 경제관리 개선이 성공하기 위해선 한반도 정세가 안정되고 외부 자본과 기술이 필요할 것”이라고 덧붙였다. 그의 설명은 상당 부분 설득력이 있어 보인다. 하지만 북한이 7차 장관급회담에서 약속한 사항들을 시원스럽게 다 이행할지에 대해서 부정적인 견해를 내놓는 이들이 적지 않다. 북한 내부 사정이 아무로 급박하게 돌아간다 해도 제동을 걸 수 있는 걸림돌들이 나라 안팎 곳곳에 도사리고 있다는 지적이다. 북한 소식에 정통한 한 전문가는 “이번에 서울에 내려온 북쪽 핵심 인사들은 ‘여러 가지로 잘될 것이다’ 또는 ‘걱정 마시라’고 장담을 하는데 남북관계라는 게 지금까지 그래왔듯이 지켜봐야 되는 것 아니냐”고 말했다. 북쪽뿐 아니라 남쪽 사정도 복잡하기는 마찬가지다. 북쪽은 내심 대선을 앞둔 정치권의 흐름이 한치 앞을 내다보지 못할 정도로 혼탁한데다, 임기가 불과 몇 개월 남지 않은 김대중 정권이 합의사항들을 제대로 이행할 능력이 있는지에 대해 더 우려하는 것으로 알려졌다.

김령성 장관급 회담 북쪽 단장은 평양 귀환길에 오르면서 “화합을 위한 분위기와 환경을 조성하는 게 중요하다. 과거에 좋은 합의를 하고도 이행 분위기가 안 좋아서 우여곡절을 겪는 경우가 많았다”고 말했다. 합의를 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실천을 위한 주변 환경이나 분위기 조성도 중요하다는 지적이다. 이 말은 역설적으로 주변 환경이나 분위기가 좋지 않으면 또 과거의 전철을 되풀이할 수 있다는 해석으로 받아들여진다.

일단 이번 장관급 회담에서 합의된 남북관계 개선 일정표를 보면 이변이 없는 한 10월19일 평양에서 열리는 8차 장관급 회담까지는 남북 간의 숨가쁜 교류가 이어질 것으로 보인다. 이들 일정 중 유난히 눈에 띄는 대목이 스포츠 교류다. 9월부터 시작되는 남북 축구대표팀 경기(9월6∼9일), 제14차 아시아경기대회대회 북한대표팀 참가(9월29일∼10월14일), 태권도 시범단 교환행사 등이 줄줄이 기다리고 있다. 전문가들은 스포츠 교류는 북한 당국이 큰 부담 없이 평화를 지향하는 이미지를 대외에 과시할 수 있을 뿐 아니라, 서해교전 이후 부정적인 남쪽 여론을 돌려놓는 데도 효과적이라는 판단을 하고 있는 것 같다는 분석을 내놓았다. 북한은 특히 남쪽과의 축구경기를 성공적으로 치러내는 데 주력할 것으로 예상된다. 월드컵이 가져다준 유·무형의 효과에 크게 자극을 받았다는 게 남한 정부쪽 판단이다. 북한의 리광근 축구협회장은 장관급 회담 마지막날인 14일 대한축구협회 앞으로 서한을 보내 “민족의 우수성을 세계에 알리기 위해 북과 남의 축구교류가 필요하다고 한 데 동감한다”며 “(남북 친선축구를) 다음달 6∼9일 사이 서울에서 진행하고자 한다”고 밝혔다.

“3, 4 개월이면 경의선 연결 가능”


사진/ 정부는 북쪽의 경의선 복원공사지연이 레일이나 침목 등 자재부족 때문이라면 먼저 도움을 청할 경우 300억원가량의 자재를 지원할 수 있다는 입장을 세워둔 상태다. (이정용 기자)


정부 관계자들은 8월26일부터 나흘간 서울에서 열리는 제2차 경제협력추진위원회에서 논의될 철도·도로 병행 착공 날짜와 군사실무회담 일정 등이 얼마나 구체적으로 잡히느냐가 앞으로 남북관계를 점치는 분수령이 될 것으로 예상한다. 정세현 통일부 장관은 “철도·도로 연결 문제는 비무장지대(DMZ)를 넘나드는 문제이기 때문에 군사적 신뢰구축이 필요하다”며 “대체로 경추위에서 (군사실무회담이) 매듭지어질 것”이라고 낙관적으로 내다봤다. 그는 “기술적인 검토를 끝냈고 공사를 시작하면 3, 4개월이면 경의선 연결이 가능하다”며 “중요한 것은 동해안 1.5km 7번 국도 연결인데 임시로 버스가 다닐 수 있게 해놓고 본공사는 별도로 추진하면 연내에 이어진다는 계산이 나와 있다”고 자신감을 보였다. 적어도 9월 중에 첫 삽질이 시작되면 12월 안에 경의선이 완공될 수 있다는 주장이다. 정부는 북쪽의 공사지연이 레일이나 침목 등 자재 부족 때문이라면 먼저 도움을 청할 경우 300억원가량의 자재를 지원할 수 있다는 입장을 세워둔 상태다. 현재 경의선 철도와 도로 연결을 위해 남쪽이 지난해 말 비무장지대 남쪽 공사를 마쳤으나, 북쪽은 자재 부족 등으로 군사분계선(MDL)에서 개성에 이르는 12km 구간 공사를 멈춘 상태다.

어쨌든 공은 또 한번 북쪽으로 넘어간 것으로 보인다. 북쪽이 지금까지 보여준 속도로 적극적인 자세로 나온다면 올해 안 경의선 연결도 더 이상 꿈으로만 남지는 않을 것이다. 하지만 여느 때와 달리 속도가 조금이라도 늦춰지면 남쪽의 대선 정국 소용돌이 등과 맞물려 합의된 사업들이 기약 없이 표류할 가능성도 높다는 게 전문가들의 일치된 견해다.

임을출 기자 chul@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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