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슈추적 ] 2002년07월24일 제419호 

“복지부는 내 허락을 받으라”

다국적 제약사들의 도를 넘은 오만…참조가격제 되살린 이태복 장관에 전방위 압력 가해


사진/ 다국적 제약사들은 신약특허권을 무기로 한국 제약시장의 약가정책에 개입하고 있다. 백혈병 환자들의 글리벡 약값 인하 요구시위. (박승화 기자)


글락소스미스클라인, 화이자, 엠에스디(MSD), 릴리, 쉐링, 노바티스…. 보통사람들에겐 그저 귓전을 스치는 이름들이다. 처음 들어보는 것은 아니지만, 그렇다고 딱히 떠오르는 이미지도 없다. 그러나 이들은 그리 만만한 존재가 아니다. ‘○○제약’이니 ‘××약품’이니 하는 귀에 익은 이름의 존재들보다 훨씬 힘이 세다. 대한민국의 한 전직 장관이 자신을 경질시킨 배후로 그들을 지목할 정도다. 그들은 바로 ‘다국적 제약사’들이다.

이태복 전 보건복지부 장관이 지난 7월11일 퇴임사에서 이들로부터 “다양한 통로를 통한 압력이 들어왔다”며 자신의 경질사유가 “(이들이 저항해온) 약가제도 개혁과 관련된 것으로 생각한다”고 밝혀 파문을 일으켰다. 파문이 확산되자 이번에는 이들이 정말로 대한민국 장관의 목을 치는 데 간여했는지 밝혀보겠다고 대한민국 국회가 팔을 걷어붙이고 나섰다. 보건복지위원회가 7월26일 관계자들을 불러 진상조사를 벌이기로 한 것이다.

정책결정에 외국업체가 직접 참여?

지난 7월16일 국회 보건복지위원회 소속 김홍신 의원(한나라)은 이와 관련해 미국 정부가 보건복지부와 외교통상부 등 한국 정부 쪽과 접촉한 내용을 담은 자료를 공개했다. “이 문제가 적절하게 해결되지 않으면 심각한 무역분쟁으로 발전할 수도 있다… 참조가격제 등 약가제도 변경에 대한 최종결정을 내리기 전에 미국 정부뿐 아니라 외국 제약사를 포함한 이해 당사자들과 완벽하고 실질적으로 협의하는 것이 중요하다.”(2001년 7월2일 미국 상무부 도널드 에반스 장관이 김원길 당시 보건복지부 장관에게 보낸 편지)

김 의원 쪽에 따르면 보건복지부가 참조가격제 등 약가제도 변경을 추진한 지난해 5월부터 지금까지 미국 정부로부터 모두 6차례 ‘압력’이 들어왔다. 물론 김 의원 쪽이 확인하지 못한 것도 있을 수 있다. 여기에는 상무부, 무역대표부, 주한 미국대사관, 다국적 제약협회 등이 등장했다. 또 편지, 공문, 방문, 면담, 한미 통상회의 등 온갖 수단이 동원됐다. 결국 지난해 8월1일 예정된 참조가격제 시행은 보류되었고, 김원길 당시 장관은 예정일이 한달 남짓 지나서야 “통상마찰 소지가 있어 당분간 유보한다”고 밝혔다.

보건복지부가 참조가격제를 사실상 포기한 뒤로도 미국 정부는 복지부와 외교통상부를 상대로 ‘꺼진 불도 다시 보자’는 식의 압력을 계속 행사했다. 하지만 이런 노심초사에도 불구하고, 미국의 우려는 지난 1월 말 이태복 당시 청와대 복지노동수석이 복지부 장관으로 취임하면서 현실로 나타났다. 이 전 장관은 4월10일 건강보험재정안정대책을 발표하면서, 지난해 백지화된 참조가격제를 되살려 6월부터 시범실시한다고 밝혔다.

그러자 이번에는 미국 정부가 한술 더 뜨고 나섰다. 6월11일 존 헌츠만 미 무역대표부(USTR) 부대표가 복지부 장관실을 찾아가 “약가기준 설정과 절차 수립과정뿐 아니라 결정과정에도 외국업계가 직접 참여할 수 있게 해달라”고 요구했다. 한 나라의 국가정책 수립에 외국기업이 개입하겠다는 것이었다. 이 전 장관은 “약가기준 설정과정에서 의견수렴은 하겠지만 어떤 국가도 기준을 결정할 때 해당업체가 협의과정에 참여하는 사례가 없다”며 거절했다.

약가정책을 둘러싼 한국 정부와 미국 정부의 접촉과정이 이 전 장관의 경질배경을 밝혀주지는 못한다. 한국 정부가 자국의 정책을 펴면서 미국 정부의 직·간접적인 영향을 받는다는 사실도 새삼스런 일이 아닐지 모른다. 하지만 국민의 건강권과 직결되는 한 나라의 보건정책까지 그 그늘을 벗어나지 못한다면 상황은 달라진다. 더욱이 배경에 다국적 제약사들의 ‘돈벌이’가 관련되어 있다면 심각한 일이 아닐 수 없다.

미국 정부가 다국적 제약사들을 엄호하는 까닭은 선두권을 달리는 다국적 제약사들 가운데 미국계가 가장 많기 때문이다. 특히 다국적 제약사들은 어느 다른 산업보다 높은 부가가치를 창출할 뿐만 아니라 세계 시장에 막대한 영향을 끼친다. 전 세계 제약시장은 해마다 눈부신 성장을 거듭하고 있다. 98년 3천억달러이던 시장규모가 올해에는 4천억달러, 2004년에는 5천억달러에 이를 것으로 전망된다. 이 가운데 10대 다국적 제약사의 매출액이 전 세계 의약품 시장의 40%, 50대 제약사가 90%를 독점하고 있다.

의약분업 뒤 폭발적인 성장


사진/ 자신의 경질배후에 다국적제약사들의 압력이 있다는 의혹을 제기한 이태복 전 보건복지부 장관. (한겨레 이종근 기자)


제약산업의 순이익률은 18.6%로, 지난 5년 동안 산업별 이익률 1위를 독차지했다. 제약산업이 금융산업이나 소프트웨어산업보다 수익률이 높을 수밖에 없는 배경에는 신약 특허권이라는 ‘화수분’이 자리잡고 있다. 다국적 제약사가 개발한 신약은 특허기간(20년)에 독점적 이윤을 남긴다. 대개 이들 신약의 가격은 제조원가의 수십배에 이르는 것으로 추정되지만, 원가가 공개되지 않아 제약사 외에는 정확히 추산하기가 쉽지 않다.

지난해 6월부터 국내에 들어온 글리벡 보험약가를 둘러싸고 한국 정부와 노바티스가 벌이는 줄다리기는 신약 특허권의 위력을 잘 보여준다. 노바티스는 이 약 한알의 보험약값을 2만5천원으로 요구했으나, 보건복지부는 지난해 11월 1만7862원으로 고시했다. 그러자 노바티스는 고시가를 거부하고 약가 재심을 신청해 아직까지 결론이 나지 않은 상태다. 백혈병 환자들이 집단시위를 벌였음에도 노바르티스는 눈도 깜박하지 않은 채 최근 “계속 약가 인하를 요구하면 글리벡 공급을 중단하고 철수하겠다”고 위협하기도 했다.

보건의료단체들로 구성된 ‘글리벡문제 해결과 의약품의 공공성 확대를 위한 공동대책위원회’는 글리벡 한알의 생산원가를 845원으로 추정한다. 노바르티스가 요구하는 가격의 30분의 1이다. 노바르티스는 글리벡 공대위의 계산을 “개발투자비용 전체를 고려하지 않은 주먹셈”이라고 주장하면서도 정확한 개발원가를 밝히지 않고 있다. 그러나 글리벡 공대위 관계자는 “우리가 입수한 노바르티스 본사의 경영보고서에는 ‘글리벡 발매 8개월 만에 투자비를 회수했다’는 내용이 들어 있다”고 주장했다.

다국적 제약사들은 참조가격제에 거의 신경질적인 반응을 보인다. 참조가격제란 같은 효능이 있는 여러 의약품들의 건강보험 청구상한액(참조가격)을 정해놓고, 그 기준보다 비싼 약을 처방받은 환자는 비싼 만큼을 본인이 직접 부담하는 제도다. 예를 들어 같은 효능이 있는 위장약의 참조가격이 500원인데 약값이 1천원인 제품을 처방받으면 차액 500원에 대해서는 보험 혜택이 전혀 없이 환자가 따로 부담해야 하는 것이다. 효능이 같으면 값이 싼 제품을 처방하도록 유인해 보험재정을 아끼는 효과를 기대할 수 있다.

다국적 제약사들이 이 제도를 그토록 기피하는 건 자신들의 ‘오리지널약’이 중소제약사들의 ‘카피약’보다 비싸기 때문이다. 따라서 참조가격제가 실시되면 오리지널약의 시장점유율이 지금보다 크게 떨어질 수밖에 있다. 그러나 참조가격제 때문에 다국적 제약사들의 국내 영업이 타격을 받을 가능성은 별로 없다. 다국적 제약사들은 의약분업 실시 전에도 안정적인 영업실적을 올려왔으며, 특히 의약분업 실시 뒤로 폭발적인 호황을 누려왔기 때문이다.

다국적 제약사들은 2000년 의약분업 실시 뒤부터 국내 전문약 시장을 80% 이상 휩쓸면서 해마다 수십%의 성장률을 기록했다. 지난해 전문약 시장 1, 2위를 차지한 국내 제약사는 올 1/4분기 5, 6위로 크게 밀려났다. 지난해 하반기 건강보험심사평가원(HIRA)에 전자문서 방식으로 청구된 1만5천여개 의약품 보험약제비 상위 10개 품목 가운데 8개 품목을 다국적 제약사의 고가 전문약이 차지하기도 했다.

자국 참조가격제는 인정하는 이중적 태도

고가 전문약 시장의 급팽창에는 의사들의 약처방 변화가 가장 크게 영향을 끼쳤다. 의약분업 이전에는 의사들이 높은 약가마진(약을 덤으로 더 주는 것)을 보장하는 중소제약사의 저가 카피약을 많이 처방했으나, 의약분업으로 의사가 약을 직접 취급하지 않으면서 이름이 잘 알려진 오리지널약들을 집중적으로 처방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오리지널약 처방 급증이 이름값에서만 비롯한 것은 아니다. 국내 중소제약사들이 따라올 수 없는 다국적 제약사들만의 탁월한 마케팅 기법이 있었기에 가능했다.

자금력이 풍부한 다국적 제약사들은 의약분업 시행 이후 다양한 방식의 리베이트로 약가 마진이 사라진 자리를 빠르게 메웠다. 이 가운데 가장 두드러진 것이 의사들을 공짜로 해외학회에 보내주는 방법이다. 의약분업 이후 다국적 제약사가 제공하는 의사 해외학회 참가행사가 부쩍 늘었다. 한 개원의는 “의약분업 전보다 6배 정도 늘어난 것 같다”고 말했다. 지난해에는 한 최상위급 다국적 제약사가 한꺼번에 의사 300명을 전세기에 태워 타이를 다녀오기도 했다.

다국적 제약사들의 태도는 이중적이기까지 하다. 한국보건사회연구원(KIHASA) 보건자원팀 배은영 연구원은 “다국적 제약사들의 본사가 있는 유럽의 여러 나라들에서는 이미 80년대 말부터 참조가격제를 시행하고 있으며 미국의 민간보험사들도 다양한 형태로 참조가격제와 비슷한 제도를 시행해 카피약의 시장점유율을 높이고 보험재정도 아끼고 있다. 그런 나라의 제약자본이 우리나라에서만 같은 제도의 도입을 방해하는 건 제멋대로 이중적 잣대를 들이대면서 내정을 간섭하는 것”이라고 말했다.

안영춘 기자 jona@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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