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슈추적 ] 2002년07월17일 제418호 

재벌 버릇 남 못 주지?

대통령 아들에 검은돈 건넨 현대·삼성… 전달 시점에 사정 급해 대가성 의혹



현대그룹과 삼성그룹이 김대중 대통령의 차남 홍업씨에게 거액의 검은돈을 건넨 사실이 검찰 수사결과 밝혀졌다. 2대의 정권에서 잇달아 대통령의 아들이 기업체로부터 부정한 돈을 받았다는 사실도 놀랍지만, 재계 순위 1∼2위를 다투던 대재벌들이 스스로 나서서 대통령 아들에게 뒷돈을 줬다는 사실도 충격적이다. 과거의 경험에서 아무것도 배우지 못하고 모두가 망각의 늪에 빠져 허우적거린 것이다. 하지만 아직은 밝혀진 것보다는 밝혀야 할 것들이 더 많다. 두 재벌은 왜 홍업씨에게 돈을 건넸는가? 그 돈은 어디서 나온 것이고, 돈을 건네도록 지시한 사람은 누구였는가?

대가 요구하지 않은 검은돈은 없다

검찰은 지난 7월10일 홍업씨의 공소장에서 각각 현대가 16억원, 삼성이 5억원을 홍업씨에게 건넸다고 밝혔다. 검찰은 이 돈의 대가성이 입증되지 않았다는 이유로 홍업씨에게 증여세 포탈혐의를 적용했다. 그러나 대가성이 없었다는 검찰의 결론은 잠정적인 것일 뿐이다. 홍업씨에게 돈을 건넨 심부름꾼만 밝혀졌을 뿐, 그 이상 드러난 것은 거의 없다. 일반인의 상식으로는 재벌이 검은돈 제공하는 것은 회사가 조성한 비자금을 총수의 판단으로 건네는 것이다. 대가를 요구하지 않는 검은돈이란 논리에 어긋난다. 그런데도 지금껏 불법 정치자금에 대한 검찰 수사에서 이런 상식에 맞는 결론이 나온 경우는 그다지 많지 않았다. 이번에도 그렇게 넘어갈 것인가? 상황은 그렇게 호락호락하지 않다. 전후사정을 살펴보면 두 재벌이 딱 걸린 꼴이기 때문이다.


사진/ 재벌은 대통령 아들에게 뭉칫돈을 주더라도 대가를요구하지 않는다? 책임을 뒤집어쓴 고 정주영 현대 명예회장(왼쪽)과 관련 의혹을 받고 있는 이건희 삼성 회장.


검찰은 현대그룹이 제공한 10억원의 경우 홍업씨의 경희대 선배인 금강고려화학 김춘기 부사장이 홍업씨에게 돈 심부름을 했다고 설명했다. 돈을 주라고 지시한 사람도 비교적 구체적으로 밝혔다. 고 정주영 명예회장이 동생인 금강고려화학 정상영 회장을 통해 돈을 건네도록 지시했다는 것이다. 대가성 여부에 대해서는 아무런 설명도 없었다.

그러나 돈을 건넨 시점의 정황을 보면 대가성이 없었다는 가정은 비현실적이다. 당시 현대는 매우 다급했다. 자금난을 겪는 부실 계열사 때문이었다. 기업·금융 구조조정을 진두지휘한 금융감독위원회(금감위)는 98년 6월18일 부실기업 1차퇴출에 이어, 7월11일 5대그룹 계열의 부실기업을 퇴출하도록 주채권은행들에 지시했다. 1차퇴출이 작은 회사들로 숫자만 끼워맞춘 것이라는 여론의 비난에 따른 것이었다. 그런 상황에서 현대가 10억원이란 거액을 아무런 대가도 바라지 않고 홍업씨에게 건넸다고 보기는 어렵다. 홍업씨에게 건넨 돈이 효력을 발휘했든 그렇지 않든 간에 금감위의 의욕과는 달리 이후 5대그룹 부실기업 퇴출 역시 흐지부지됐다.

현대는 10억원을 제공한 지 8개월이 지난 99년 3월부터 1년 동안 매달 5천만원을 추가로 홍업씨에게 건넸다. 이무렵 현대는 재벌들 사이의 ‘빅딜’(대규모 사업교환)에서 반도체 사업 인수주체를 놓고 LG와 치열한 경합을 벌이고 있었다. 반도체 빅딜은 4월21일 현대를 인수자로 하는 협상이 최종타결됐지만, 이후에도 현대그룹은 항공산업과 철도차량사업 부문에서 빅딜협상을 계속했다.

부실기업 퇴출로 다급했던 현대




특히 돈의 전달자가 강명구(현대그룹 구조조정본부 부본부장)씨라는 점은 대가성 여부의 중요한 단서를 제공한다. 강씨는 현대전자의 상무, 전무, 부사장을 지낸 현대전자 사람이다. 현대그룹이 반도체 빅딜에 전력을 쏟는 상황에서 빅딜 대상기업의 고위간부가 돈을 건넸다는 얘기다. 그렇다면 돈을 건네도록 지시한 사람은 과연 누구였을까? 검찰은 이 돈을 건네도록 지시한 사람도 앞서 건넨 10억원과 마찬가지로 고 정 명예회장이라고 공소장의 내역란에 썼다. 그러나 현대그룹의 사정을 잘 아는 사람들은 정 명예회장이 강명구씨를 불러 돈을 전하라고 지시했다는 설명에 고개를 갸웃거린다. 당시 현대전자와 강씨는 정몽헌 공동회장의 지배 아래 있었기 때문이다. 돈의 출처가 어디인지는 진실을 따질 중요한 잣대가 된다. 그러나 검찰은 돈의 출처에 대해 “아직 확인되지 않았다”고만 밝혔다.

삼성이 홍업씨에게 돈을 건넨 경위도 의문투성이다. 검찰은 당시 삼성 구조조정본부 재무팀장인 김인주씨가 홍업씨에게 돈을 건넸다고 밝혔다. 김씨가 자기 돈 5억원을 홍업씨에게 건넸을 리는 만무하다. 그 돈이 삼성의 돈이라면 김씨가 그런 거액을 윗선의 지시나 허락 없이 건넸다고 보기 어렵다. 검찰 관계자는 “이학수 구조조정본부장은 자신은 지시하지 않았다고 주장하고, 김인주씨는 자신이 판단해 돈을 넘겨줬다고 한다”고 말했다. 윗선과의 연결고리를 차단하려는 발언으로 보이지만, 이를 그대로 믿는 사람은 없다.

돈을 건넨 시점을 보면 삼성도 줄대기에 나설 만한 다급한 사정이 많았다. 누구보다 급한 사람은 그룹총수인 이건희 회장이었다. 당시 삼성은 편법증여를 통해 이 회장의 장남 재용씨를 에버랜드의 최대주주로 만들고, 에버랜드를 삼성생명의 최대주주로 만들었다. 이어 자동차사업 실패에 대한 책임을 지고 이 회장이 삼성생명 주식 400만주 상장을 전제로 채권단에 내놓겠다고 선언했다. 돈을 건넨 시점은 그 선언이 나온 직후였다. 삼성생명의 상장 추진과정에서 주주와 보험가입자들이 어떻게 몫을 나눌 것인지 첨예한 논란이 예고된 상황이었다.

삼성 홍업씨 아파트 구입에도 개입

삼성 쪽은 홍업씨에게 돈을 건넨 것 외에 홍업씨가 최고급 아파트를 구입한 과정과도 관련이 있다. 홍업씨는 지난 2000년 7월, 서울 서초동의 83평짜리 삼성아파트(현 시가 16억원)에 전세를 들었다. 홍업씨는 그 뒤 이 아파트를 사들였는데, 원소유자는 삼성카드의 이경우 사장으로 밝혀졌다. 검찰 관계자는 “애초 7억원에 전세를 들었으며, 그 뒤 대출받은 3억원에 4억원을 더 보태 14억원에 집을 샀기 때문에 별 문제가 없었다”고 말했다. 하지만 삼성계열사 사장의 아파트를 홍업씨가 갑자기 거액을 들여 샀다는 점에서 정상적인 거래였는지에 대한 의혹은 쉽게 가시지 않는다.

수사결과가 석연치 않다는 여론에 따라 검찰은 재벌들이 건넨 돈에 대가성이 있었는지를 앞으로 조사하겠다고 밝혔다. 홍업씨가 정치인이나 공직자가 아니라도 삼성과 현대가 돈을 건네면서 청탁을 했다면 홍업씨는 알선수재죄를 지은 것이 된다. 두 재벌이 건넨 돈이 회삿돈이라면, 돈을 건네도록 지시한 사람도 책임을 면하기 어렵다. 회삿돈을 횡령했거나 주주들의 이익에 반해 회삿돈을 다른 사람에게 준 것(배임증재)이 되기 때문이다. 지난 96년 검찰은 삼성그룹 이건희 회장이 노태우 전 대통령에게 250억원을 준 일에 대해 “기업경영과 관련된 경제정책 등을 결정하고 금융·세제 등을 운용하는 데에서 삼성그룹이 다른 경쟁기업보다 우대받거나 최소한 불이익이 없도록 선처해달라는 취지로 돈을 건넸다”며 이 회장을 뇌물죄로 기소했으며, 법원도 유죄판결을 내린 바 있다. 소극적인 ‘선처 요청’에도 대가성을 인정한 사례다.

현대와 삼성은 홍업씨에게 돈을 건넨 경위와 자금출처에 대해 굳게 입을 다물고 있다. 삼성의 한 관계자는 “수사가 진행 중인 상황에서 일일이 말할 수 없으며, 알지도 못한다”고 말했다. 옛 현대그룹에서 분리한 현대차그룹 쪽은 “옛 그룹 시절의 일이며, 강씨는 우리와는 무관한 사람”이라고 주장했다. 현대그룹 쪽도 침묵하고 있다. 어차피 할말이 없는 만큼 무대응이 상책이라는 자세다. 하지만 재계의 한 관계자는 “현대의 경우 고인이 된 정주영 명예회장에게 다 뒤집어씌울 수 있겠지만, 삼성은 누군가 책임을 지지 않을 수 없는 상황인 것 같다”고 말했다.

제대로 걸린 대재벌, 누가 책임지나

검찰은 이번 사건 수사를 통해 삼성·현대라는 대재벌이 홍업씨에게 검은돈을 건넨 사실을 밝히는 개가를 올렸다. 비교적 철저한 수사를 했다는 평가를 받기도 한다. 그러나 홍업씨가 검찰 수사에도 개입하고 돈을 받은 사실이 밝혀져 검찰의 명예 또한 크게 실추됐다. 검찰의 향후 수사는 실추된 명예를 회복할 수 있을지 시험대가 될 전망이다. 특히 검찰이 홍업씨 수사과정에서 다른 기업에서 받은 돈에 대해서는 구체적인 청탁내용을 모두 밝혀놓고도, 유독 삼성과 현대에 대해서만 얼버무린다면 “재벌 봐주기”라는 비난을 피하기 어려울 것으로 보인다.

정남구 기자 jeje@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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