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꺾이지 않는 미군의 콧대 여중생 압사 사건에 여전히 고압적 태도… 일본 오키나와에서의 신속한 대처와 비교돼
들끓는 반미감정을 우려한 탓일까. “비극적 사고가 발생한 것은 유감이나 누구에게도 과실은 없었다”라고 한 미군의 태도가 조금씩 바뀌고 있다. 지난 6월13일 미군 궤도차량에 깔려 형체조차 알아볼 수 없을 정도로 비참하게 스러진 여중생 2명의 죽음을 둘러싼 논란이 점점 커지고 있다. 사고에 책임이 없다고 한 미군은 어느샌가 사고차량 운전병과 관제병을 자국 군사법원에 기소했다. “한·미 합동조사를 통해 모든 것을 밝혔으며, 더 이상의 조사는 없을 것”이라고 하다가, 한국 검찰의 조사에도 응하겠다고 자세를 낮췄다. 유감 표명이 공식 사과로 바뀌고, 조사 종결이 전격 기소로 이어지기까지 지역주민과 시민·사회단체를 중심으로 구성된 대책위원회는 경기도 의정부시 미2사단 정문 앞 아스팔트를 뜨겁게 달궜다. 이들의 반발이 없었다면 미군은 이번 사건을 그대로 덮을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을까? 주둔 지역의 여론에 민감히 반응하며 서로 다른 양태를 보여온 미군의 ‘이중성’을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두 가지 사건에서 해답의 실마리가 보인다.
미군의 이중성 보여주는 두 사건
지난 92년 10월28일, 경기 동두천시 한 가정집에서 미군클럽 종업원 윤금이(당시 26살)씨가 알몸으로 숨진 채 발견됐다. 주검은 처참했다. 자궁에는 콜라병이 꽂혀 있었고, 우산대가 항문에서 직장까지 27cm가량 박혀 있었다. 주검에는 온통 세제가루가 흩뿌려져 있었고, 입에는 성냥개비가 물려 있었으며, 온몸은 피범벅이였다. 미2사단 제20보병연대 5대대 본부중대 소속 케네스 마클(당시 20살) 이병이 범인으로 지목되기까지는 그리 긴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미군 범죄에 시달려온 동두천 시민들의 분노가 폭발했다. 동두천 택시노동자들은 미군 승차 거부운동을 벌였고, 상점들의 미군 손님 안 받기 운동도 이어졌다. 동두천민주시민회를 비롯한 사회단체들은 대책위원회를 구성해 사건의 진상을 알려나갔다. 그해 11월17일 대책위가 주최한 시민규탄대회에는 경찰의 원천봉쇄를 뚫고 2천여명이 참여하는 등 동두천시는 미군 범죄에 대한 분노의 함성으로 뒤덮였다. 사건의 진상이 밝혀지면서 살해 미군에 대한 구속 수사와 미국의 사과 여부가 국민의 최대 관심사로 떠올랐다. 처음에 우리 정부는 여론을 의식해 마클 이병에 대한 구속수사 방침을 발표했다. 그러나 협의과정에서 미국 쪽은 한·미 주둔군지위협정(SOFA)을 들어 유죄 확정 이전 피의자 신병인도를 거부했다. 이에 따라 정부는 재판권을 행사하되 불구속 수사를 한다는 방침을 내놨다. 당시 미2사단장 제임스 스콧 소장이 사과문을 보낸 것말고는, 미 대사관과 미8군 사령부 등에서는 끝내 공개 사과를 하지 않았다. 사건 발생 4개월여 만인 93년 2월17일에야 첫 공판이 열렸고, 두달 뒤 선고공판에서 피고 마클에게 무기징역이 선고됐다. 유족에게 배상금 7100만원을 지급했다는 이유로 항소심에서 15년으로 감형된 그는 94년 4월29일 대법원에서 상고를 기각하고 형을 확정할 때까지 미군 수감시설에서 생활했다. 마클 이병은 같은해 5월17일에야 천안교도소에 수감되었다. 참혹한 살인에 대한 대가를 치르게 하는 데 무려 1년6개월여가 걸린 것이다. 물론 미군 범죄 근절을 위한 제도적 변화는 전혀 제시되지 못했다. 그러나 이웃 일본에서는 사뭇 다른 사례가 발견된다. 국토의 0.6%에 불과한 면적에 주둔 미군 기지의 75%가 집중돼 있는 오키나와현에서 95년 발생한 초등학교 여학생 강간사건과 뒤이은 미군의 행보는 윤금이씨 사건과 견줘 한·미 관계의 현실을 되새기게 한다. 95년 9월4일 밤 9시께 오키나와 주둔 미군병사 3명이 쇼핑을 마치고 귀가 중이던 12살 소녀를 으슥한 해변으로 납치한 뒤 강간했다. 사건이 터지자 “한 소녀의 안전조차 지킬 수 없는 ‘안전보장’이란 도대체 무엇을 위한 것이냐”는 분노가 오키나와 전역을 뒤덮었다. 오키나와현 당국은 기지로 도망친 범인들을 즉각 일본 경찰에 넘길 것을 요구했지만, 미군은 SOFA 규정을 이유로 이를 거부했다. 사건이 발생한 지 열흘 만인 9월14일에야 웨인 롤링스 당시 미 해병소장은 오타 마사히데 오키나와현 지사에게 서한을 보내 “피해자와 가족 그리고 오키나와 주민들에게 깊은 유감의 뜻을 전한다”고 밝혔다. 주민들의 반발이 거세지자 9월19일에는 월터 먼데일 주일 미 대사와 리처드 마이어스 주일 미군사령관이 오타 지사를 만나 “이번 범죄가 피해 여학생과 가족, 그리고 오키나와 주민들에게 끼친 고통에 대한 심심한 사과의 뜻을 전한다”고 말했다. 그러나 오키나와의 분노는 사그라질 줄 몰랐다. 미군 기지 반환문제가 터져나오면서 자칫 미·일 관계 전반이 흔들릴 조짐까지 보이기 시작했다. 상황이 심각해지자 9월21일에는 빌 클린턴 미 대통령이 한 라디오 방송과의 회견에서 자신이 이번 사건에 분노하고 있으며, 미국은 오키나와에서 발생한 이번 사건을 ‘깊이 후회하고 있음을 천명할 것’이라고 말했다. 이어 9월26일에는 워런 크리스토퍼 미 국무장관이 뉴욕에서 고노 요헤이 일본 외무장관과 만난 자리에서 “정의는 실현돼야 하며 범인들은 반드시 처벌될 것”이라고 말했다. 주민들의 들끓는 분노는 미군 쪽을 몰아세웠다. ‘일본 검찰의 기소가 있을 때까지 미군 피의자의 신병인도를 거부할 수 있다’고 규정한 SOFA 조항의 폐기 요구가 빗발쳤다. 9월29일 오키나와 나하지검이 범죄 미군들을 나하 지방재판소에 기소한 뒤 이들의 신병은 일본에 인도됐다. 나하지검 조사결과 이들은 사건 당일 밤, 미리 접착 테이프를 준비하고 기지 안에서 렌터카를 빌리는 등 계획적으로 범행을 저지른 것으로 드러났다.
오키나와에선 SOFA 개정
결국 섬 안의 후텐마 공군기지와 이미 사용을 포기한 나하 항만시설을 반환하고 “흉악범의 경우 체포시점에서 신병을 인도하는 것을 호의적으로 고려한다”는 내용으로 일·미 SOFA의 운용 방침이 바뀌었다. 이에 따라 97년 사세보에서 일본 여성의 목을 자르고 금품을 털어간 엽기적인 사건이 일어났을 때, 미군은 범인을 체포한 뒤 곧바로 일본당국에 넘기기도 했다. 지난 7월10일 우리 법무부는 미군 쪽에 여중생 사망 사건과 관련해 재판 관할권 포기를 공식 요청했다. 반세기 미군 주둔사에 처음 있는 일이다. 미군 쪽은 여전히 고압적인 태도를 취하고 있다. 검찰 출두 약속을 일방적으로 취소하는가 하면, 예정에도 없이 불쑥 나타나서는 ‘초상권 침해’ 등을 이유로 조사를 거부한 채 1시간여 만에 돌아가버리기도 했다. 미군 병사의 범죄로 촉발된 반미운동을 기지 반환과 SOFA 운용 개선으로까지 이어간 일본의 경험이 오늘의 우리에게 주는 교훈은 적지 않다.
정인환 기자 inhwan@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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