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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엽제 판결, 남의 손을 들어주다 제조사 상대로 한 손해배상 청구소송 기각…국내외 유사소송에 적잖은 영향 끼칠 듯
5월23일 서울 서초동 서울지법 민사법정 559호 법정. 이날 법원 청사 안팎에는 600여명의 고엽제 피해 전우들이 모여 시위를 하였으나 선고 결과를 뒤집어놓을 수는 없었다. 법원은 ‘고엽제 소송’에서 가해자인 고엽제 제조사 다우케미컬사와 몬산토사의 손을 들어줬다. 재판부는 이날 ‘남의 손’을 들어주기가 부담스러웠는지 민사 법정에서 이례적으로 20여쪽짜리 ‘고엽제 판결 요약’을 읽어 내려갔다. “자칫 원고들이 자국민이고 피고들이 외국회사라는 이유로 원고들에게 편향된 판결을 선고한다거나, 반대로 한·미간 외교적 마찰을 우려해 법리가 왜곡되는 결론을 내리게 된다면 국제사회의 조롱거리가 될 수 있다고 생각했다.” 재판부의 심적 부담을 밖으로 그대로 드러낸 이 대목은 “재판부는 판결문으로 말한다”는 금기에 예외로 남을 만하다.
장문의 ‘판결 요약’ 이례적으로 읽어
지난 1999년 10월 베트남전 고엽제 피해전우 1만7천여명이 고엽제 제조사를 상대로 낸 5조1600억원대의 손해배상 청구소송은 원고인 쪽에 180억원에 이르는 인지대만 남긴 채 1심이 끝났다. 항소심과 대법원 확정판결을 남겨둔 상태지만, 대부분 병들거나 영세한 피해자들이 거대한 다국적기업을 상대로 계속 싸운다는 게 쉽지 않을 것으로 보인다. 이번 소송은 고엽제 제조회사를 상대로 한 나라 안팎에 제대로 된 판례가 없는 상황에서 비슷한 소송에 적지 않은 영향을 끼칠 전망이다. 원고 쪽 변호인인 백영엽 변호사는 이번 판결이 유사소송을 준비하려는 미국 캘리포니아 거주 베트남 ‘보트피플’과 베트남 현지 주민들에게 좋지 않은 영향을 끼칠 것이라고 예상했다. 또 60년대 말 비무장지대에 살포된 고엽제로 피해를 입은 우리 주민들이 다우케미컬사 등을 상대로 99년에 미국 연방법원에 제기한 소송에도 파장이 미칠 것으로 보인다. 재판부도 “이 사건의 결론이 국내의 평가에만 머무르지 않고 월남전 관련 당사국들에 의한 국제사회의 평가가 뒤따르게 된다”며 사건의 중요성에 대해 지적했다. 32개월여 동안 9차례의 준비절차와 6차례의 변론. 재판기록이 트럭 1대 분량에 달한 이번 소송에서 원고 쪽은 나름대로 승소 가능성을 높이 봤다. 소송 초기에 180억여원에 이르는 소송비용을 유예받는 등 원고 쪽은 좋은 출발을 보였다. 법원이 ‘명백히 패소할 가능성이 없는 사건’에 한해 경제적 어려움으로 비용을 부담하기 어렵다고 판단해 원고 쪽의 ‘소송구조신청’ 신청을 받아들인 것이었다. 또 승소할 경우에 대비해 피고 쪽 다우케미컬사 등의 국내 특혜권에 대한 가압류 결정을 받아놓는 등 순항을 거듭 했다. 무엇보다도 84년 미국 등에 거주하는 베트남 참전 고엽제 피해자 24만여명이 제조회사들을 상대로 낸 집단소송에서 1억8천만달러에 달하는 합의결정이 이뤄졌다는 게 큰 희망이었다. 또 당시 소송에서 빠진 94년 이후 고엽제 피해자들이 최근에 새롭게 미국 연방법원에 소송을 낸 것도 고무적이었다. 백 변호사는 “뉴욕 연방지방법원에서 소송 당사자 사이의 화해에 대해 ‘승인판결’을 내렸다”며 “이는 명백히 하나의 판례가 된다”고 주장했다. 이에 대해 피고 쪽에서는 ‘84년 화해’가 7년여 동안 끌어온 소송을 마치려 한 ‘귀찮음의 대가’라고 맞섰다. 재판부는 “선고에 이르기 전 합의한 적이 있다”는 정도로 받아들였지 판례로서 가치를 두지는 않았다. 법원이 미국 쪽 선례를 무시한 것이다.
“고엽제법과 손해배상은 인과관계 없다”
소송 당사자들이 보훈청에 고엽제 환자로 등록됐다는 사실도 원고 쪽의 유리한 교두보이기도 했다. 우리 정부는 ‘고엽제후유의증환자지원 등에 관한 법률’을 제정해 고엽제 피해자들에게 치료와 보상을 해주고 있기 때문이다. 미국의 ‘다이옥신 규칙’과 마찬가지로 고엽제와 후유증과의 인과관계가 있다는 것을 인정한 것이라고 원고 쪽은 주장했다. 이에 재판부는 “고엽제법이 보훈정책적인 고려에서 제정된 것이지 민사상 손해배상을 전제로 고엽제와 질병과의 인과관계를 규정할 의도는 없었다”며 고엽제법의 규정 자체가 인과관계를 갈음할 수 없다고 밝혔다. 예우적 차원에서 제정된 법이 불법행위 성립 여부를 따져 책임을 묻는 사안과는 별개라는 게 법원의 시각이었다. 비록 1심 재판부는 피고 쪽 논리를 받아들이기는 했으나, “더 충실한 심리를 위해 당사자 개개인의 월남파병 지역과 기간, 고엽제 발병 시기, 현재의 증세 등 하나하나 좀더 따져보면 좋았을 것이다”며 아쉬움을 나타내기도 했다. 항소심에서 이런 아쉬움마저 없었으면 하는 게 고엽제 피해자들의 바람일 것이다.
류이근 기자/ 한겨레 사회2부ryuyigeun@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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