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슈추적 ] 2002년04월24일 제406호 

F-15K 살게 햇볕 쬐어다오

차기 전투기 결정 관련 한·미 빅딜설… 한반도 평화 보장 위한 노림수 있었나

한국의 국방부는 용감했다. 빗발치는 여론의 반대와 공군 조종사들의 저항이라는 총알을 뚫고 고지를 탈환하듯, 마침내 미국 보잉사의 F-15K에 차기 전투기 깃발을 꽂는 데 성공했다.

여론의 반대에도 보잉을 선택한 이유


사진/ 국방부는 여론의 거센반대를 무릅쓰고 f-15K를 차기 전투기로 선정했다. 이번 결정에는 김대중의 정치적 계산이 숨겨져 있다는 게 전문가들의 평가다. (이용호 기자)


국방부는 4월19일 2009년까지 44억6688만달러(약 5조8천억원)를 들여 40대를 도입하는 한국 공군의 차기 전투기(F-X)로 미 보잉사의 F-15K를 최종 낙점했다. 국방부는 “2단계에서는 해당국과의 안보·외교·경제적인 측면을 고려해 △국가안보 △대외관계 △해외시장 개척에 끼치는 영향 등 3가지 요소를 평가했다”며 “그 결과 F-15K로 결정을 내렸다”고 밝혔다. 국방부는 보잉과 절충교역 비율조정 등의 협상이 끝나면 대통령으로부터 사업집행 승인을 받아 F-15K 구매 본계약을 맺을 예정이다.

1988년 차기 전투기 도입을 첫 결정한 이후 무려 14년 만에 최종 기종 결정이 나온 셈이다. 오랜 진통과 출생 준비기간을 감안하면 ‘옥동자’나 탄생할 법하지만, 정작 박수를 치며 환호성을 지르는 사람들이 눈에 띄지 않는 것을 보면 목마르게 고대하던 쓸 만한 물건은 아닌 듯하다. 유난히 말도 많고 탈도 많았던 차기 전투기 사업은 이렇게 막을 내리는 것일까. 다행인지 불행인지 모르겠지만 차기 전투기 사업은 끝이 아니라 이제 시작이라는 시각이 지배적이다. 우선 남은 추가협상 과제가 쌓여 있다. 1조8천억원이나 초과한 예산을 메우는 문제부터 시작해, 기술이전을 위한 절충교역 비율을 높이고, 안정적으로 부품공급을 확보하는 문제 등 하나같이 쉽지 않은 과제들이다.


사진/ (이용호 기자)


F-15K 선정 철회를 요구하는 각계의 빗발치는 비난을 잠재우기도 만만치 않아 보인다. 무엇보다 국방부는 나라 안팎으로 신뢰성을 크게 떨어뜨렸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특정 나라와 업체를 밀어주기 위해 솔직하고 당당한 처신을 하지 못했다는 비난이 홍수를 이루고 있다. 외압설을 비롯한 국방부 고위 관계자들의 평가조작설이나 거짓말 등 기종 결정을 둘러싼 수많은 의혹들을 풀려면 적지 않은 시일이 걸릴 것이라는 게 일반 정서다. 국방부는 기종결정이 이뤄지면 모든 내용을 공개해 의혹을 씻겠다고 했지만 정작 발표날인 4월19일에도 ‘국가기밀’을 이유로 구체적인 평가 가중치마저 공개를 거부해 의혹을 증폭시켰다.

국방부는 차기 전투기 사업 강행의 이유를 세 가지로 설명했다. △공군의 전력공백을 빨리 메워야 하고 △기종결정 연기에 따른 국가 신뢰도 하락을 더는 방치할 수 없으며 △사업이 연기되면 국내 항공산업 기반이 악화된다는 점 따위였다. 전문가들 가운데 북한을 비롯해 주변국들의 위협이 오히려 그 어느 때보다 줄어든 상황에서 기종결정이 한두해 더 늦춰진다고 공군의 전력공백에 치명적인 영향을 줄 것으로 보는 이는 거의 없다. F-15K가 들어옴으로써 국내 항공산업의 기반이 살아날 것이라고 기대하는 전문가도 손으로 꼽을 정도다. 미 보잉사는 F-15K 구매에 대한 대가로 △부품하청 및 수출(14억4천만달러) △기술이전(8억8천만달러) △전투기 정비(5억7300만달러) 등 모두 28억9300만달러를 보상구매하겠다고 밝혔지만 공군이나 항공산업체의 기대와는 상당히 동떨어져 있다는 게 전문가들의 공통된 견해다.

전력공백을 우려해 차기 전투기 기종의 빠른 결정을 주장해온 공군도 정작 숙원이 해결됐다는 만족감보다는 상처투성이의 노후 전투기를 물려받게 됐다는 자괴감이 더 자리잡고 있는 듯했다. 정부부처 관계자들의 얼굴 표정도 어두워 보이기는 마찬가지다. 지난 10년 넘게 박혔던 눈엣가시를 뺐다는 안도감을 느끼면서도, 뭔가 찝찝하다는 표정을 감추지 않고 있다.

“미국의 절박성 이용해 대가 챙겼다”


사진/ (한겨레21)


하지만 이런 분위기가 차기 전투기 사업 선정을 둘러싼 군과 정부부처에서 흘러나오는 풍경의 모두는 아니다. 흥미롭게 지켜볼 대목은 정부 내 일부 고위 관계자들 사이에서는 이번 결정이 알려진 것과는 달리 뭔가 고도의 노림수가 숨겨져 있다는 뉘앙스를 강하게 풍기고 있다는 점이다. 정부의 한 고위 관계자는 “우리는 최선은 아니더라도 차선의 선택을 했다고 본다. 지금 일일이 다 밝힐 수는 없지만, 시민단체와 여론의 거센 비난, 정권 말기의 여러 가지 부담을 감안하면서까지 차기 전투기로 F-15K를 결정한 것은 국가 이익을 위해 모든 요소를 다 고려한 결과”라고 말했다. 하지만 그는 “올챙이가 갑자기 개구리로 변신할 수는 없다”고 말해 묘한 여운을 남겼다.

군 고위 관계자는 “지금은 우리가 온갖 욕설과 비난을 덮어쓰고 있지만 언젠가 우리의 진심을 이해할 날이 올 것”이라며 “평가과정에서 일부 항목의 일관성이 결여됐고, 무리수를 둔 측면도 있으나 이는 어디까지나 종합적인 국익을 고민했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다들 뭔가 지금은 밝힐 수는 없지만 F-15K를 선택할 수밖에 없었던 불가피한 사정이 있음을 내비친 대목이 눈에 띈다. 마치 역사적인 소명을 수행하고 있는 것 같은 비장함마저 느껴졌다. “솔직히 현 정권이 엄청난 부담을 무릅쓰면서까지 차기 전투기 사업을 밀어붙인 배경이 무엇이라고 생각하느냐. 더구나 김대중 정부는 임기 말 권력누수에다가 대통령 아들들의 각종 비리협의가 겹쳐 반신불수가 돼 있지 않느냐. 그렇다면 현 정권이 막판에 자포자기식으로 이런 초강수를 둔 것으로 보느냐. 아니다. 김 대통령은 다른 것은 다 엉망이 되더라도 통일외교안보 분야에서만은 역사적으로 남을 업적을 남기고 싶어한다. 사실 차기 전투기 사업은 누가 뭐래도 미국과의 협상에서는 빅 카드다. 정부의 결정을 지금 평가해서는 안 된다. 두고 봐라.” 앞서 나온 정부 고위 관계자의 귀띔이다.

그렇다면 대체 김 대통령을 비롯한 핵심 외교안보팀들의 노림수는 무엇일까? 관계 전문가들에 따르면 F-15K 선정을 놓고 가장 조바심을 낸 당사자는 역시 미 보잉사였던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보잉사는 김대중 정부에서 F-15K 수주를 못 받고 다음 정권으로 미뤄진다면 영원히 기회를 놓칠지 모른다는 위기감을 갖고 있었다는 것이다. 미국 유력 정치인이나 전·현직 고위 관료들을 총동원해 한국 정부에 직간접 무차별 로비공세를 벌인 것도 이런 이유 때문이다. 마침 미국 정부로서는 합동전투기사업(JSF) 입찰경쟁에서 탈락해 막대한 타격을 입게 된 보잉사에 대해 적절한 보상을 해줘야 하는 처지에 있었다.

핵심 정보 관계자에 따르면 미 행정부가 보잉사를 돌봐줄 이유는 이뿐만이 아니었다. “미 국방부와 보잉사는 서로 떼려야 뗄 수 없는 파트너십을 맺고 있다. 더구나 보잉사는 미국의 미사일방어(MD)체제 구축에 참여하고 있는 핵심 방위산업체다. 그럴 리야 없겠지만, 만약 보잉사가 흔들리면 MD체제에 부정적인 영향을 끼칠 수밖에 없다. 보잉사의 경영 안정은 미 국익과도 직접 관련을 맺고 있는 셈이다. 당신이 만약 미국의 처지라면 무려 44억달러에 이르는 한국의 차기 전투기 공급사업을 포기하겠느냐. 더구나 자칭 한국의 안보를 책임지는 동맹국이라는 극히 유리한 위치에 있음에도 불구하고, 경쟁에서 진다면 국제사회에서 미국의 권위는 땅에 떨어지고 말 것이다. 말하자면 종이호랑이로 전락하기 십상인 것이다. 미국도, 한국도 이 사실을 너무나 잘 알고 있다.” 차기 전투기 사업은 한국과 미국이 ‘빅딜’을 모색할 가치가 충분하다는 얘기였다.

대량살상무기 협상 풀리려나

전문가들은 김대중 정부가 햇볕정책을 보장받는 데 그치지 않고 ‘다른 무엇’을 노렸다고 추정하는 분위기다. 핵, 장거리 미사일 등 북-미간의 핵심현안인 대량살상무기 협상과 관련해 북한과 미국 모두를 만족시키기 위한 카드로 쓸 가능성이 높다는 지적이다. 정부가 미국으로부터 F-15K를 사들이는 대신, 북-미 미사일 협상 등에서 미국 쪽의 강경자세를 누그러뜨리려 했다는 얘기다. 물론 이는 어디까지나 전문가들의 분석이다. 하지만 북-미간에 대량살상무기 문제가 해결되지 않는 한, 김 대통령이 구상해온 ‘한반도 평화의 임기 내 가시화’가 실질적으로 불가능하다는 절박한 사정을 감안하면 상당히 설득력이 있어 보인다. F-15K 선정과 관련해 북한의 반발이 생각만큼 드세지 않은 것도 눈여겨볼 대목이다. 하지만 미국 부시 정권에 F-15K 약발이 먹혀들어갈지는 여전히 불투명해 보인다.

임을출 기자 chul@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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