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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기사섹션 : 이슈추적 | 등록 2002.03.20(수) 제401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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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슈추적] 민영화, 논의의 문을 열라 발전노조 파업 장기화로 다시 쟁점화…사회적 '합의' 필요할 때
20일째를 훌쩍 넘기고 있는 발전노동자 파업은 흔히 보아온 파업과 여러 가지 점에서 다르다. 우선 조합원들이 10여명씩 한조를 이뤄 전국 각지로 흩어지는 이른바 ‘산개투쟁’이란 파업형태를 선보였다. 연대파업이 성사된데다 이같이 전국을 떠도는 투어파업에 힘입어 이번 파업은 안팎의 예상을 뒤엎고 장기화하고 있다. 또한 민간사업장 노동자와 공공부문 노동자는 파업의 지향이 다를 수 있다는 점도 뚜렷이 보여준다. 현대자동차노조가 아반떼의 품질개선을 요구하며 파업하는 일은 보기 어렵지만 공공부문노동자는 공익서비스의 질을 높이라며 파업에 나설 수 있는 것이다. 민주노총 산하 공공연맹 황민호 부위원장은 “발전소 매각 이후의 조합원 신분보장을 정부가 타협안으로 내놓았지만, 민간매각이란 전제가 바뀌지 않는 한 받아들일 수 없다”며 구조조정에 맞선 집단이기주의가 결코 아니라고 말했다. 2015년까지 발전소를 지금보다 더 많이 지어야 한다는 정부 발표를 감안할 때 발전소가 민간에 팔려도 고용불안은 걱정할 일이 아니라는 것이다.
노·정간 정면대결로 빠질 가능성
무엇보다도 이번 파업은 사실상 최초의 대규모 민영화저지투쟁으로, 민영화를 ‘사회적 이슈’로 끌어올렸다. 이미 한전이 5개 발전자회사로 쪼개졌지만 민영화가 이제서야 본격적인 논란의 대상으로 등장한 셈이다. 박형규 목사 등 사회원로들이 “사태 해결을 위해 이제부터 논의를 진행하되 그동안 정부는 매각작업을 유보하고 노조는 파업을 철회하라”고 촉구한 것도 같은 맥락이다. 물론 발전소 매각을 둘러싼 노·정 갈등 속에서 양쪽 모두 협상 가능성은 열어두고 있다. 그러나 ‘사회적 합의’를 요구하는 노조와 아예 “민영화는 협상 대상이 아니다”는 정부가 팽팽히 맞서면서 돌파구는 좀체 열리지 않고 있다. 산업자원부는 “발전부문을 이미 분할해 놓았는데 매각을 안한다면 가다가 마는 것”이라며 “어정쩡한 상태는 구조개혁의 후퇴만 초래할 것”이라고 일축했다. 이렇듯 “민영화 원칙은 절대 훼손될 수 없다”는 정부 방침 앞에서 협상은 서로 합의할 수 없다는 사실만 합의한 채 끝나고 있다. 이에 따른 파업의 장기화는 민주노총이 제2의 연대총파업을 선언하는 등 ‘춘투’로 이어질 조짐까지 보이고 있다. 게다가 파업중인 5개 발전자회사 외에 유일하게 공기업체제로 남게 되는 한국수력원자력노조가 연대파업 찬반투표에 들어갔고, 지하철노조까지 가세할 움직임을 보이고 있어 노·정 간 정면대결 국면으로 빠져들 공산이 커졌다. 이에 맞서 정부는 손해배상 조처로 조합원의 살람살이에 대한 강제압류까지 밟고 있다. 전력대란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전력생산의 40%를 담당하는 수력원자력노조까지 파업에 합세하면 정상적인 전력공급은 사실상 어렵게 된다. 당장 ‘해법’을 찾기보다 복잡하게 꼬여 있는 ‘문제의 구조’를 파악하는 게 해법을 도출하는 길일 때도 있다. 그런 점에서 이번 논란의 지형을 들여다볼 필요가 있다. 거센 저항이 있음에도 정권 말기에 운명을 걸고 꼭 민영화를 추진해야 하는가, 라고 의문을 던질 법도 하다. 한전이 민영화 논의를 제쳐두고 당장 팔아치워야 할 부실기업은 물론 아니다. 오히려 자산규모 64조원에 연간 1조7천억원의 순이익을 내는 대표적인 알짜 기업이다. 값싼 요금으로 공익적 기능을 해왔음에도 막대한 흑자를 낸다는 점에서 “비효율적이므로 민영화해야 한다”는 근거는 빈곤할 수밖에 없다. 여기서 등장하는 게 경쟁체제 도입을 통한 ‘효율’이다. 전력은 발전, 송전, 배전, 판매가 수직적으로 통합된 네트워크산업이다. 그러나 기술발달에 따라 규모의 경제가 사라졌기 때문에 이제 쪼개서 경쟁을 시키면 효율이 높아진다는 게 정부의 논리다. 에너지경제연구원 송광의 연구원은 “전력산업은 자연스럽게 공기업독점이 형성된 게 아니라 정부가 규제를 통해 국가독점을 유지해왔다”며 “전력산업이 성숙단계에 들어선 만큼 경쟁체제를 도입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공기업체제인 전력산업구조 자체가 그동안 비효율을 낳았다는 얘기다. 물론 공기업이라고 해서 효율을 무시할 수는 없고 ‘공익’을 실현하기 위해서도 효율은 필요하다. 관료주의, 낙하산 인사, 방만한 경영,철밥통으로 대표되는 공기업개혁은 필요하다. 그러나 발전노조는 “공기업개혁이 곧 민영화를 일컫는 건 아니다”며 “정부가 공기업개혁이란 명분으로 국민적 정서를 자극해 민영화를 강행하고 있다”고 주장했다.
‘효율’과 ‘합의’의 문제
‘효율’뿐만 아니라 민영화의 한복판에 자리잡고 있는 또다른 논란 지점이 ‘합의’다. 정부는 “2000년 12월 여야합의로 전력구조개편안이 통과된 만큼 합의는 이미 끝난 얘기”라고 주장하지만,노조는 “공기업개혁의 처방을 터놓고 논의하기도 전에 정부가 정해진 일정에 발목잡혀 민영화를 밀어붙였다”고 반박한다. 전력산업구조개편이 시작돼 이미 자회사로 분할된 만큼 이를 인정하되 당장 민간에 매각하지 말고,현 체제를 유지하면서 ‘사회적 합의’를 거치자는 요구다. ‘합의’라는 대목에 이르면 민영화 논란은 경제에서 ‘정치’로 옮겨간다.경제학교과서를 펼쳐놓은 채 ‘국가가 공급을 독점해야 하는지, 전력이 공익적인 상품인지’를 놓고 논쟁이 붙고 있지만 사실 핵심은 정치적 성격을 띠고 있다는 것이다. 전력 민영화는 외환위기 직후 공기업이라도 팔아서 부족한 외환을 채워야 한다는 논리가 득세하면서 터져나왔다. 당시 국제자본은 “한전이 국내 산업체와 농촌지역에 싼값에 전력을 공급해온 건 사실상 국제통상질서를 어긴 정부의 보조금”이라며 한전 민영화를 요구했다. 전력산업구조개편 작업이 갑자기 ‘민영화’로 넘어간 건 이 때부터라는 게 노조의 판단이다. 한국개발연구원 임원혁 박사도 “주인 없는 공기업의 비효율은 한전 같은 우량기업한테는 적용되지 않는다”며 “그런 점에서 발전소 매각은 경제학적 관점이 아니라 정치적으로 풀어야 할 대상”이라고 말했다. 나아가 정치적 관점에서 볼 때 이번 파업은 ‘공익의 범위’를 사회적으로 재규정하는 싸움이랄 수 있다. 공공성을 띤 전력을 시장경쟁원리에 내맡길 것인지 아니면 국가가 담당할 영역으로 계속 유지시킬 것인지를 둘러싼 갈등인 것이다. 이는 한국사회의 시스템을 새로 설계하는 데까지 맞물려 있다. 산업연구원 박태주 연구원은 “외국의 사례를 봐도 전력을 시장에 맡길 것인지 국가가 맡을 것인지는 사회세력 간의 투쟁과 갈등의 산물”이라고 말했다. 이런 점에서 지금의 대결국면은 ‘논리싸움’이라기보다 ‘힘의 대결’이란 성격이 더 짙다. 발전소 매각이 가져올 미래에 대해서는 ‘예측’만 난무하고 있다. 노조는 민간자본에 맡겼을 때 △전력요금 폭등 △이윤동기에 따른 공급의 불안정성 △중소기업과 농촌에 대한 인센티브 중단 등을 내세우며 국민경제 전체에 바람직하지 않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정부는 민간에 매각되더라도 국가가 완전 철수하지 않고 공익을 위해 일정한 규제를 유지할 것이며,경쟁이 일어나면 전력요금도 더 낮아질 거라고 반박한다.‘아직 가보지 않은 길’에 대한 추측만 무성한 셈이다. 물론 대안도 하나둘씩 제시되고 있는데,두 가지로 압축된다.하나는 6개 발전자회사로 쪼개진 ‘현실’을 인정하되 지금의 공기업 독점체제에서 ‘공공소유,경쟁체제’로 바꾸자는 안이다. 산업연구원 박태주 박사는 “원래의 한전으로 되돌아가는 것이 현실적인 대안이 아니라면 한전의 자회사 형태인 발전회사를 한전에서 ‘독립된’ 공기업으로 재편해 효율성과 수익성을 높일 수 있다”고 제안했다. 발전부문에서 실질적인 경쟁체제를 갖추고, 민간의 상업적 경영을 도입하면 공익성을 토대로 효율성도 추구할 수 있다는 논리다.
논란 속 대안적 모델도 제기돼
그러나 이 모델이 안고 있는 한계도 지적된다. 김윤자 교수(한신대)는 “발전소를 쪼개 팔더라도 자본주의의 역사적 경향을 볼 때 흡수·합병을 통해 다시 민간독점으로 갈 것”이라며 “전력의 경쟁체제 실현은 애초에 불가능한 환상”이라고 말했다. 국부유출을 막기 위해 외국자본이 아닌 국내자본에 매각하자는 주장 또한 나중에 외국자본으로 다시 넘어갈 수 있다는 점에서 대안은 아니다. 김 교수는 “무늬만 경쟁을 시킬 게 아니라 ‘공공참여적 전문경영체제’를 도입해야 한다”며 “책임전문경영인, 소비자단체, 시민사회단체가 운영에 참여하면 민영화의 근거로 제시해온 비효율과 관료주의를 극복할 수 있다”고 말했다. 전력은 저장이 불가능할 뿐만 아니라 부족하면 이를 대체할 다른 상품이 없다. 전력의 생산과 판매를 누구한테 맡길 것인지에 대한 차분한 논의가 필요한 것도 이 때문이다. 물론 ‘동의’가 배제된 민영화는 실현과정에서 애를 먹을 수밖에 없다. 기간산업 민영화가 장밋빛 미래를 약속할지 아니면 재앙을 낳는 길인지 진지하게 따져볼 ‘시간’이 필요한 때다.
조계완 기자 kyewan@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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