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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격 안 할 테니 다 내놔” 북한 지도부 자극하고 남한엔 ‘무기구매 압력’실리 챙기고 돌아간 부시
“부시는 떠났지만, 그가 남긴 말들은 뇌리에서 쉽게 사그라질 것 같지 않다. 뭔가 더 헝클어진 기분이다. 그의 진짜 의도를 모르겠다. 그가 와서 해답보다는 질문을 더 남긴 것 같다.”
전쟁 우려 좀 씻었지만 성과는 없었다
김대중 대통령도 2월22일 “대통령으로서 정상회담을 많이 해봤지만 이번 한-미정상회담처럼 신경을 써 회담에 임한 적은 없다”며 “잘못돼 한반도의 불행한 사태로 발전되면 엄청난 피해를 입게 된다는 것을 생각해서 전쟁으로 가지 않고 반드시 대화로 해결해야 한다는 게 우리 정부의 확고한 입장이었으며 이것이 흔들림 없이 미국에 전달됐다”고 말했다. 한국 정부가 부시와의 회담 목표가 무엇인지를 고스란히 보여주는 대목이다. 어쨌든 부시가 선제공격을 안 하겠다는 선언으로 한반도 상공의 검은 먹구름은 상당히 가시게 됐다. 하지만 정부 관계자들은 겉으로 회담결과에 만족한다고 말하면서도 착잡한 속내를 숨기지 않고 있다. 곧 닥칠 월드컵이나 각종 선거를 앞둬 시간에 쫓기는 정부로서는 미국의 좀더 전향적인 대북 접근 자세를 원했던 것이다. 북한은 미국의 대북 강경자세가 누그러지지 않는 한 남북관계에도 제동이 걸릴 수밖에 없음을 수시로 밝혀온 터다. 사실 북한으로서는 남북관계를 대미 관계개선의 지렛대로 활용하고자 했다. 하지만 부시의 태도는 정부의 바람을 비켜갔다. 한-미정상회담에 정통한 소식통에 따르면 김 대통령은 주요 고비 때마다 교착상태를 타개하는 데 적지 않은 구실을 해온 미 행정부 고위급 특사 방북을 부시 대통령에게 제안했다. 고위급 특사는 북쪽에서도 은근히 바라던 사안이었다. 부시는 이 제안에 대해 즉각 난색을 표시한 것으로 알려졌다. 또 부시는 공식적인 자리에서 ‘악의 축’과 같은 선정적인 표현사용은 자제했지만 북한 지도부를 자극하는 표현들을 거침없이 쏟아냈다. “북한 정권은 투명하지 않고 주민들의 굶주림을 방치하고 있으며 대량살상무기를 계속 만들고 있다.” “북한이 미국의 대화제안을 수용하고 전세계를 상대로 북한 주민들에게 애정을 갖고 있다고 표현하기 전에는 김정일 국방위원장에 대한 의견을 바꾸지 않을 것이다.” 부시 대통령은 그간 김 위원장을 겨냥해 “북한의 지도자에 대해 약간의 회의를 갖고 있다”거나 “약속 이행을 거부하는 알 수 없는 인물”이라고 표현해왔다.
럼스펠드가 봄바람타고 방한하는 이유
부시가 이번 방문에서 차세대전투기 구매 압력을 넣었는지에 대해서 정부 관계자들은 한결같이 부인하고 있다. 부시가 이 문제와 관련해서 직접, 노골적으로 언급하지 않았다는 얘기였다. 하지만 이 문제와 관련해 간접적인 압력을 받았다는 질문에는 다들 고개를 끄덕인다. 어떤 실무자는 “다 아는 당연한 얘기를 곤란하게 뭘 물어보느냐?”고 핀잔을 주기도 했다. 사실 미국 군수업체인 보잉사로서는 F-15 전투기의 한국 판매가 회사의 사활을 쥐고 있는 문제다. 한국과 구매계약을 체결하게 될 경우 약 4조원(32억달러)의 목돈을 쥐게 되지만, 이것으로 그치는 게 아니다. 한국 정부의 결정을 참고하여 보잉사의 전투기를 사겠다는 나라들이 싱가포르를 비롯해 줄줄이 대기하고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보잉사로서는 미 행정부를 비롯해 한국 로비에 총력을 쏟을 수밖에 없는 처지다. 당연히 군산복합체를 최대 후원자로 등에 업고 있는 부시 행정부로서도 가만히 있을 수가 없다. 상당수 국방 전문가들은 부시가 대북 강경발언을 자제하는 조건으로 F-15 구매를 한국 정부에 강요했을 가능성이 높다고 분석하고 있다. 공교롭게도 도널드 럼스펠드 국방장관은 3월에, 리처드 마이어 합참의장이 4월에 잇따라 서울을 방문할 계획이다. 미 군부 수뇌들이 서울에 총출동하는 셈이다. 이들이 서울을 찾는 때는 한국 정부가 차세대전투기를 최종결정하는 시기와 맞물려 있어 더욱 주목을 끌고 있다. 결과는 좀더 두고볼 일이지만 결국 부시로서는 북한을 공격하지 않겠다는 말 한마디로 한국에 와서 이런저런 실리는 다 챙겨간 꼴이 됐다. 사실 부시가 ‘악의 축’ 발언을 했을 때도 미 행정부가 북한을 실제로 공격하기 위한 치밀한 사전 시나리오를 염두에 두고 한 발언은 아니라는 게 전문가들의 견해다. 박건영 가톨릭대 교수는 “악의 축은 북한 공격 시나리오와는 원래부터 무관했다. 이 발언은 물론 위험스런 북한에 대한 경고를 담고 있지만, 군사외적 목적도 포함하고 있었다고 판단된다”고 말했다. 그는 “중간선거를 앞두고 9·11 테러 이후 식어갈 수 있는 미국인들의 애국심 유지, 엔론 스캔들을 부시 정부 경제정책 실책의 상징으로 선거쟁점화하려는 민주당의 전략에 대한 대응, 미사일 방어 및 국방부 대폭증액을 정당화하기 위한 목적, 이라크·이란과 함께 북한을 포함시킴으로써 문명충돌론적 시비에 휘말리는 것을 예방, 한국에 대한 무기판매 목적 등이 악의 축 발언 뒤에 숨겨져 있는 것 같다”고 분석했다. 그래서 일부 전문가는 한국 정부로서는 부시 발언에 지나치게 민감하게 대응하는 바람에 약점만 잡혀 결국 미국이 테러와의 전쟁을 명분으로 내건 이런저런 요구를 고스란히 들어준 것 아니냐는 해석도 내놓고 있다.
북미대화 전에 남북대화 숨통 트자
북한은 예상대로 미국의 대화제의를 공식적으로 거부했다. 북한은 22일 외무성 대변인 담화를 통해 부시 대통령이 ‘최고수뇌부’(김정일 국방위원장)와 북한체제를 악랄하게 중상 모독했다고 비난하고 “우리 체제에 대한 부시의 망발은 그 체제의 바탕을 이루고 있는 우리 인민의 민족적 감정에 대한 모독이며, 우리와의 대화부정 선언이나 같다”며 북-미간 대화를 거부했다. 북-미대화가 당분간 물건너간 셈이다. 한국 정부도 북-미대화가 시동을 걸기까지는 어느 정도 시간이 걸릴 것으로 보고 우선 남북대화의 숨통을 트는 데 주력할 방침이다. 북한도 마침 청신호를 보내고 있다. 북한은 22일 <평양방송>을 통해 “북남 최고위급으로부터 시작해서 각 정당·사회단체들에 이르기까지 다방면적인 대화와 협상이 진행돼야 한다”고 주장했다. ‘최고위급 대화’란 사실상 남북 정상회담을 가리키는 말이다. 2차 남북정상회담의 성사 가능성은 논외로 치더라도 미국과의 가파른 대치국면에도 불구하고 남쪽과의 적극적인 교류협력 의지를 내비쳤다는 점에서 눈길을 끈다. 북한이 현재의 난국을 남한과의 관계개선을 통해 돌파할 가능성이 높다는 견해가 적지 않다.
임을출 기자 chul@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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