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슈추적 ] 2002년02월20일 제397호 

평준화는 폭풍 속으로

혼란만 가중시킨 수도권 고교 재배정… 도교육청의 안이한 업무진행도 문제

뒤늦게 도착한 경기도판 교육 Y2K.

경기도의 교육전쟁은 컴퓨터 프로그램의 작은 오류에서 비롯되었다. 경기도교육청은 2002년 2월16일 수도권 4개 지역 고교 재배정 결과를 발표하면서 “1차 배정 뒤, 2차 배정을 위해 1차 미배정자의 지망 순위를 재정렬하는 과정에서 프로그램상 문제 때문에 오류가 일어났다”고 애초의 분석을 재확인했다. 그러나 오류가 ‘수정’된 프로그램에 의한 배정결과가 발표된 뒤에도 ‘시스템’은 정상으로 돌아오지 않고 있다. 오히려 배정 방식 자체가 가진 허점들이 속속 드러나면서 ‘교육 Y2K’는 더욱 혼란으로 빠져들고 있다.

깨진 신뢰는 회복되기 어려워


사진/ 경기도 교육청관계자가 항의사태 수습대책을 설명하고 있다. (이정용 기자)


“야, 난 1지망 학교로 바뀌었어!” “어떡해∼. 또 그 학교야….”2002년 2월16일 오전 10시. 경기도 안양의 ㅂ중학교 3학년 여학생 교실에는 희비의 쌍곡선이 교차하고 있었다. “제발 조용히 하라”는 교사의 거듭된 당부에도 아랑곳없이, 배정 통지서를 받아든 아이들은 서로의 ‘안부’를 묻느라 여념이 없었다. 원거리 학교로 재배정된 한 여학생은 “입시가 장난도 아니고… 이런 경우가 어디 있어요?”라고 울음을 터뜨린다. 바로 뒤에 앉은 또다른 아이는 휴대폰으로 “1지망 학교로 배정이 바뀌었다”는 소식을 집에 전하고 있었다.

경기도교육청이 16일 발표한 재배정 결과에 따르면, 대상학생 3만7467명 가운데 7721명(20.6%)의 배정고교가 바뀌었다. 재배정 학생 가운데 5554명(14.8%)은 지난 8일 있었던 원배정 때보다 선지망 순위 학교로 배정됐지만, 나머지 2167명(5.8%)은 후순위 학교로 밀린 것으로 나타났다.

“힘 있는 집 애들 좋은 학교 보내려고 재배정한 거래요.”

“아니야. 빽 좋은 애들 좋은 학교 배정해놓고 프로그램을 돌리다가 잘못된 거래.”

떠다니는 소문들은 아이들의 입을 통해 쏟아졌다. 프로그램 오류로 무작위 추첨의 신뢰가 깨진 자리에 의혹이 들어찬 것이자, 프로그램 오류가 교육이라는 민감한 변수를 만나 숱한 소문을 낳은 것이다. 프로그램 오류는 수정되었지만, 한번 깨어진 신뢰는 좀체 회복되기 힘들어 보였다. 오히려 재배정에서 ‘후순위’로 밀린 학부모들의 불만을 낳았을 뿐이다. 재배정 결과가 나온 지 얼마 지나지 않은 2002년 2월16일 정오. 경기도교육청 앞은 목청을 높이는 학부모들과 울먹이는 학생들로 가득했다. 닫힌 교육청 정문을 방패를 든 전경들이 가로막고 있었다. 학부모들 사이에서는 고함이 터져나왔다.

“문 열어!” “지 자식 아니라고 남의 아이 인생 망쳐도 되는 거야!”

벌써 시위대 한쪽에서는 ‘고교 배정 다시 하라’는 제목의 연대서명지가 돌고 있었다. 일부 격분한 학부모들은 교육청 진입을 위해 승용차로 닫힌 정문을 들이받으려 했고, 또다른 학부모들은 정문을 넘어들어가다 막아선 전경과 몸싸움을 일으키기도 했다. 온갖 승강이 끝에 오후 3시, 결국 학부모들의 압력에 밀린 도교육청은 정문봉쇄를 풀었다. 학부모 김정숙(42·수원 영통)씨는 강당에 들어서자마자 마이크를 잡고 의문을 토해냈다.

“수원 권선구에 사는 우리 아이는 1시간 넘게 걸리는 팔달구 학교로 가고, 팔달구 아이는 우리집 앞 학교로 배정받았어요. 이게 무슨 근거리 배정입니까? 다 무효입니다!”

이처럼 학부모들의 불만은 ‘원거리 배정’에 대한 항의로 터져나온다. 도교육청이 애초에 약속한 ‘근거리 배정’ 약속을 지키지 못했다는 것이다. 도교육청은 이번 평준화 정책을 시행하면서 두 가지 원칙을 내세웠다. 학생의 학교 선택권을 보장하면서 근거리 배정도 하겠다는 약속이었다. 학생의 선택권은 우선 지망 순위에 따라 지역 내에서 무작위 배정하는 1차 배정으로, 근거리 배정은 각 시 안에서 나눈 구역 내 추첨인 2차 배정으로 실현하겠다는 계획이었다.

특정 학교 기피 심리도 겹쳐


사진/ 재배정 결과발표 첫날부터 벌어진 학부모 농성사태는 좀체 수습될 기미를 보이지 않는다. (이정용 기자)


하지만 고등학교의 수용능력에 비해 학생 수가 넘치는 몇개의 구역에서는 원거리 배정자들이 생길 수밖에 없는 형편. 불가피하게 원거리 배정자들이 발생할 수밖에 없지만, 컴퓨터 프로그램 오류로 형평성에 대한 신뢰가 깨져나간 상황에서 이들은 자신을 ‘희생양’으로 여기게 되었다. 더구나 프로그램 오류뿐 아니라 배정 프로그램이 정상작동한 뒤에도 근거리 배정원칙이 충분히 지켜지지 않았다는 게 학부모들의 주장이다. 수원시 영통에 사는 김수영(45)씨의 하소연이다.

“아이들이 넘쳐서 타구역으로 밀려난 건 수긍할 수 있어요. 하지만 동수원 끝에서 북수원 끝으로 배정하는 건 뭡니까? 타구역에 배정되더라도 가급적 가까운 곳으로 해주겠다는 약속은 전혀 지켜지지 않았어요.”

원거리 배정자들은 16일 발표된 재배정에 한 가닥 희망을 걸었다. 하지만 이 기대마저도 무너져내리자 분노가 더욱 솟구쳤다. 마지막 기대가 무너지면서 배정 프로그램에 대한 의혹은 총체적 불신으로 이어졌다. 안양의 김선주씨는 “재배정의 공정성도 믿을 수 없다”고 잘라 말했다. “안양 평촌에서는 구역 내에 배정받은 아이들은 거의 바뀌지 않았어요. 타구역으로 밀려난 아이들만 조금 바뀌었을 뿐이죠. 다 바꾸면 항의가 거셀 것 같으니까 끄트머리 아이들만 조금 바꾼 거예요. 첫 번째 배정의 전면 백지화 약속이 전혀 지켜지지 않았어요.”

불만은 원거리 배정으로 드러나지만, 이면에는 특정 학교에 대한 기피도 드리워져 있다. 안양권, 고양, 성남의 분당지역은 올해가 평준화를 실시한 첫해. 그만큼 학교의 서열화가 아직 공고하다. 안양의 ㅈ고, 고양의 ㄱ고, 성남의 ㄴ고 등이 평준화 이전에 학생들을 따로 뽑아온 특수지 ‘기피학교’로 꼽힌다. 더구나 진념 경제 부총리의 발언 등을 통해 부각된 평준화 폐지 논의는 학부모들을 더욱 불안하게 한다.

예전의 특수지 학교였던 안양의 ㅈ고에 배정된 학부모 김용욱(46)씨는 한숨부터 내뱉는다. “어제도 심야토론에서 평준화를 폐지해야 할 것인지에 관한 찬반토론을 하더군요. 만약 내년이라도 평준화가 폐지된다면, 이른바 ‘전수학교’에 배정받은 우리애는 어떻게 합니까? 다들 우리애가 공부 못해서 그 학교 간 줄 알 거 아닙니까.”

재배정에 대한 불만은 평준화 제도 자체에 대한 회의로 번진다. 기피학교에 배정받은 학부모들은 “내 자식이 공부 못해서 그 학교에 갔다면 모르겠지만, 이런 방식으로는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다”고 입을 모은다. 심지어 “평준화 취지를 살리려고 공부 잘하는 애들을 일부러 그런 학교에 보냈다”는 억측까지 난무하는 형편이다.

예비소집 불참사태 속출

전국교직원노동조합 경기도지부 박석균 사무국장은 “도교육청의 근무기강 해이가 불러온 예고된 사고”라고 지적했다. 도교육청은 지난해부터 각종 인사청탁 비리와 학교시설 관련 비리에 연루돼왔다. ‘전교조 경기지부 고교입시평준화 추진위원회’ 이성 위원장(38·군포고 교사)은 “도교육청은 평준화 추진 과정에서 시민단체들의 의견수렴에 소극적이었다”면서 “마지못해 추진하던 반쪽짜리 평준화가 문제를 일으킨 것”이라고 지적했다.

충분한 준비없이 진행된 복잡한 입시제도가 문제를 불러왔다는 것이다. 1월15일 배정작업을 끝내고 2월8일 발표를 하기까지 검산작업 한번 제대로 이뤄지지 않았다. 재배정 작업은 2월10일 시작돼 일주일 만에 결과 발표까지 끝났다. 이 교사는 “겉으로는 단순한 전산 오류로 보이지만 꼼꼼히 따져보면 분명 인재”라고 강조했다.

원거리 배정 학부모들의 항의는 사흘째 도교육청 강당 점거농성으로 이어지며 점점 거세지고 있다. 농성은 2월18일 실시된 신입생 예비소집 무더기 불참 사태로 나타났다. 성남시교육청은 18일 특수지 고교였던 5개 고교 가운데 ‘기피학교’로 불리는 4개 학교에 대한 예비소집 참가현황을 잠정집계한 결과, 전체 신입생의 26%에 달하는 295명이 불참했다고 밝혔다. 성남뿐 아니라 고양시 덕양구 ㄴ고교의 신입생 269명 가운데 14명이 예비소집에 참석하지 않는 등 경기도 곳곳에서 예비소집 불참사태가 벌어졌다.

혼란이 커지고 있는 가운데 도교육청은 18일 원거리 배정에 따른 불편 해소를 전제로 한 전학을 허용하기로 했다. 애초의 재배정 불가 입장에서 한발 물러선 결정이다. 18일 조인성 교육감도 학부모들의 요구에 따라 사퇴했다. 일단 사태는 도교육청이 학부모의 의견을 수렴하는 방향으로 흐르고 있다. 그러나 서울과 인천지역에서도 고교 원거리 배정에 대한 항의가 잇따르고 있다. 경기도발 교육 Y2K가 일으킨 파문이 얼마나 이어질지 예측하기 어려운 형편이다. 이런 식으로 가다간 근거리 ‘기피학교’에 배정된 학부모들의 불만도 폭발할지 모른다. 우리 사회의 ‘교육’은 그만큼 파괴력이 크다.

신윤동욱 기자 syuk@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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