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슈추적 ] 2002년02월06일 제396호 

시계는 화재신고 20분 전에 섰다

군산시 개복동 유흥주점 화재현장에서…노예매춘으로 고통받는 여성들의 삶과 죽음


사진/ 15명의 사상자를 낸 개복동 화재사건은 감금·노예매춘의 실상을 드러낸 16개월 전 대명동 참사의 복사판이었다. 경찰서·소방서·시청등 행정당국이 합동으로 만든 사후대책위원회는 면피용 겉치례일 뿐이다.


2002년 1월29일 낮, 점심식사 도중 휴대전화가 울렸다. 기자실이었다. “군산시 개복동 유흥주점에서 불이 났는데 희생자가 많다”는 다급한 목소리가 귓전을 때렸다. 머리 속에는 정확히 16개월 전의 장면이 오버랩됐다. 그것은 경험에서 나온 추론과정일 텐데, 마치 직관에서 비롯된 것처럼 순간적으로 이뤄졌다. 그만큼 2000년 전북 군산시 대명동 ‘쉬파리골목’ 매매춘업소 화재사건은 오랫동안 나의 무의식에 똬리를 틀고 있었던 건지도 모른다.

서둘러 상황을 확인한 뒤 국도 26호선을 달렸다. 대명동 사건 때도 수십 차례 다녔던 전주-군산간 왕복 100km를 같은 이유로 다시 가야만 하는, 인정하기 싫은 현실이 서글픔으로 다가왔다. 군산역 앞 고가도로를 지나면서 서글픔은 좀더 구체화됐다. 오른쪽으로 ‘쉬파리골목’이 있을 것이었다. 1km쯤 더 차를 몰고 가자 개복파출소가 눈에 들어왔고, 파출소에서 50m 떨어진 곳에 화재현장이 있었다.

여종업원들이 침착하지 못했다?

화재현장에서는 16개월 전 현장과 다른 점이 한 가지 발견됐다. 경찰은 이미 통제선을 설치해놓고 일반인의 출입을 막고 있었다. 현장통제가 삼엄했고 긴장감이 도는 게 인상적이었다. 그러나 그런 변화는 화재 희생자나 유족들이 아닌 경찰 자신을 위한 것으로 보였다. 대명동 화재 당시 현장 확보를 제대로 못한 경찰은 유족들이 발견한 일기장이 언론에 공개돼 곤욕을 치러야 했다. 변화는 그것으로 끝이었다. 그 밖에 달라진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사건은 마치 대명동 사건을 그대로 복사한 것 같았다.

현장확보와 실제업주 이아무개(38)씨를 잡는 데만 매달리던 경찰은 진화 직후 인근 업소 종업원들이 삼삼오오 골목을 빠져나가는 모습을 보면서도 제지하지 못했고, 다른 업소를 수색하는 적극성도 보이지 않았다. 강근호 군산시장은 사고직후인 이날 오후 “여종업원들이 침착하지 못해서 사상자가 많았다”며 대형참사의 원인을 피해자들에게 돌렸다. 강 시장의 말은 유족들의 분노를 자극했고, 1월31일 밤늦게 합동분향소를 찾은 강 시장은 일부 성난 유족의 거센 항의를 받고 도망치듯 분향소를 빠져 나와야 했다.

강 시장의 발언은 며칠 뒤 성급한 예단으로 드러났다. “쇠창살은 철문으로, 자물쇠는 이중 잠금장치로….” 12명의 사망자 등 모두 15명의 사상자를 낸 개복동 화재사건은 대명동 사건 때보다 더 철저하고 지능적인 인권유린 현장을 세상에 노출시켰다. 업주들은 단속을 피해 더욱 교묘하게 피해자들을 감금·감시했고, 사고 재발을 막겠다고 밝힌 경찰과 소방서, 시청 등 관계당국은 이를 제대로 알아채지 못했다.

사고발생 첫날 살펴본 화재현장도 이런 사실을 그대로 뒷받침하고 있었다. 불이난 곳은 단층 건물인 ‘아방궁’과 2층 건물인 ‘대가’. 발화지점인 아방궁 출입구와 내부는 거의 불에 타 뼈대만 남아 있었고, 대가는 출입구쪽만 그을어 있었다. 화재진압 때 뿌린 물에 사방은 모두 젖어 있었다. 축축히 젖은 손가방이 보였다. 열어보았더니 이미 신분증이나 연락처, 메모 등은 남아 있지 않은 채 동전과 몇장의 지폐만 있었다. 경찰이 모두 수거해간 것 같았다.

5개의 방이 있는 1층을 벗어나 2층으로 오르는 계단으로 향했다. 두 걸음쯤 걸었을까. 바닥에 나뒹굴고 있는 조그만 탁상시계가 발 밑에서 걸렸다. 시계바늘은 11시32분에 정확히 멈춰져 있었다. 11시50께 화재가 신고된 점을 감안하면 사상자들이 불길과 연기를 피해 달아나던 절박한 상황에서 정지했을 것이다. 순간 희생자들이 살기 위해 몸부림쳤을 상황이 악몽처럼 떠올랐다.

2층은 육중한 철문이 막고 있었다. 희생자들은 모두 이곳에서 마지막까지 생존을 위해 몸부림쳤을 것이다. 경찰은 이 철문 앞 계단에서 열쇠꾸러미가 발견됐다고 밝혔다. 문만 잠기지 않았어도 살 수 있었다는 얘기다. 2층으로 올라갈 때는 계단쪽에서 열쇠로 열어야 하는 구조였고, 1층 출입문도 밖에서 열고 잠글 수 있는 구조였다. 1층이 주공간이었다는 점을 감안하면, 업소가 문을 열지 않은 화재발생 시간에 종업원들이 바깥이나 2층 어디로도 맘대로 갈 수 없는 감금구조에 있었음을 보여주는 것이었다.

종이학, 보험증서, 처방전…


사진/ 화재현장에서 발견된 일기장.


철문을 지나니 색종이로 접은 종이학 수천 마리가 흐트러져 있는 모습이 맨 처음 눈에 들어왔다. 나중에 경찰이 공개한 편지를 읽다가 안 사실이지만 숨진 김아무개(28)씨의 것으로 추정됐다. 그를 아는 오빠가 ‘귀여운 악마에게’라는 제목으로 2000년 김씨에게 보낸 편지에는 이렇게 쓰여 있다. “요즘도 종이학 접고 있니. 난 네가 종이학을 한 마리 한 마리 접으면서 무슨 생각을 할까 하고 생각을 해. 아마도 그건 네가 현재 이룰 수 없는 네 꿈을 종이학에 실어 날려 올리는 것 아닌지 하고 말야….”

6개의 쪽방이 있는 2층은 유흥주점이 아닌 일반주택 용도로 허가난 곳이다. 방 안 쓰레기통에서는 매매춘이 이뤄졌음을 보여주는 쓰다 버린 피임기구와 화장지 등이 발견됐다. 2층의 방문은 안쪽에 열쇠구멍이 있고 바깥에서 눌러 잠글 수 있도록 문꼭지가 거꾸로 달려 있었다. 감금·강요에 의한 매매춘의 가능성을 보여주는 것이었다. 희생자들은 집단생활을 했던 것으로 보였다. 방에는 신발, 옷가지, 핸드백 등이 차례로 쌓여 있었고, 개인사물함은 찾아볼 수 없었다. 최소한 개인 방이 있었던 대명동 업소와는 달랐다.

아방궁에서는 의사의 처방전이 나왔다. 숨진 주아무개(24)씨의 것이었다. 병원에 확인해보니 술병을 고치는 위장약 계통이었다. 먹기 싫은 술을 돈을 벌기 위해 억지로 마셨을 것이다. 돌아서는데 손전등에 무언가가 비쳤다. 2011년이 만기인 김아무개(27)씨의 보험증서였다. 이곳 생활을 하면서도 생을 포기하지 않으려는 몸짓으로 느껴졌다. 나중에 보험사에 연락해보니 지난해 8월 효력이 정지됐다고 한다. 김씨는 희생자 명단에는 없는 인물로 지난해 가을 이후 직업소개소를 통해 다른 곳으로 넘겨졌을지도 모른다. 그는 화재소식을 듣고 어떤 심경이었을까.

이번 사건은 차용증과 현금보관각서 등이 발견돼 파문이 더 증폭되기도 했다. 차용증에는 함께 근무하는 여종업원을 연대보증인으로 세운 것으로 나타나, 종업원끼리 서로를 감시하도록 한 것으로 드러났다. 차용증에는 “차용금 상환 위반시에는 구직을 미끼로 금전을 사취한 고의적 취업사기로 인정하며 민·형사상의 모든 책임문제 일체를 감수하겠습니다”라고 쓰여 있었다.

이번 화재로 자식을 잃은 한 어머니는 “대명동 화재사건 당시 뉴스가 나올 때 수년 전에 집을 나간 내 딸이 혹시 그 명단 속에 들어 있지 않을까 가슴 조이며 텔레비전 화면을 지켜봤다”면서 “이번 설날에는 혹시 연락이 오지 않을까 기다렸는데 끔찍한 일을 당하니 정말 기가 막힌다”며 말을 잇지 못했다. 유족 윤아무개(37)씨는 “사고 하루 전날 동생이 전화를 해 ‘유흥업소에 있는데 1500만원 빚을 졌다. 돌아다닐 수도 없다. 구해달라’고 울먹이다 전화를 끊었다”며 울부짖었다.

‘재발 방지’의 공허한 다짐


사진/ 화재현장에서 발견된과 현금보관각서, 차용증. 돈(몸값)을 안 갚을 경우에는 취업사기로 피해여성들이 모든 문제를 감수하도록 돼있고 종업원들을 연대보증인으로 세워 서로를 감시하도록 하고 있다.


2000년 9월30일 치러진 대명동 화재사건 장례식 때 전주고백교회 한상렬(52) 목사는 이렇게 절규했다. “다시는 인권사각지대에서 이런 불행한 일이 재발하지 않도록 하는 게 남은 우리의 몫이다.” 어린 영혼들을 보내면서 다시는 이런 불행하고 안타까운 일이 있어서는 안 된다고, 살아남은 자들은 얼마나 간절하게 약속했던가. 2000년 9월19일 5명의 희생자를 낸 대명동 사건 당시 시민단체의 요구로 군산시, 교육청, 경찰서, 소방서 등은 사후대책위원회를 꾸렸고 재발방지와 불법 인권유린 근절을 다짐했다. 그러나 사후대책위가 한 일은 무엇인지 묻지 않을 수 없다.

대명동 사건에 희생된 20대 꽃다운 여성의 유해를 전북 익산시 미륵산 자락에서 떠나보내면서 했던 다짐은 이제 부끄러움과 미안함을 넘어 지키지 못한 약속과 책임으로 다가온다. 인권사각지대에서 노예매춘을 강요당하는 여성들의 불행이 도대체 언제나 마침표를 찍을 수 있을 것인가. 이번 사건 역시 어쩔 수 없이 시간의 흐름 속에 담구면서 사건과 경찰기자의 질긴 인연을 생각했다. 우리 사회의 모두사 이번 참사에서 공범의식을 갖지 못한다면 그 인연은 앞으로도 계속 되풀이될지 모른다는 어두운 예감이 스쳤다.

군산=박임근 기자/ 한겨레 민권사회2부 pik007@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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