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기사섹션 : 이슈추적 | 등록 2002.01.30(수) 제395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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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슈추적] 물어뜯기는 ‘학벌타파’ 국무회의에서 ‘학력란 폐지’ 주장한 한완상은 과연 돈키호테인가
국무회의장에 ‘돈키호테’가 나타났다. 그가 돌진한 곳은 고색창연한 풍차가 아니다. 너무 강고해 누구도 섣불리 공략하지 못한 거대한 성벽,‘학벌’이 표적이었다.
재계서 먼저 요구한 학력란 폐지
1월22일 국무회의에서 한완상 교육부총리 겸 교육인적자원부 장관은 “공교육 붕괴 및 과열 과외는 일류대 입학이 곧 출세보장이라는 학벌폐해 때문”이라며 입사원서의 학력란 폐지 추진 등 학벌타파 정책을 보고했다. 그러나 곧 궁지에 몰렸다. “케임브리지 등 세계 일류대학을 무조건 나쁘다고 말할 수 있냐”(전윤철 기획예산처장), “가뜩이나 정부의 간섭이 문제되는 마당에 민간기업의 인력채용에 대해 정부가 왈가왈부할 문제는 아니다”(진념 재경부 장관), “불쑥 보고부터 하면 어떻게 하느냐”(이한동 국무총리)…. 30분 가까이 토론이 벌어졌다. 신임 신중식 국정홍보처장은 이례적으로 논란을 상세히 전달했다. 대통령 말씀을 받아쓰던 국무회의장이 토론장으로 변화됐음을 과시하고 싶었을 것이다. 그러나 언론은 ‘왕따’당한 한 장관에게 초점을 맞췄다. 한 장관은 정말 다수 언론의 비판과 동료 장관들의 공박처럼 사전보고도 없이 불쑥 돌출발언을 한 것일까. 학벌의 거대한 성벽을 말 몇 마디로 깨려는 낭만주의자인가. 그는 1월26일 기자에게 “공교육 붕괴의 근본 뿌리가 학벌문화에 있다는 확고한 신념을 갖고 오랫동안 체계적으로 준비했다. 또 충분한 사전절차를 밟아 국무회의에 정식 안건으로 보고했다”면서 “불쑥 했다는 비판은 사실과 다르다”고 말했다. 교육부 직원들도 “억울하다”고 입을 모은다. “언론이 집중 공격하는 학력란 철폐는 교육부의 학벌타파 방안 중 극히 일부다. 더욱이 파장을 우려해 재계와 상당 기간 논의했다. 앞으로도 전경련 등과 협의해 결정하자는 취지의 보고였다. 그 과정은 무시한 채 마구 물어뜯고 있다.”(교육부 한 고위간부) 도대체 무슨 사연이 있는 것일까. 교육부 관계자들 얘기를 종합하면 억울할 법도 하다. 지난 1년 가까이 ‘학벌타파’를 화두로 부여잡고 나름의 공을 들여온 때문이다. 한 장관이 학벌타파론을 처음 꺼낸 것은 지난해 4월 중순께. 교육부 간부들에게 전문기관에 학벌타파 방안 연구를 의뢰하고 대책을 마련하라는 지시가 떨어졌다. 근본 수술이 시작된 것. 교육부 학교정책기획팀에 전담반도 꾸려졌다. 고심의 결과였다. 한 장관은 그해 3월17일 사회문제로 떠오른 공교육 위기론 해소를 위해 교육여건, 교수·학습방법, 교원의 질 향상 등 3대 핵심 대책을 대통령에게 보고했다. 그러나 7조원에 이르는 사교육비 논란이 불거지면서 공교육 부실에 대한 비판여론은 더욱 고조됐다. 그는 결국 부실의 뿌리는 일류대 간판 하나면 평생이 보장되는 학벌주의적 사회풍조에 있다는 결론에 이른다. “학벌주의=공교육 붕괴, 사교육 창궐”, “학벌타파=공교육 정상화”라는 확신을 갖게 된 것. 5월18일, 민주당과의 당정회의에서 학벌타파를 처음 공론화한다. “공교육 활성화 대책”을 주문한 당직자들에게 그는 “공교육 개선을 위해서는 특정대 학벌주의를 범국민적으로 타파해야 한다”는 뜻밖의 주장을 펼쳤다. 이후 교육부는 8월과 10월 전경련, 삼성, LG, 두산 등 재계의 인사 담당자와 한국개발원, 한국교육개발원 등 전문연구기관이 참여하는 전문가협의회를 열어 학벌타파 방안을 공동 연구했다. 공개세미나와 학벌타파 표어 공모전까지 열렸다. 한 장관은 지난 9월 김각중 전경련 회장 등 재계 대표자들까지 직접 만나는 열성을 보였다. 그리고 10월3일 ‘학벌문화 타파 정책 추진’ 의지를 공개 천명하고, 11월27일 구체적인 추진 정책이 완성됐다. △‘학벌문화 타파 시범 중·고교’ 지정 △자격증과 경력 중심의 다양한 인증제도 마련 △능력위주 상시채용 △채용 승진에서 지방대 차별 금지 △학력간 임금격차 해소 등이 핵심. 전경련 등 경제5단체장과 만나 협조를 요청하고 노사정위원회에 안건으로 상정하겠다는 내용도 포함됐다. 이 가운데 시범학교 지정, 학벌피해 및 극복사례 공모전은 이미 실천에 들어갔다. 파문을 우려해 나름대로 신중하게 접근한 셈이다.최근 한 장관의 조급증과 한건주의를 비판하는 표적이 된 학력란 폐지 주장도 여론수렴 과정에서 재계쪽에서 먼저 요구했다는 설명이다. 이영만 교육부 학교정책기획팀장은 “8월, 10월 두 차례 토론과정에서 기업쪽에서 ‘입사 뒤 실무에 필요한 재교육을 시키는 데 비용 낭비가 심해 기업이 국제경쟁력을 갖추는 데 한계가 있다’면서 ‘입사원서에 학력란을 폐지하고 대신 실무에 필요한 전문 기능을 인증하는 제도적 장치를 마련해 달라’고 아이디어를 냈다”고 말했다. 기업에서 필요한 실무능력만 공증되면 고졸, 대졸 여부만 표기하고 학교이름은 명시하지 않겠다는 구체적 방안까지 제안됐다고 덧붙였다.
전교조 등 시민·사회단체 “적극 환영”
한 장관의 국무회의 발언 파문은 우리 사회의 깊은 골을 다시 확인시키고 있다. 대다수 언론은 한 장관을 마구 두들겨댄다. “학벌타파 필요성에는 공감한다”면서도 “공허해보인다”, “대학의 하향평준화를 초래할 수 있다”, “불쑥 제기했다”는 말로 성급함을 꾸짖는다. 원조보수를 자임해온 김용갑 의원(한나라당)은 한 장관의 ‘학력타파론’을 “사회주의적 발상”이라고 공박하며 빨간색까지 덧칠하고 있다. 그러나 교육 관련 시민·사회단체는 오히려 ‘학벌타파 운동’을 선언하고 나섰다. 전교조는 “정부는 학력란 폐지를 적극 수용·시행하라”고 요구했다. 학벌없는사회만들기(대표 정영섭)와 서초·강남교육시민연대(대표 김정명신)는 1월24일 학력란 폐지 시민운동을 벌이겠다고 선언했다. 1월26일 오후, 이들 단체들은 긴급대책회의까지 열었다. 한 장관과 면담을 통해 학벌타파 정책에 힘을 실어주고, 2월20, 21일 ‘학력란 폐지 왜 필요한가’라는 주제의 토론회를 여는 등 여론확산 작업에 나서기로 했다. 이공훈 학벌없는사회만들기 운영위원은 “거듭되는 교육개혁 실패는 한국사회를 아직 봉건적으로 규정짓는 학벌타파 문제에 대해 정면으로 해결책을 제시하지 못한 채 입시제도 등 부분적인 대책만 내놓았기 때문”이라며 “한 장관의 발언은 학벌이라는 성역을 깨는 기폭제가 될 것”이라고 말했다. 파문의 주역인 한 장관 역시 뜻을 굽힐 수 없다고 강조한다. “학벌타파론의 핵심은 대학의 하향평준화가 아니다. 서울대학의 단일 지배주의를 타파하고 대학을 특성화·다양화해 능력을 향상시키자는 것이다. 조용하게, 그러나 더 확실하게 학벌타파 정책을 추진하겠다.” 그의 도전은 돈키호테의 몽상으로 끝날 것인가. 아니면 사교육 열풍을 잠재우고 공교육 정상화의 근본을 다지는 밀알이 될 것인가.
신승근 기자 skshin@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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