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슈추적 ] 2002년01월02일 제391호 

지능적 잡범을 키운 권력?

각종 게이트 수사과정에서 드러난 국가기관의 총체적 부패와 난맥상


사진/ 검찰의 망신살은 어디까지 뻗칠 것인가. 검찰의 얼빠진 수사로 게이트의 핵심인물이 해외로 달아났다.(한겨레)


‘게이트’를 빠져나갈 문이 보이지 않는다. 검찰의 더듬수는 갈수록 가관이다. 해가 바뀌어도 수사는 계속 미로만 헤매고, 검찰은 얼빠진 수사로 망신살까지 사고 있다. 드러나는 범죄사실들도 ‘수법은 악질이되 수준은 잡범’인 것들뿐이다. 수사가 계속될수록 분명하게 드러나는 건 핵심 범죄사실이 아니라 국가기관의 총체적 난맥상이다. 아내 살인범이 대통령을 만나도 아무도 눈치채지 못했고, 도둑 잡으라는 파수꾼들은 오히려 도둑과 눈이 맞았다.

1천만원 현상금은 주인을 못 만나게 됐다. 검찰은 2001년 12월28일 ‘진승현 게이트’의 핵심인물로 지목돼온 전 MCI코리아 회장 김재환(56)씨가 이미 미국으로 달아난 사실을 확인했다. 검찰은 지난해 11월15일 김씨를 붙잡기 위해 출국금지 조처를 내린 뒤 현상금 1천만원을 내건 터였다. 김씨가 한국을 빠져나간 건 하루 전인 11월14일. 그러나 검찰은 한달 보름이 넘도록 이런 사실을 까맣게 모른 채, 그의 검거를 장담해왔다. 그런 검찰의 ‘코미디’를 즐기며, 김씨는 미국에서 웃었을까.

검찰은 김재환씨 해외도피를 방조했나

검찰은 김씨의 해외도피 사실을 알지 못한 사정을 해명하느라 진땀을 흘리고 있다. 출입국관리소의 출국자 명단은 출국 이틀 뒤에야 전산입력되기 때문에 출국금지 조처를 내릴 당시에는 확인할 수 없었고, 일단 출국금지 조처가 내려지면 출입국관리소는 출국금지자가 이미 출국했는지를 확인하지 않기 때문에 그뒤로도 김씨의 출국사실을 알 수 없었다는 것이다. 검찰 설명대로라면 김씨는 기가 막힌 ‘시간차 공격’으로 한국을 빠져나간 셈이다.

그러나 현상금까지 내걸고 김씨를 찾으면서도 같은 법무부 산하 기관끼리 추가확인 한번 하지 않았다는 건 이해하기 어려운 대목이다. 결국 김씨의 출국 사실은 그의 집을 압수수색하다가 김씨가 11월14일 인천국제공항에서 신용카드를 사용한 것이 확인되면서 밝혀졌다. 검찰은 뒤늦게 외무부와 미국 당국에 김씨 여권과 비자 연장을 불허하도록 요청하는 한편 인터폴에 협조를 구하고 있다. 그러나 검찰 관계자는 “김씨가 LA쪽에 있는 것으로 추정하지만, 거기 있으리라는 보장은 없다”며 그의 신병확보가 쉽지 않음을 내비쳤다.

이에 따라 수사는 난관에 부딪혔다. 김씨는 2000년 7월 김은성 전 국정원 2차장(구속) 소개로 진승현씨 소유의 MCI코리아 회장에 취임한 뒤 정·관계 로비에 깊숙이 간여한 것으로 알려진 인물이다. 2000년 검찰 수사에서는 “민주당 김방림 의원에게 5천만원을 건넸다”는 진술까지 했다. 검찰은 김 의원을 소환하고도 김 의원이 혐의 사실을 완강히 부인하는 바람에 아무것도 입증하지 못한 채 돌려보내야 했다. 김씨가 없는 상태에서 김 의원의 혐의를 입증할 방법이 없다는 게 검찰의 하소연이다.

김씨의 해외도피로 진승현씨의 정·관계 로비 내용이 기록된 것으로 알려진 이른바 ‘진승현 리스트’ 수사도 답보 상태에 빠지고 말았다. 검찰은 최근 구속된 김은성 전 차장 수사를 통해 “김씨가 진승현 리스트를 작성해 보관하고 있다는 얘기를 듣고 리스트를 입수하려고 김씨와 옥신각신했다”는 진술을 받아냈으나, 닭 쫓던 개 지붕 쳐다보는 꼴이 되고 말았다. 결국 진승현 게이트의 핵심이라 할 수 있는 정·관계 로비 의혹 수사는 언제가 될지 모를 김씨의 귀국에 목을 맬 수밖에 없게 됐다.

진승현 게이트 수사가 벽에 부딪혔다면 윤태식 게이트 수사는 그나마 개미구멍을 파들어가고 있다. 그러나 그 성과의 내용을 들여다보면 부패공화국의 개미군단을 보듯 가관이다. 윤씨 소유의 벤처회사 ‘패스21’ 차명주주 리스트를 통해 드러나고 있는 비리 당사자들은 일단 공무원이 주류를 이루고 있다. 패스21 사업과 연관지어볼 수 있는 부처에서는 예외없이 담당 공무원들이 윤씨로부터 ‘주식로비’를 받은 것으로 드러나고 있다.

청와대·국정원도 개입… 하위직 공무원 제물로


사진/ 진승현 게이트의 핵심인물로 검찰의 수사망을 피해 해외도피에 '성공'한 전 MCI코리아 회장 김재환씨.(한겨레 김봉규 기자)


지금까지 윤씨의 공짜 주식을 받은 것으로 드러난 공무원들은 모두 4급 이하의 중·하위직들이다. 중소기업청 서아무개 과장은 2000년 1월 포스코빌딩에서 대통령이 참석한 가운데 열린 ‘새천년 벤처기업인과의 만남’ 행사에 패스21을 전시업체로 선정해주는 등의 대가로 윤씨로부터 주식 400주(8천만원 상당)를 받은 혐의로 입건됐다. 철도청과 서울시 지하철공사 전·현직 간부 3명도 철도와 지하철 역사의 지문인식시스템 도입을 대가로 주식 200주씩을 받은 것으로 드러났다.

윤씨의 주식로비는 청와대까지 뻗쳤다. 청와대 경호실 4급 직원인 이아무개씨는 패스21 주식 200주와 함께 현금 1500만원을 받은 혐의가 드러났다. 경비·검측 업무를 맡고 있던 이씨는 2000년 1월 말 패스21의 생체인식시스템이 적용된 경호장비 구입 청탁과 함께 금품을 받은 혐의를 받고 있다. 그나마 경호장비 구입은 그의 업무와는 아무런 관련이 없는 일이다.

그러나 경찰청 직원들의 사기성 갈취 행태에 비하면 이들은 점잖은 편이었다. 윤씨의 수지 김 살인 혐의를 재수사하다 이무영 당시 경찰청장(구속) 지시로 내사를 중단한 경찰청 외사분실 직원 지아무개 경위와 김아무개 경사는 내사 중단 한달 뒤인 2000년 3월 윤씨를 불러내 “수사가 종결될 것 같다”며 패스21 주식 2천주씩을 가로챘다. 그들은 윤씨를 만나기 전에 미리 형의 장인이나 처남 등 명의를 빌릴 사람들 이름까지 준비하는 치밀함을 보인 것으로 드러났다.

현재 윤씨의 주식을 받았거나 가로챈 것으로 드러난 대상이 하위직 공무원에 집중돼 있는 까닭은 무엇일까. 검찰 안팎에서는 “윤씨가 실속있는 실무진을 주로 공략했기 때문”이라는 분석이 나오고 있다. 그러나 상식적으로 윤씨가 고위층을 빼놓고 실무자들에게만 로비를 했을 가능성은 매우 낮다. 검찰 수사가 핵심 권력기관의 고위층과 정치권쪽으로 확대돼야 한다는 지적이 나오는 것도 이 때문이다.

패스21 주변에서는 “어느 장관이 생체인식시스템 선정 대가로 주식 2만주를 액면가로 1억원에 넘기도록 요구했다”는 얘기가 구체적으로 흘러나오고 있다. 당시 패스21 주식이 장외시장에서 80만∼120만원에 거래됐던 점으로 미뤄볼 때 액면가로 2만주를 샀다면 200억원대의 시세차익을 얻을 수 있게 된다. 그러나 이 장관이 실제 주식을 액면가로 넘겨받았는지 여부는 알려지지 않고 있다.

수지 김 살해사건 이후 윤씨의 ‘관리’를 담당해왔던 전 국정원 직원 김아무개(54)씨가 패스21 자회사인 ‘바이오패스’ 이사로 등재된 사실이 드러나면서 국정원이 윤태식 게이트와 모종의 조직적 관계를 맺어왔을 것이라는 의혹도 한층 증폭되고 있다. 김씨는 수지 김 피살사건 은폐과정에서 윤씨를 밀착 감시해왔으며, 98년 퇴직 뒤 바이오패스 지분을 받고 패스21 사업을 지원해오다 윤씨가 구속되자 잠적해버렸다.

김씨가 패스21 이권과 관련해 국정원 직원들과 윤씨 사이에서 다리 노릇을 했을 가능성이 매우 높은 것으로 검찰은 보고 있다. 그러나 불투명한 윤씨의 패스21 설립과 생체인식시스템 기술개발 과정에 국정원이 개입했을 가능성이 제기되고 있는 것을 감안하면, 김씨가 국정원의 패스21 파견 관리인 노릇을 했을 수도 있다는 게 검찰 안팎의 추정이다. 패스21을 둘러싼 국정원과 윤씨의 관계에 대한 의혹도 잠적한 김씨의 신병이 확보되기 전에는 풀릴 가능성이 없어보인다.

철저한 진상규명 없으면 레임덕 가속화


사진/ '주식로비'를 벌인 패스21 윤태식 대표가 김대중 대통령에게 생체인식시스템을 설명하고 있다.(한겨레)


윤씨가 김대중 대통령을 직접 만나 생체인식시스템에 대해 두 차례나 설명했던 것도 국정원과 윤씨 사이의 관계를 의심하게 하는 대목이다. 윤씨의 수지 김 살인사건을 조작한 국정원이 김씨가 대통령과 직접 만나는 걸 막지 않았다는 사실 자체가 상식적으로 설명되지 않기 때문이다. 특히 2000년 5월 김 대통령과 니카라과 대통령 만찬에 윤씨가 참석했을 때는 이미 경찰청이 수지 김 사건을 내사하는 중이었던 점을 감안하면 국정원쪽이 이를 묵인했을 가능성은 더욱 커진다.

대통령 장남 김홍일 의원과 차남 김홍업 아태재단 부이사장이 진승현 게이트 때문에 언론에 오르내린 데 이어 김 대통령마저 윤태식 사건과 관련해 구설수에 올라 정권의 레임덕 현상이 급속하게 확산되고 있다는 분석이 나오고 있다. 게이트 수사과정에서 드러나고 있는 국가권력기관들의 총체적인 부패와 난맥상은 분노를 넘어 허탈감을 안겨주고 있다. 검찰의 철저한 진상규명이 없다면 게이트로 문을 연 새해는 게이트로 지는 불행한 한해로 끝날지 모른다.

안영춘 기자 jona@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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