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사섹션 : 이슈추적 | 등록 2001.12.26(수) 제390호 |
[이슈추적] 윤태식과 더러운 커넥션 국정원 비호받은 살인·사기범이 어떻게 벤처기업가로 변신해 고위인사들을 꼬이게 했을까
아내 살해범에서 분단체제 비극의 희생양으로, 방송사 PD에서 사기범으로, 다시 유망 벤처사업가에서 정·관계 로비의혹의 장본인으로. 그가 걸어온 궤적은 극단과 극단을 잇는 변신의 연속이었다. 그것은 상식 수준에서는 불가사의한 것으로 보인다. 진승현·이용호·정현준 등 3대 벤처 게이트에 이어 4대 게이트의 주인공으로 떠오른 윤태식(43·패스21 소유주)씨의 이런 기이한 삶은 개인의 품성이나 운명 탓으로만 돌리기에는 무언가 부족한 게 있어 보인다. 그가 변신을 거듭할 때마다 그의 주변엔 언제나 권력이 있었다는 사실은 그의 굴곡진 삶을 설명하는 정황증거다.
살인사건에서 전혀 다른 사건으로 비화
수지 김 사건이 조작됐다는 사실이 세상에 드러난 것은 사건 발생 14년 만인 2001년 11월 중순의 일이다. 부부싸움 끝에 일어난 단순 살인범죄를 국가 공권력과 범인이 짜고 ‘여간첩 남편 납북기도 사건’으로 조작했다는 게 진상의 내용이었다. 그러나 새롭게 드러난 공안조작 사건에 대해 국민들은 그리 놀라지 않았다. 이성적으로야 ‘국가의 이중살인’으로 규탄할 일이지만, 1987년이라면 얼마든지 일어날 개연성이 있는 사건의 하나쯤으로 여겼기 때문이다. 사건 소재가 남녀간의 문제였다는 것이 그나마 눈길을 끄는 대목이었다. 홍콩 장기체류 자격과 사업자금을 얻으려는 남자와 술집 종업원 출신 여성 사이의 결혼, 홍콩이라는 공간적 배경 등은 통속소설적인 요소를 갖추고 있다. 남편이 아내를 죽이고 북한으로 탈출하기 위해 북한 대사관을 찾아갔다가 실패했다는 대목에서는 활극을 보는 묘미도 없지 않다. 검찰 재수사를 통해 장세동 당시 안기부장이 사건조작을 지휘했다는 사실이 밝혀졌지만, 이 또한 미루어 짐작할 수 있었던 일이다. 정작 국민들을 놀라게 한 건 14년 전의 사건이 아니었다. 경찰이 이미 지난 2000년 1월 홍콩경찰에서 자료를 넘겨받아 사건 조작 혐의를 잡고 수사에 착수했다가 김승일 당시 국정원 대공수사국장의 요청을 받은 이무영 당시 경찰청장이 수사 중단을 지시했다는 사실이다. 두 사람은 이 일로 지난해 12월11일 동시에 구속됐다. 그러나 그것은 윤태식 게이트의 예고편에 불과했다. 검찰이 재수사 결과를 공식 발표한 12월19일, 이 사건은 전혀 다른 국면으로 비화했다. 윤태식씨가 국정원의 비호를 받아 벤처기업을 운영하면서 정치권 인사들에게 금품을 제공한 혐의를 잡고 검찰이 수사에 나섰다는 내용이 알려졌기 때문이다. 검찰이 확인한 사실은 윤씨가 자신의 소유인 벤처기업 패스21 유상증자를 하면서 주주들한테서 받은 주식대금 수십억원을 회사에 입금하지 않고 빼돌린 혐의였다. 검찰은 윤씨의 정확한 횡령액을 파악하기 위해 윤씨와 패스21 임원들을 소환해 조사를 벌이고 있었다. 또 패스21이 유망 벤처기업으로 급성장하는 과정에 지문인식 시스템 국정원 납품설 등 국정원과 정치권 인사들의 비호가 있었다는 첩보를 입수하고 윤씨가 횡령한 회사 돈으로 이들에게 금품로비를 했을 가능성을 알아보고 있는 중이었다. 이미 정치권에는 윤씨의 사업을 도와주고 돈을 받았다는 한나라당과 민주당 의원들의 이름이 구체적으로 나돌고 있었다.
패스21 초고속 성장의 비밀은…
98년 9월 윤씨가 설립한 패스21 주변에는 일찍부터 정·관계의 실력자들이 직간접적으로 관련을 맺고 있었던 것으로 드러났다. 패스21의 초고속 성장과정에 이들이 모종의 구실을 하지 않았겠냐는 의혹을 사고 있는 것이다. 이 회사 지분 51%를 갖고 있는 윤씨는 지난해 4월 이규성 전 재정경제부 장관을 비상근 회장으로 영입한 뒤 자신은 연구원장으로 물러났다. 그러나 윤씨와 가장 가까운 인사는 이 회사 비상임 고문인 김현규 전 의원이다. 윤씨는 패스21 창업 전인 97년에 김 전 의원에게 접근해 지분 참여를 권유한 것으로 밝혀졌다. 이 회사 주식 1만2900주(1.74%)를 보유하고 있는 김 전 의원은 현재 이 회사 비상근 감사로 있다. 김 전 의원은 98년부터 99년까지 청와대 고위인사와 배순훈 당시 정통부 장관을 찾아가 벤처기술 인증 및 지원을 부탁했으나 정통부의 반대로 무산된 것으로 밝혀졌다. 또 한나라당 전·현직 의원들과 민주당 의원 등을 패스21과 연결시키는 구실을 했다. 현재 정계인사 4명이 수백주에서 수천주까지 주식을 보유하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김 전 의원 못지않게 윤씨와 깊은 관련이 있는 것으로 추정되는 인물은 ㅅ신문 현직 사장 김아무개씨 부부다. 패스21 주식 1만9700주(2.64%)를 보유한 김 사장은 98년 자신의 고교 동창인 이종찬 전 국정원장에게 패스21의 지문인식시스템에 대해 보안기술 인증을 부탁한 것으로 밝혀졌다. 이 전 원장은 국정원 직원들에게 지시해 이 시스템의 시연회를 열게 했으며, 패스21은 1년여 뒤 인증을 받아냈다. 또 이규성 전 장관에 따르면, 김 사장은 자신을 패스21 회장에 취임하도록 요청했다. 가구업체를 운영하는 김 사장의 부인 윤아무개씨는 98년 9월 자신의 사무실 가운데 40평을 패스21 사무실로 무상임대해주는 등 윤태식씨의 창업을 적극 지원했으며, 이에 대한 대가로 지분 15%를 받은 것으로 나타났다. 윤씨는 윤태식씨와 중국 상하이에서 만난 게 인연이 되어 패스21 창업에 투자한 것으로 알려졌다. 윤태식 게이트와 관련해 이름이 거론되고 있는 인물들은 하나같이 금품로비를 받았거나 청탁한 사실을 완강하게 부인하고 있다. 또 윤태식씨와 그들 사이에 주식투자 등 사업적 관계 외에 아직 드러난 것이 없다. 검찰도 실명 주주들의 경우 지분 보유현황이나 경위가 쉽게 노출되기 때문에 윤씨 로비문제와 크게 관련돼 있지는 않은 것으로 보고 있다. 설령 윤씨의 금품로비 사실이 드러나더라도 확인된 윤씨의 횡령액수가 20억원 정도여서, 3대 벤처 게이트에 비해 폭발력이 크지 않을 것으로 보고 있다.
차명인들의 정체를 밝혀라
이에 따라 검찰은 팩스21 주주 가운데 차명 주주들이 많다는 사실에 주목하고 있다. 검찰은 패스21 전체 주주 307명 가운데 20%가 넘는 80여명이 여성 이름으로 돼 있고, 상당수가 실명이 아닌 가족과 친인척, 친구 이름을 빌리거나 도용한 단서를 잡고, 차명인들에 대한 조사를 벌여나가고 있다. 누가 어떤 경위로 남의 이름을 빌려 패스21에 투자했는가를 밝히는 일이 윤태식 게이트의 비밀을 풀어줄 열쇠가 될지 모른다. 윤씨의 패스21 설립과정에서는 아직도 풀리지 않은 의문점이 많다. 윤씨는 영화배급사업을 하다 파산한 뒤 94년 방송사 PD 신분증을 위조해 발급받은 신용카드로 수억원을 쓴 혐의로 징역형을 선고받고 96년 7월 출소했다. 그는 출소 뒤에도 위폐감식기 및 대중국 사업 등의 명목으로 주변 사람들을 대상으로 수천만원대의 사기행각을 벌인 것으로 드러났다. 그 사이 혼자 힘으로 최첨단 보안기술인 지문인식시스템을 개발하고 벤처업체 설립을 준비했다는 건 설득력이 떨어진다. 이 때문에 국정원에서 98년 10월 패스21 기술시연회가 열린 점이 눈길을 끈다. 국정원이 87년 수지 김 살인사건 뒤 자신들이 관리해온 살인범의 사업체를 불러 시연회를 열었다는 사실이 납득하기 어려운 대목이다. 검찰도 차명 주주와 관련해 이 대목을 눈여겨보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그 이름 안에는 국민들의 뒤통수를 때리는 매우 놀라운 이름이 들어 있을지도 모르는 일이다. 그러나 그를 둘러싼 갖가지 의혹들이 어디까지 사실로 드러나고 어디까지 거짓으로 드러나든, 끝까지 풀리지 않는 의문 하나는 남아 있을 것 같다. 아내를 살해하고, 공안사건 조작에 참여하고, 잡범 수준의 사기를 저질러온 그가 어느날 하루아침에 유망한 벤처사업가가 돼서 주변에 정·관계 인사들이 모이게 할 수 있는 비밀은 무엇일까. 한국사회 모순은 쉽게 설명되지 않는다.
안영춘 기자 jona@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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