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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한 불우이웃성금 1천만달러 최순영 전 신동아 회장이 카자흐스탄 나자르바예프 대통령에게 준 ‘국제뇌물’의 비밀은?
일순, ‘피고인’으로 불린 60대 사내의 얼굴에 노기와 당혹감이 스쳤다. ‘1천만달러’, ‘정치자금 제공’이란 단어에 사위가 조용해졌다. 방청석은 물론 재판부와 변호인의 시선이 일제히 피고인석으로 쏠렸다. 다음 순간 일그러졌던 표정을 가다듬은 피고인이 검사를 노려보며 쏘아붙였다. “김종은이가 ‘(카자흐스탄) 대통령에게 준다’고 하기에 1천만달러를 줬소. 검사라면, 그 돈을 어떻게 했는지는 김종은이를 불러서 물어보면 될 거 아니요?”
양국 외교문제로 비화될 수 있는 ‘뇌관’
지난 10월26일 오후 4시 조금 넘어, 서울 서초동 서울고법 303호 법정에서 벌어진 풍경이다. 피고인으로 불린 사람은 1억6500만달러 국외재산도피 혐의로 기소된 최순영(62) 전 신동아그룹 회장. 그는 법정에서 해외로 빼돌린 돈의 용처를 놓고 검사와 한바탕 설전을 벌이다 나자르바예프(60) 카자흐스탄 대통령에게 1천만달러를 줬다는, 엄청난 진술을 하고 말았다. 경우에 따라 나자르바예프가 하야하거나 자국에서 처벌받게 될 수도 있고, 한국과 카자흐스탄 양국간 외교문제로 비화할 수도 있는 ‘뇌관’을 건드린 것이다. 1999년 초 한때 세간의 비상한 관심을 불러모았던 ‘최순영 리스트’의 일부가 다시 수면 위로 모습을 드러내는 순간이기도 했다. 여기서 잠시 지난 세월을 거슬러 올라가보자. 1999년 2월11일, 햇살이 퍼지기에는 이른 오전 7시 조금 넘은 시각. 서울 용산구 한남동 최 회장 집에 검찰 수사팀이 들이닥쳤다. 최 회장을 데려간 곳은 서초동 서울지검 청사 10층 특수1부. 밤새 조사를 벌인 검찰은 다음날 오후 1시50분께 구속영장을 청구했다. 혐의는 96년 5월부터 97년 6월 사이 신아원종합무역상사(SDA·사장 김종은)를 통해 조흥은행 등 자신이 대주주로 있는 국내 4개 은행에 허위 수출입 계약서와 선하증권 등을 제시하고 모두 9번에 걸쳐 1억8천만달러의 수출금융을 받은 뒤, 이 가운데 1억6500만달러를 미국령 바하마에 자신이 설립한 페이퍼컴퍼니 ‘스티브영인터내셔날’에 불법 송금했다는 것(특정경제가중처벌법상 국외재산도피) 등이었다. 영장을 서울지법에 청구한 직후 이 수사를 총괄지휘한 김규섭 서울지검 3차장 검사(현 대검찰청 강력부장)는 출입기자들에게 이런 말을 했다. “1억6500만달러는 완전히 위조된 선하증권으로 불법 대출을 받은 것이다. 검찰은 그 돈 일부가 아직 해외에 남아 있다고 보는데, 최 회장은 다 갚았다고 한다. 그런데 (갚았다는) 돈이 엉뚱하게 영국에서 들어오고 해서 같은 돈인지 의심이 간다. 해외에 그대로 남아 있을 가능성이 크다.” 다음날 브리핑에서 잔류 ‘가능성’은 ‘단정’으로 바뀌었다. “1억달러가 들어오고, 6천여만달러가 (해외에) 남았다. 최 회장은 처음에는 ‘다 들어왔다’고 주장했다가, 나중에 (6천여만달러를) ‘손해봤다’고 말을 바꿨다.” 최 전 회장의 10·26 진술은, 그 잔류한 돈의 일부인 1천만달러를 나자르바예프에게 건넸다는 충격적인 것이었다.
김종은과 나자르바예프
그러나 세상에 공개만 안 됐을 뿐, 검찰이 이같은 진술을 확보한 것은 석달 전인 올 7월께. 지난해 국세청의 고발에 따라 또다른 국외재산도피 혐의(앞서 빼돌린 돈을 갚은 것처럼 꾸미려고 1억달러를 더 해외로 불법유출했다는 내용)를 조사하기 위해 최 전 회장을 부른 검찰은 7월23일 조사에서 1천만달러 공여사실을 시인하는 내용의 진술조서를 받아냈다. ‘1천만달러를 나자르바예프에게 줬는데, 정확한 날짜는 잘 모르겠다. 기억이 나지 않는다. 동행했던 김종은이가 알고 있을 것이다.’ 마치 김종은 사장을 통해 1천만달러를 전달한 것처럼 말한 법정 진술과는 달리 피의자신문조서에는 자신이 직접 나자르바예프에게 건넨 것으로 기록돼 있다. 최 회장 조사 직후 검찰은 사실 여부와 당시 정황 등을 확인하기 위해 김종은 전 사장을 사흘 연속 불렀다. 김씨는 기자와의 전화통화에서 “검사님이 다른 부분은 다 가리고 1천만달러와 관련된 최 회장 진술 부분만 보여줬는데, ‘자기(최 회장)가 (나자르바예프한테) 직접 준 것은 사실이지만 날짜 같은 것은 잘 기억이 나지 않으니 김종은을 불러서 물어보라’는 내용이 적혀 있었다”고 전했다. 그러나 검찰은 지난 7월25일 국외재산도피 등 혐의로 최 회장의 사전구속영장을 청구(이 영장은 나중에 기각됐다)하는 과정에서 사건기록에 이 조서를 넣지 않았다. “만일 공개될 경우 외교문제가 생길지 모른다는 우려에서”(검찰 관계자)다. 김씨가 검찰에서도 진술했다는 사건의 전말은 이랬다. 94∼95년 무렵 제원무역(주)이라는, 작은 무역회사를 운영하던 김씨는 카자흐에 각종 잡화를 팔아 쏠쏠한 ‘재미’를 보고 있었다. 당시 옛 소련에서 독립한 지 얼마 되지 않은 카자흐는 석유·금·다이아몬드·구리 등 광산물은 풍부한 반면 생활필수품 등의 공급이 원활하지 않아 한마디로 ‘장사’가 됐다는 것이다. “카자흐를 드나드는 한국 사업가로는 유일한 존재”였던 김씨는 카자흐의 KGB 의장, 대통령 경제고문 등과도 친분을 트게 됐고, 그들의 소개로 결국은 나자르바예프와도 어울리게 된다. 나자르바예프는 95년 5월15일부터 18일까지 나흘간 당시 김영삼 대통령의 초청으로 한국을 공식 방문했는데, 이때 김씨는 나자르바예프의 요청에 따라 한국행 비행기에 동승해 귀국하는 ‘환대’를 받았다. 김씨는 또 16일 한-카 정상회담 뒤 나자르바예프 일행의 제주 방문 때도 동행하며 친분을 과시했다.
‘공식 수입대행업체 지정’ 특혜 누리다
그뒤 카자흐쪽 투자유치단이 한번 더 다녀간 뒤(이때 투자설명회는 공교롭게도 63빌딩에서 열렸다), 이번에는 삼성·현대 등 50여명의 우리쪽 기업 관계자들이 카자흐로 갔다. 그 행렬에 참여했던 최 전 회장은 김씨에게 “나와 함께 무역을 해보지 않겠느냐”는 제안을 한다. 김씨는 “보험업계 3위인 대한생명 회장이 사업을 같이 하자는데 마다할 이유가 없었다”고 회고했다. 그래서 차린 것이 신아원. 신동아에서 ‘신’자와 ‘아’자를, 김씨의 제원무역에서 ‘원’자를 땄다. 신동아그룹 관계자들은 최 전 회장이 답보 내지 정체상태(당시 시장점유율 24∼25%)에 있던 보험업 외에 전망 좋은 사업을 찾다 ‘북방무역’에 눈을 돌렸던 것 같다고 증언한다. 거기에 ‘바람’을 불어넣은 인물은 미국 회계사(AICPA)로 최 회장의 측근이던 고충흡씨. 고씨는 98년 4월 검찰수사가 시작되기 직전 미국으로 달아나 결국 처벌을 피했는데, 최 전 회장에게 수시로 ‘리스크는 크지만, 잘만 하면 떼돈을 벌 수 있다’며 북방무역을 권했다고 한다. 검찰의 공소사실과 1심 판결문의 사실판단 부분을 종합해보면 고씨의 ‘아이디어’, 최 전 회장의 ‘관심’을 현실화해줄 ‘손발’로 김씨가 선택된 셈이다. 최 회장과 고씨의 지시에 따라 김씨가 스티브영인터내셔날에 송금한 돈은 카자흐스탄과 독립국연합(CIS) 내 사하공화국, 루마니아 등지로 빠져나갔다. 김씨는 그뒤 최 전 회장을 수행해 카자흐와 사하공화국 등을 수십번 오갔는데, 카자흐의 수도 알마타에 간 것은 모두 합쳐 15∼20회 정도. 문제의 1천만달러가 전달됐다는 시기는 96년 가을께인 것으로 김씨는 기억하고 있다. “알마타에 가면 자주 묵는 호텔이 세곳이었는데 그중 한곳에 투숙했다. 거기로 당시 카자흐 KGB 의장이던 톡바바예프가 찾아와, 나는 호텔에 놔두고 최 회장과 함께 대통령궁에 들어갔다. 갔다 온 최 회장이 ‘불우이웃돕기 성금을 내면 무역업이 잘되도록 해주겠다’고 해서 1천만달러 성금을 줬다’는 취지의 말을 했던 것 같다.” 그뒤 신아원이 아닌 스티브영인터내셔날이 당시 카자흐스탄 연간 수입액 50억달러어치 가운데 10∼15억달러어치 물량을 공식 수입하는 대행업체로 지정돼 비행기·버스에서 옷·라면까지 수입 판매했다고 한다. 김씨는 “그걸 보면서 ‘내가 껍데기로 이용당하고 있구나’ 생각했다”고 기자에게 털어놓았지만, 아무튼 ‘불우이웃돕기 성금’ 1천만달러가 괴력을 발휘한 셈이다.
돈은 어떤 경로로 전달됐는가
그는 또 ‘상(上)거지’라고 표현할 만큼 빈털터리가 돼 있는 자신의 처지가 가장 유력한 반박증거라고 했다. 김씨는 97년 후반 들어 신아원 지분(최 회장은 자신의 지분(60%)을 차츰 높여갔다)과 권한 행사 등 문제로 최 전 회장과 갈등을 빚다 해임되자 최 회장쪽에 “사업자금으로 10억원을 달라”고 요구했고, 이듬해 4월 최 회장쪽의 고소를 접수한 경찰(용산서 강력반)에 공갈미수 혐의로 구속됐다. “그때는 이 문제가 터지기도 전인데, 내가 1천만달러나 되는 거액을 챙겨놓았다면 맘 편하게 그걸로 새 사업 시작하면 되지 뭐 하러 최 회장한테 겨우 10억원을 달라고 매달렸겠느냐”고 김씨는 반문했다. 그는 “1천만달러나 꼬불쳐놓고 마누라가 칼국수 장사한 돈으로 먹고 살겠느냐”며 눈물마저 글썽였다. 김씨가 이른바 ‘바지사장’이었다는 사실은 검찰 수사과정에서도 드러났다. 한 수사 관계자는 “김종은은 최 전 회장의 ‘손발’로 이용당했을 뿐이고, ‘실제로 얼마가 됐건 돈이 들고 나는 것은 전부 최 회장의 결재를 받아서 했다’고 신동아쪽 경리부장이 진술한 바 있다”고 술회했다. 그러나 최 전 회장이 어떤 ‘경로’를 통해 그 돈을 나자르바예프에게 전달했는지는 밝혀지지 않고 있다. 1천만달러는 미국 지폐 중 최고액권인 100달러로 헤아려도 10만장이나 되는 분량이다. 환전이나 이동이 쉽지 않다. 최 전 회장이 직접 현금을 알마타까지 가져가 건넸을 공산은 크지 않다는 얘기다. 한 검찰 관계자는 이렇게 추정했다. “계좌가 이용됐을 것이다. 어차피 그런 식의 거래는 현금으로는 부담스럽다. 보통은 받는 쪽이 어느 나라, 어느 은행의 어느 계좌, 이렇게 일러주면 주는 쪽이 지정된 계좌에 보내준다. 그게 가장 흔한 수법이다.” 98년 당시 검찰은 최 전 회장이 스위스 은행에 자신의 계좌를 갖고 있는 사실을 확인했었다. 법 해석에서 논란의 여지가 남지만, 어떤 형태로든 1천만달러를 전달한 사실이 입증된다면 최 전 회장은 뇌물공여나 배임증재 등의 혐의로 추가기소될 수 있다. 그러나 가능성은 낮다. 무엇보다 검찰의 수사의지가 확인되지 않고 있다. 설령 의지가 있다 해도 외국의 국가원수인 나자르바예프를 조사할 방법은 현실적으로 거의 없다. 결국 최 전 회장의 진술은 외국 국가원수에게 뇌물 성격의 거액을 건넸다는 사법사상 최초의 법정증언이라는 평가만을 남긴 채 ‘찻잔 속의 태풍’으로 끝날 공산이 크다. 물론 나자르바예프가 이 진술로 인해 자국에서 어떤 대가를 치를지는 전적으로 그쪽 사정에 달렸다.
강희철 기자/ 한겨레 경제부 hckang@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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