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기사섹션 : 이슈추적 | 등록 2001.09.11(화) 제376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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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슈추적] 듣기에도 민망한 “웰컴 IPI” 한국을 언론자유탄압 관찰대상국으로 결정한 국제언론단체의 허상
한국은 지금 이른바 ‘국제언론단체’의 가장 인기있는 방문지인 것 같다. 세계신문협회(WAN: World Association of Newspapers), 국제언론인협회(IPI: International Press Institute), 국제기자연맹(IFJ: International Federation of Journalists)이 각각 9월4일, 5일, 6일에 잇따라 조사단 성격을 띤 대표단을 한국에 보냈다. 16일에는 프리덤하우스라는 미국의 인권단체가 한국을 찾는다. 세무조사에 이은 언론사주 구속사태를 둘러싼 ‘언론개혁’ 주장과 ‘언론탄압’ 주장 사이에서 진실을 찾는다는 게 이들의 공식적인 방문 목적이다.
유신시절 침묵하던 IPI가…
그러나 국내 독자와 국민들은 이들의 정체성에 대해 헷갈려 하고 있다. 이들 단체가 조사결과라고 발표한 내용이 정반대로 엇갈린 점 역시 이같은 혼동을 부채질했다. IPI 대표단은 방한한 지 하룻만인 6일 한국을 ‘IPI 언론자유탄압 관찰대상국’으로 결정했다고 공개했다. IPI와 WAN 공동조사단이 만나기로 한 국내 언론계 관계자들을 다 둘러보지도 않은 채 내린 결론이었다. 이들은 기자회견에서 기자들의 질문에 아예 대답을 하지 않거나 질문이 쏟아지는 데도 회견을 서둘러 끝내는가 하면, 면담 때 조선일보 기자만을 동행시키는 등 ‘언론인’이라고 보기 힘든 행태를 연출했다. 이들이 벌인 ‘돌출행동’의 백미는 한나라당 의원들과 만나 “(구속된 사주들이) 법원에 항소하면 재판에 2∼3년 걸릴 것이고, 그때가 되면 여러분이 여당이 될 것”이라고 말한 대목이다. 조·중·동은 기다렸다는 듯이 IPI의 결정을 대대적으로 보도했다. 사설은 ‘언론탄압 감시대상국’(조선일보), ‘부끄러운 언론탄압 감시대상국’(동아일보), ‘IPI 감시대상된 한국언론’(중앙일보) 등으로 제목까지 비슷했다. 또 ‘관찰’ 대신 ‘감시’라는 표현으로 통일했다.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국가 가운데 처음으로 국제적인 불명예를 떠안게 됐으며 대외적 국가 신인도에도 영향을 끼칠 것”이라거나 “러시아, 스리랑카, 베네수엘라와 같은 수준의 언론탄압 국가로 대접받게 됐다”는 등의 기사도 잇따랐다. 이에 비해 7일 IFJ는 정반대의 내용을 담은 성명을 냈다. 대표단은 “기자는 민주선거로 세워진 정부의 세금납부와 납세시행의 권리를 인정해야 하며 언론기업들은 정직의 선례를 만들기 위해 의무와 책임을 이행해야 한다”고 전제한 뒤 “이번 방문을 통해 한국 언론이 일반적인 언론자유가 보장되고 있다는 증거를 다시 한번 확인했다”고 강조했다. 조·중·동은 그러나 이들의 회견내용을 철저히 무시하는 보도태도를 보였다. 국제언론단체들이 이렇게 완전히 다른 견해를 보일 수 있는 배경은 뭘까. 전문가들은 이들 단체의 성격과 이해관계가 근본적으로 다른 데서 생겨나는 현상으로 보고 있다(표 참조). 즉 이들 단체의 구성원은 ‘언론사 사주 또는 간부’(IPI), ‘신문 경영인(발행인)들’(WAN), ‘전세계 현직 기자들’(IFJ) 등으로 나뉜다. 여기에다 방상훈 조선일보 사장과 홍석현 중앙일보 회장이 각각 IPI와 WAN의 현직 부회장이라는 점도 이들의 행보를 이해하는 데 중요한 요소로 지적되고 있다. 특히 박정희 유신독재에 이은 전두환, 노태우 군사정권이 언론자유에 재갈을 물릴 때 거의 침묵으로 일관하며 조사단을 파견하지 않았던 IPI가 마치 ‘한국 언론자유의 구세주’인 양 행동하는 것은 혹시 다른 배경이 있는 것 아닌가 하는 의혹까지 불러일으켰다. 이같은 의혹은 민주당 이미경 의원(www.leemikyung.net)이 7일 ‘IPI, 그 오욕과 왜곡의 역사를 말한다’는 정책분석보고서를 냄으로써 조금씩 벗겨지고 있다. 이 의원은 보고서에서 IPI의 편향성을 1960년 이후 한국 언론과 IPI와의 관계 속에서 분석했다. 보고서는 특히 IPI의 편향성이 한국 정부와 족벌언론들의 로비와 잘못된 정보제공과 무관하지 않다는 점을 처음으로 제기하고 있다. 이 의원에 따르면 민족일보 사건이 벌어졌던 60년대와 70년대 중반까지만 해도 IPI 본부가 한국 상황을 비판적으로 인식했지만, 70년대 중반 이후 IPI 한국위원회의 집중로비가 시작되면서 한국 정부에 대한 비판적인 시각이 바뀌었다는 것이다.
언론사주들의 사교무대이자 로비의 장
‘77년 세계 58개국의 언론자유실태’라는 제목의 78년 IPI 보고서는 한국 언론에 대한 대표적인 왜곡 자료다. △자기검열 △언론인에 대한 고문·납치 △통행 제한 △법적 위협 △이적언론 금지 등 16개 언론통제 유형을 기준으로 한 실태조사 결과 한국은 이탈리아, 프랑스보다 언론자유가 잘 보장된 국가로 분류됐다. 미국·스위스와 같은 등급의 수준이었다. 국내적인 시각에서 보면 ‘만화경’이 아닐 수 없다. 당시는 ‘국가안보와 공공질서의 수호를 위한 긴급조치 9호’가 시퍼렇게 살아 있던 때였기 때문이다. 유신헌법에 대한 일체의 비방이 금지되고, 위반자는 영장없이 체포당하던 시절이었다. 이같은 비상식적인 결정이 가능했던 것에 대해 이 의원은 IPI가 언론사주들의 사교무대이며 동시에 로비의 무대라는 성격이 강하다는 점을 주목해야 한다고 강조한다. 정작 중요한 언론문제도 언론사주의 사적 이해 때문에 폐기처분되거나 변질될 우려가 높다는 것이다. 사교가 어떻게 이뤄졌는지에 대해 보고서는 몇 가지 일화를 소개했다. 다음은 보고서에 인용된 조선일보 방일영 고문의 회갑기념문집 내용이다. “박정희 대통령 시절 IPI 위원들이 청와대를 방문했다.… 당시 IPI 의장이 박 대통령에게 ‘IPI라는 것은 International Press Institute라기보다 오히려 International Playboy Institute의 약자인 것 같습니다’라며 농담했다. … 신문인들이 국제적으로 플레이보이로 소문나 있던 것은 전혀 근거가 없는 것은 아니다. 한번은 마닐라에서 회의가 있었다. 마닐라에서 신문발행인으로 이름난 5대 재벌 가운데 한 사람이 회의를 마치자 파티에 초청을 했다. 그곳으로 가보니 바다 위에 요트를 띄워놓고 밴드까지 불러서 호화잔치를 벌여놓았다. 그들이 논다는 것은 우리가 상상할 수 있는 그런 놀이가 아니었다. 거기다가 여자까지 불러다놓고 공개적으로 놀았다.” 전 문화방송 사장이었던 이환의씨가 같은 문집에서 증언한 내용을 보면 언론사주들의 로비실태를 부분적으로나마 알 수 있다. “… 방일영 회장은 ‘국내적으로 문제가 있더라도 국제적으로 나라와 언론계가 고립되고 망신당해서는 안 된다’고 하면서 IPI의 이사진과 각국 대표단에게 한국 정부와 언론의 이미지를 개선하는 데 밤을 새워 로비하는 것을 여러 차례 목격한 바 있다.”
정부 공식예산 써가며 기부금 뿌리기도
80년대 한국은 유례없는 언론대학살극을 경험하지만 IPI의 왜곡은 여전했다. 언론통폐합과 대규모 강제해직 등에 대해 비판적인 보고서를 만들고 항의서한까지 보냈던 IPI가 입장을 바꾼 것은 81년 케냐 나이로비에서 있었던 IPI 총회에서였다. 보고서는 한 참석자의 회고를 소개했다. “IPI 사무총장의 호텔방을 방문해 2시간이나 열띤 토론을 벌인 결과 과격한 어조의 보고문 초안이 대폭적으로 수정되는 ‘성과’를 거두었다. 이는 우리 대표들의 끈질긴 설득의 결과이기도 하지만 기부금 1만스위스프랑을 이날 그 자리에서 전달하기로 미리 약속돼 있었던 사실이 영향을 끼친 것같이 느껴진다.” 당시 총회에는 문화공보부 직원 15명이 정부의 공식예산을 써가면서 참석했다고 이 의원은 전했다. 보고서는 또 85년 김상만 전 동아일보 회장이 IPI의 조사 제의를 거절한 사실을 밝혔다. 국내 언론사주와 IPI와의 관계를 극명하게 보여주는 모습이다. 당시 동아일보의 편집국장과 정치부장이 안기부에 끌려가 가혹행위를 당한 직후 열린 IPI 이사회에서 IPI 회장과 사무총장이 김상만 당시 동아일보 회장에게 “직접 한국의 언론상황 조사를 위해 방한하겠다”는 의사를 표시했지만, 김 회장은 “지나간 일이고 이제 모든 것이 정상으로 돌아가고 있는 만큼 IPI가 너무 강한 반응을 보이는 것은 도움이 안 된다”며 간곡히 설득했다는 것이다. IPI 조사라는 게 국내 언론사주의 말 한마디에 철회될 수 있는 성격이었던 셈이다. 이 의원의 보고서는 이들 단체보다 더욱 큰 문제가 이들에게 왜곡된 정보를 제공하고 이를 다시 역수입하는 일부 언론사와 언론사주들에게 있다는 점을 보여준다. 앞으로는 IPI, WAN, IFJ 등을 ‘국제언론단체’라고 뭉뚱그려 표현해서는 안 될 일이다. 그것은 마치 사학재단연합회와 전교조를 ‘교육단체’라는 한마디로 묶어버리는 우를 범하는 것과 같기 때문이다.
김창석 기자 kimcs@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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