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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배 도미노 ‘이적 한총련’ 기수별 고려없이 이적단체 규정 적용… 언제까지 대학생 수배자를 양산할 건가
한 청년에게 3년형을 구형하는 데 채 5분도 걸리지 않았다. 7월19일 오후 4시 서울지법 서부지원 304호, 한국대학총학생회연합(한총련) 산하 서울서부지역총학생회연합(서부총련) 이경민(23·경기대4) 의장은 ‘이적단체 가입’ 혐의로 3년형을 구형받았다. 이날 재판은 9기 한총련의 이적성 여부를 가늠하는 시금석이었다. 지난 4월 대의원대회를 통해 9기 한총련이 구성된 뒤, 처음 열린 재판이었기 때문이다. 이씨에게 이적단체 가입죄가 적용되지 않는다면, 9기 한총련에 이적규정을 철회하는 첫 판례가 되는 셈이었다. 더구나 한총련이 지난 4월 대의원대회를 통해 이적규정의 핵심 근거였던 ‘연방제 통일방안’을 삭제하고, ‘6·15 남북공동선언 정신에 따른 통일원칙’을 강령으로 채택한 터라 기대는 더욱 컸다. 하지만 결과는 달라지지 않았다. 대검찰청 공안부는 “연방제 문구 하나 빼고는 세부지침, 사업계획 등 전반적 활동이 바뀐 것은 없다”며 “소환에 불응하고 탈퇴각서를 쓰지 않으면, 9기 대의원들도 이적단체 가입죄로 사법처리할 수밖에 없다”고 밝혔다.
기수에 상관없이 이적단체 가입죄 적용
수배는 연행과 구속으로 이어지게 마련이다. 올해 들어서만 전·현직 대의원 39명이 붙잡혀 구속 또는 불구속 상태에서 재판을 받고 있다. ‘국가보안법 관련 정치수배 전면해제를 위한 명동성당 농성단’에 따르면, 2001년 6월 현재 153명이 장기 수배상태에 놓여 있다. 이들은 대부분 한총련 대의원을 지낸 사람들이다. 올해도 정치수배자가 양산될 위기에 놓여 있다. 대검 공안부는 최근 한총련 대의원 전원을 탈퇴시키라고 일선 검찰에 지시했다. 이에 따라 경찰은 9기 한총련 대의원 400여명을 대상으로 이미 출석요구서를 발부했다. 대부분 7월 말로 예정된 시한까지 경찰서에 출두해 탈퇴각서를 쓰지 않을 경우, 이들도 모두 수배자의 길에 오르게 된다. 7월19일 저녁 10시. 신촌 거리의 휘황한 간판들 사이를 지나 연세대학교 정문에 들어섰다. 짙은 어둠이 깔린 캠퍼스 정문으로 학생들이 내려오고 있었다. 늦은 귀가를 하는 학생들을 가로질러 학생회관 3층 총학생회실에 이르렀다. 늦은 밤인데도 대여섯명이 둘러앉아 두런두런 얘기를 나누고 있었다. 밤이 돼도 ‘귀가하지 못하는’ 학생들이다. “어이! 수배 3년차 이리와!” “방금 여기 있던 5년차는 어디로 갔냐?” “얘들은 9기 대의원들이에요.” 쾌활한 웃음으로 맞는 이들에게서 수배자의 그림자를 찾기란 쉽지 않았다. 컴퓨터 앞에 앉아 있던 김현정(가명·24)씨와 정진웅(26)씨가 다가왔다. 김씨는 3년째, 정씨는 2년째 수배생활에 접어들었다. 한총련 대의원이었던 탓이다. 두 사람이 가세하자 어느새 소파는 일곱명의 수배자들로 꽉 찼다. 연세대에만 한총련 6기 대의원부터 8기 대의원까지 10명의 수배자들이 있다고 한다. 김씨는 “99년 1월 집을 나온 뒤로 아직 한번도 다시 가보지 못했다”고 입을 열었다. 가족들과의 만남은 두어달에 한번씩 부모님이 학교로 찾아와 만나는 게 고작이다. 밥은 주로 학생식당에서 해결하고, 잠자리는 총학생회 한켠에 나무 판자를 대서 만든 생활방이다. 다른 수배자들의 생활도 김씨와 별반 다르지 않다. 김씨는 3년째 이런 생활을 하다보니 몸이 점점 쇠약해진다고 말한다.
수배자들의 슬픈 눈망울을 아는가
“크게 아픈 데는 없는데, 잠자리도 불편하고 먹는 것도 부실하니까 몸이 점점 안 좋아져요. 아파도 병원에 가기 힘드니까 그때가 제일 서럽죠. 바로 저기가 병원인데도….” 김씨가 가리키는 곳은 학생회관 뒤편의 세브란스병원이다. 몇미터 떨어지지 않은 거리다. 김씨의 옆에 수배 위기에 놓인 9기 한총련 대의원 김진숙(23·동아리연합회 회장)씨와 김정숙(22·사회대학생회장)씨가 앉아 있었다. 지난해 말 학생회장에 뽑힌 이들은 얼마 전 출두요구서가 날아들면서 집을 나왔다. 부모님은 “탈퇴서 한장 쓰는 게 뭐 그리 어렵냐”며 “나랑 같이 경찰서에 가자”고 울먹이며 막아섰지만 그들을 붙잡진 못했다. 부모님의 만류마저 뿌리친 그들이지만 얼마 전 일어났던 7기 대의원 선배의 연행은 불안한 기억으로 남아 있다. 지난 3월 중순, 두 사람은 7기 대의원이었던 선배 한명과 동국대에서 열린 노동자 집회에 참석했다. 집회를 끝낸 뒤 동국대 앞 식당에서 저녁을 먹고 나오는 길에 갑자기 경찰이 덮쳤다. 인적이 드문 골목길에 차를 세워두고 그들이 나오기를 기다렸던 것이다. 이미 수배령이 떨어진 선배가 표적이었다. 함께 있던 예닐곱명이 몸싸움을 하며 저항했지만 허사였다. 결국 선배는 수갑을 찬 채 끌려갔다. 선배를 연행하던 경찰은 두 사람의 이름을 부르며 “너희도 조심해!”라고 경고했다. 김진숙씨는 “수배도 받기 전인데 벌써 내 얼굴과 이름을 정확히 안다는 게 너무 섬뜩했다”며 “그 순간 갑자기 나 자신이 무기력해지면서 세상이 두려워졌다”고 말한다. 이들의 말을 차분히 듣던 수배 3년차 김씨는 그래도 지금은 많이 나아진 편이라고 말한다. “99년에만 해도 학생회관에서도 안심하고 잠을 못 잤어요. 대개 강의실에 몰래 숨어들어가 잤죠. 학생회관에서 잘 때는 반드시 보초를 세우고요. 그때만 해도 정말 외로웠는데…. 최근에는 침묵하던 시민사회단체와 부모님들까지 이적규정 철회에 나서고 있으니 많이 좋아진 거죠.” 한여름 뙤약볕이 내리쬐던 7월20일 정오. 서초동 서울지검 청사 앞에는 “정당한 우리 자식들을 가족의 품으로 보내주세요”라고 쓴 선전판을 온몸에 두른 중년 남자가 1인 시위를 벌이고 있었다. 한총련학부모협의회(한학협) 대표 정연오(48)씨였다. 한학협 회원들은 7월 둘쨋주 월요일부터 벌써 2주째 1인 시위를 이어가고 있다. 몇년이 지나도록 이적규정이 풀리지 않자 학부모들이 직접 나선 것이다. 한총련 4기 의장 정명기씨의 아버지인 정씨는 “청와대에 수십 차례 탄원서를 보내고, 올해만 3번을 찾아가 면담을 요구했지만 묵묵부답”이라며 답답해했다. 서울뿐만 아니라 부산 등지로 한학협 학부모들의 1인 시위는 퍼져나가고 있다. 뙤약볕 아래서 한 시간 동안 시위를 마친 정씨는 지하철을 타고 종로구 안국동으로 향했다. 안국동 지하철에서 내리자 시계바늘이 오후 2시를 넘어가고 있었다. 안국동 느티나무 카페에 들어서자 ‘9기 한총련 대의원 수배조치 철회를 위한 기자회견’이 한창이었다. 기자회견 대표로 나선 한총련과 사회단체 대표들 뒤로 30여명의 9기 대의원들이 큼지막한 선전판을 하나씩 목에 걸고 서 있었다. 늘어선 학생들 사이에 “제9기 한총련 대의원 통일연세 동아리연합회 회장 김진숙”이라고 적힌 선전판도 눈에 띄었다. 밖에서는 연신 “이적규정 철회하라!”는 한총련 학생들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출두하려는 수배자를 막아서는 경찰
기자회견을 마친 학생들은 지하철을 타고 경찰청으로 공개 출두시위에 나섰다. 오후 3시30분쯤 한총련 대의원 100여명이 뒤섞인 300여명의 시위대가 경찰청 근처 지하철 5호선 서대문역에 도착하자 이미 출구를 경찰 방패가 막아서고 있었다. 한 시간 넘게 학생들과 계속된 대치 사이 사이에 학생 시위대에서는 “수배자들 왔어요!” 하는 외침이 터져나왔다. ‘출두하려는 수배자’와 ‘막아서는 경찰’이 대치하는 진풍경이 연출된 것이다. 국가보안법 체제 아래서 벌어진 웃지 못할 촌극이다.
글/ 신윤동욱 기자 syuk@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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