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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업을 물어뜯는 자 누구냐 가뭄 끌어대는 언론과 즉각 개입에 나선 정부… 되풀이되는 시나리오, 노동의 시민권은 공염불
탄압의 양상은 언제나 똑같다
이번 파업을 둘러싼 극한대결은 어쩌면 ‘올 것이 온 것’으로 볼 수 있다. 지난 1998년 현대자동차 정리해고사태 때부터 불거지기 시작해 99년 2월 민주노총이 노사정위원회 불참을 공식 선언하면서 본격화된 노정간 대립이 이제 막판까지 온 것이다. 민주노총도 정부에 대한 더이상의 기대를 접었고, 정부도 민주노총을 파트너로 인정하지 않겠다고 여기면서 양쪽 모두 힘의 대결로 나선 셈이다. 물론 이 한복판에는 노동자의 생존권을 위협하는 해고 중심의 구조조정과 이에 맞선 민주노총의 저항이 놓여 있다. 그동안 대부분의 파업이 그랬듯, 이번 연대파업을 둘러싼 노정 갈등은 한국사회에서 노동이 과연 ‘시민권’을 부여받고 있는지에 대한 근본적인 의문을 제기한다. 노동의 시민권은 노동자가 집단적으로 자신들의 이익을 방어하고 주장할 기본권으로, 노동이 사회의 한 주체로 실질적인 인정을 받고 있음을 의미한다. 이런 시민권의 대표적 형태가 단체행동권 또는 파업권이다. 그런데 이번 파업을 둘러싼 정부와 사용자, 언론의 반응은 어떠했는가. 대통령은 즉각 “불법적이고 폭력적인 파업은 용납해서는 안 된다”며 ‘단호한 대처’를 지시했고 한국경영자총협회도 “이러다가 나라가 다 망한다”며 즉각 공권력을 투입해 파업을 진압하라고 강력히 요구했다. 그리고 검찰과 경찰은, 한국에서 노사관계는 없고 노정관계만 있다는 말을 입증하듯, 곧바로 사태에 ‘신속 개입’해 파업 주동자 검거에 나섰다. 이 과정에서 사용자들은, 버티면 경찰이 골치아픈 노조를 깨고 파업을 와해시켜주는데 노조와 성실한 교섭을 할 필요가 있느냐는 태도를 보였다. 대다수 언론도 앞다퉈 파업을 매질했다. 한결같이 ‘이 가뭄에 웬 파업이냐’는 논리로 엉뚱한(?) 가뭄을 내세워 책임을 노동자에게 덧씌웠다. 6월12일치 1면에서 ‘이 가뭄에 연대파업 비상’(<조선일보>), ‘엎친 가뭄에 덮치는 파업’(<중앙일보>)이라고 맹비난한 데 이어 14일 초판 1면에서도 ‘붉은 띠를 풀어라’(<중앙일보>), ‘온나라가 흔들린다’<(조선일보)>, ‘정부, 불법파업 손놨나’(<동아일보>) 등을 크게 실었다. 도무지 이성과 냉정은 찾아볼 수 없었다. 인하대 윤진호 교수(경제학)는 “평소에는 노동자에게 관심도 안 두던 언론들이 파업이 일어나면 일제히 달라붙어 물어뜯는 일이 반복되고 있다”며 “그러나 노동자들이 왜 파업을 하는지, 왜 파업으로 내몰릴 수밖에 없었는지에 대한 분석은 전혀 찾아볼 수 없다”고 한탄했다. 전국농민회총연맹이 “가뭄을 핑계로 노동자들의 정당한 생존권쟁취 파업투쟁을 왜곡, 탄압하지 말라”는 성명을 낸 대목에 이르면 정부와 언론의 파업비난이 차라리 안쓰럽기조차 하다. 이런 과정은 짜여진 시나리오의 되풀이라는 느낌을 준다. 일단 파업이 벌어지면 ‘불법’, ‘시민불편’, ‘경제적 손실’을 내세운 여론몰이 공세를 통해 뭇매를 때리고 법률적, 행정적 잣대를 들이대 파업 지도부에 대한 수배에 나서고, 사용자는 공권력 투입을 요청하고, 경찰은 즉각 개입해 파업을 파괴하고 대대적인 검거에 나서는 식이다. 여기에 노조의 단체행동권이 헌법에 보장된 권리이자 협상의 무기라는 점은 아예 설 자리가 없다. 한신대 노중기 교수(사회학)는 “과거 권위주의정권 시절부터 지속돼온 노동배제 관행이 강도의 차이만 있을 뿐 지속되고 있는 게 현실”이라고 비판했다.
불법파업은 만들어지는 것
노동계는 이른바 ‘불법파업’이, 파업을 사회악쯤으로 여기는 지금의 노동제도 속에서 구조적으로 ‘만들어지고 있다’고 주장한다. 이번 대한항공 조종사노조 파업에서 논란이 된 노동위원회의 행정지도나 보건의료노조 산하 병원지부가 철폐를 요구한 필수공익사업장 직권중재제도가 그렇다. 이런 제도를 당국이나 사용자가 남발하면서 파업에 불법의 멍에를 씌우고 정당한 파업조차 봉쇄한다는 게 노동계의 주장이다. 실제로 사용자들은 이를 악용해 교섭을 하는둥 마는둥 기피하다가 파업 직전 기다렸다는 듯 직권중재 통보서를 들이대며 불법으로 몰기 일쑤다. 윤진호 교수는 “직권중재나 필수공익사업장 지정이 단체행동권의 본질적인 부분까지 침해하고 있다”며 “파업을 원천봉쇄하는 제도 탓에 모두 불법이 되지 않을 수 없다”고 말했다. 물론 정부는 노사정위원회를 통한 노조의 참여를 보장하는 등 노동쪽에 시민권을 부여했는데도 민주노총이 이를 거부한 채 바깥에서 투쟁만 벌이고 있다고 비난한다. 그러나 민주노총은 노사정위는 노동자의 반발을 끄는 소방수 노릇을 하는 기구라며 정부가 시민권을 주는 ‘시늉’만 할 뿐 실질적인 시민권은 여전히 주지 않고 있다고 주장한다. 사용자 뒤에서 늘 ‘대기하듯’ 버티고 있는 공권력이 파업권 자체가 부정되는 현실을 보여준다는 것이다. 이에 대해 노중기 교수는 “지난 98년 현대자동차 정리해고사태 당시 하늘에 진압 헬기가 뜨고 전투경찰 수천명이 진을 친 채 사업장을 에워쌌는데 공권력 투입설이 파다한 와중에 노동부 장관이 내려간 건 타협모색이 아니라 공권력을 앞세운 협박”이라고 말했다. 90년대 초 울산 현대중공업 골리앗농성 때 당국이 마치 전쟁하듯 육·해·공 입체 도상작전을 펼치던 시절과 크게 달라진 게 없다는 것이다. 물론 파업만 일삼는 전투적 노동운동이 선진적 노사관계의 모습은 아니다. 노동조합이 시민들에게 “자기 권리를 주장하듯 노동자들의 권리도 인정하고 파업이 가져오는 불편을 감수해달라”고 주장한다면, 노조 스스로도 시민들의 권리를 인정하고 시민불편을 최소화해야 한다. 이는 시민권 획득을 위한 노동쪽의 과제라 할 수 있다. 하지만 정부나 사용자가 파업 때마다 무조건 절차적 문제를 들며 형사처벌의 대상으로만 보는 관행부터 바꿔야 한다는 지적도 나온다. 노동문제라는 게 원래 노사 또는 노정간 갈등과 대립의 성격을 띨 수밖에 없고 이 때문에 갈등 해소를 위해 파업이 일어날 수 있다는 상식부터 정부와 사용자, 시민이 모두 인정해야 한다는 것이다. 노중기 교수는 “노동자들의 파업을 있어서는 안 되는 것쯤으로 보는 인식이 노동의 시민권을 위협한다”며 “상대적으로 노동의 시민권이 약한 미국과 영국도 대처와 레이건 정권 시절을 빼면 법적 잣대를 들이대 파업을 처벌하는 데 매우 조심한다”고 말했다. 사실 노동조합은 노동자들의 불만을 해소해주는 하나의 제도로, 이 통로가 없다면 노동자들에게 쌓였던 갈등이 걷잡을 수 없이 폭발해 정권 자체를 뒤흔들 수 있는 만큼 노조는 정권을 위해서도 필요하다.
노동자 끌어안는 정당의 부재
파업의 일상화는 노동자 정치세력화와도 맞물려 있다. 노동자들의 이해를 대변할 정치적 대표체가 없는 상태에서 노동자들이 집단적으로 요구를 관철시킬 방법이 별로 없기 때문이다. 노중기 교수는 “노동의 이익을 대변할 정당이 있다면 위에서는 대화와 타협을 주장하면서 현장에서는 무참히 파업을 깨는 상황이 일어나기도 힘들 것”이라고 진단했다. 기존 정당이 노동자들의 이해를 정치적으로 받아 안지 못하는 문제도 제기된다. 경남대 임영일 교수(사회학)는 “미국 민주당은 노동자와 정치적 연대를 통해 노동문제를 풀어오고 있다”며 “현 정부는 노동을 배제와 통제의 대상으로만 여기는 정치력의 한계를 보인다”고 지적했다. 현 정부가, 노동쪽이 정권을 지지하면 좋아하고 노사정위를 뛰쳐나가 저항하면 화만 내지 끌어안을 생각은 못한다는 얘기다. 실제로 노정간 갈등에는 합법화해주었는데도 민주노총이 구조조정에 저항하며 파업을 일삼는다고 생각하는 정부의 불만이 배어 있다. 합법화를 파업포기 정도로 여기는 당국의 이런 발상에도 노동의 시민권은 설 자리가 없다. 반복되는 파업은 갈등이 터질 때마다 정부가 불법으로 다스리고 틀어막으면서 ‘봉합’만 되풀이하고 있다는 점과 무관하지 않다. 임영일 교수는 이를 ‘적당한 봉인’이라며 “그렇기 때문에 갈등은 언제든 다시 튀어나오게 돼 있다”고 말했다. 윤진호 교수는 “합의내용이 금세 휴짓조각이 되면서 노사정위가 노동계의 불신을 받고 있는 만큼 정부가 명확한 약속이행 시간표를 제시해 신뢰를 확보하는 등 민주노총을 대화 테이블로 이끌 방법을 고민해야 할 것”이라고 말했다.
글/ 조계완 기자 kyewan@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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