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
|
|
|
‘무조건 3년형’ 관례가 깨졌다 민간인 변호사 최초로 출석한 양심적 병역거부자 재판, 사상 처음으로 선고공판 연기
5월15일 오후 2시30분. 경기도 용인의 3군 사령부 재판정은 사람들로 발디딜 틈이 없었다. 숨죽인 방청객 앞에서 군복을 입은 한 청년이 또박또박 견해를 밝히고 있었다. 소년티가 채 가시지 않은 안현(22) 훈련병이다. 그뒤로 뒷머리를 바짝 깎아올린 청년 18명이 앉아 있다. 3월11일부터 4월26일까지 입대한 ‘여호와의 증인’들이다. 집총을 거부한 탓에 항명죄로 기소된 피고인 신분이다.
어김없이 검찰관은 3년형 구형했지만…
이날 재판은 <한겨레21>의 양심적 병역거부자 보도를 계기로 구성된 ‘양심적 집총거부자 법률구조 변호사단’(변호사단)이 변론을 맡은 첫 재판이었다. 변호사단은 ‘민주사회를 위한 변호사 모임’ 소속 변호사 9명으로 구성돼 있다. 이날 재판에는 5명의 변호사가 출석했다. 반세기 동안 1만명이 넘는 양심적 병역거부자들이 군사재판을 받아왔지만, 변론은 항상 국선변호사가 맡아왔다. 무조건 항명죄 법정 최고형을 내려온 탓에 민간 변호사를 따로 선임할 필요가 없었던 것이다. 피고인의 가정형편 등은 선고에 전혀 반영되지 않았다. 특히 항명죄의 최고형이 3년형으로 높아진 94년 이후 단 한번의 예외도 없이 3년형이 선고됐다. 안 훈련병을 상대로 30여분 동안 진행된 군 판사의 신문이 끝나고 최후변론이 이어졌다. 변호사단 대표인 임종인 변호사가 천천히 말문을 열었다. “이들에게 무죄가 선고되는 것이 가장 옳습니다. 헌법에 명시된 양심의 자유는 항명죄보다 앞서기 때문입니다. 또한 국제법에 비춰봐도 무죄입니다. 유엔인권위원회는 각국 정부에 양심적 병역거부자를 처벌하지 말 것을 권고하고 있습니다. 이를 따르지 않는 것은 국제법 위반입니다. 더구나 한국은 얼마 전 유엔인권위원회 위원국으로 재선된 나라입니다.” 임 변호사의 변론이 시작되자 방청석 여기저기서 흐느낌이 새어나왔다. 방청객의 대부분은 기소된 청년들의 가족들. 수십년 동안 변변한 변론 한번 받아보지 못하고 남편과 자식을 감옥으로 보내온 여호와의 증인들의 한이 터지는 순간이었다. 숨죽인 흐느낌 속에서 변론은 계속됐다. “설령 현실적인 조건 때문에 유죄를 선고한다 해도 3년형은 너무 가혹합니다. 예전에 제가 군 판사로 재직하던 시절, 후임병을 때려 실수로 사망케 한 사병에게 2년형을 준 적이 있습니다. 집총거부가 살인보다 더 큰 피해를 주는 행위입니까? 집행유예나 선고유예로도 충분합니다. 최소한 징집기간보다 더 긴 형을 언도해서는 안 됩니다.” 최후변론은 20분 가까이 이어졌다. 조목조목 양심적 병역거부의 정당성을 설명하던 임 변호사는 “재판부의 심사숙고를 바란다”는 당부로 변론을 마무리했다. 이어 군 판사가 “피고인 최후진술 하세요”라고 지시하자 안 훈련병이 잠시 호흡을 가다듬은 뒤 진술을 시작했다. “모든 사람이 서로를 사랑해 총을 겨눌 필요가 없는 세상은 어쩌면 꿈속에서나 그릴 수 있는 이상일지 모릅니다. 하지만 성서적 양심을 가진 저희들에게 그 이상은 타협할 수 없는 원칙입니다. 저는 오늘 유죄를 받더라도, 대체복무제가 도입돼 후배들이 사회에 봉사할 기회를 얻는다면 더없이 기쁠 것입니다.” 안 훈련병이 한마디 한마디 이어갈 때마다 방청석의 흐느낌은 깊어갔다. 최후진술이 끝나자 군 검찰관이 일어섰다. “피고인을 징역 3년에 처해주시기 바랍니다.” 순간 재판정 곳곳에서 한숨이 터져나왔다. 3년 구형을 마지막으로 오후 2시에 시작돼 1시간 반 넘게 진행된 안씨에 대한 신문은 끝났다. 휴정중 재판정 밖에서 만난 피고인 안현씨의 어머니 정경헌(50)는 벌써 눈시울이 붉어져 있었다. 정씨는 이미 97년 큰아들을 감옥에 보낸 적이 있다. 그는 “솔직히 아들이 타협하기를 바라는 마음이 전혀 없지는 않았다”면서도 “오늘의 모습이 너무 대견하다”며 눈물을 글썽였다. 또다른 피고인인 김세현(20)씨의 아버지 김영일(56)씨는 “지난해 10월 큰아들이 바로 이곳에서 똑같은 이유로 재판을 받았다”며 “그때에 비해 재판정의 분위기가 너무 좋아졌다”고 전했다. 여호와의 증인들에 따르면, 이번 재판 전까지 한 사람이 3년형을 선고받는 데 채 3분도 걸리지 않았다고 한다. 의례적인 질문과 짧은 답변이 전부였다. 신문도 한 사람씩 따로 하는 것이 아니라 피고인들을 일렬로 세워놓고 진행하는 방식이었다. 최후진술 기회도 아주 짤막하게만 주어졌다.
“재판정 분위기 너무 좋아졌다”
결국 1차공판은 오후 5시40분쯤에 끝났다. 20여분의 휴식 뒤 곧바로 선고공판이 열렸다. 특별한 사정이 없는 한, 군사재판은 공판 바로 뒤 선고공판을 열어 형을 확정한다. 군 판사가 입장해 피고인 이름을 부르기 시작했다. “피고인 김세현, 피고인 이정환…, 피고인 박우용”. 한명씩 이름을 부를 때마다 재판정의 긴장감이 높아졌다. “피고인 안현, 피고인 최형범.” 군 판사가 마지막 이름을 불렀다. “피고인들에 대해서 선고공판을 연기한다.” 방청석이 술렁였다. 무조건 공판 당일 3년형을 선고해온 관례를 깬 아주 ‘이례적인’ 결정이었다. 예전 같으면 채 1시간이 안 걸렸을 재판은 4시간30분이 지난 오후 6시30분 선고연기로 끝났다. 재판이 끝난 뒤에도 ‘예외적인’ 경우는 이어졌다. 군 판사가 방청객들 앞에서 선고연기 이유를 설명한 것이다. 군 판사는 “수년간 군 판사를 해왔지만 오늘 재판을 통해서 비로소 집총거부 이유를 깊이 알게 됐다”고 운을 뗐다. 하지만 그는 “안타깝지만 현행법상 처벌할 수밖에 없다”며 “양형문제는 심사숙고해보겠다”고 덧붙였다. 선고연기에 대해 임 변호사는 “예상치 못한 일”이라며 “관례대로 3년형을 선고할 것으로 예상했다”고 말했다. 마지막까지 자리를 뜨지 않고 재판을 지켜보던 방청객들의 붉은 눈자위 위에도 희미한 웃음기가 번졌다. 선고공판 날짜는 5월 말로 예정돼 있다. 18명의 청년과 앞으로 재판을 받을 청년들의 미래가 선고 결과에 따라 ‘조금은’ 달라질 수 있다.
신윤동욱 기자 syuk@hani.co.kr
|
. | ||||||||||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