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
 |
[이슈추적] 한심한 여당에 짓밟힌 개혁 인권법·국보법 등 제·개정 물거품 위기… 관료집단에 휘둘리며 정치적 계산만 난무
오전 10시. 당사 6층 정책위의장실에 모여든 10여명의 시민단체 대표들이 남궁석 정책위 의장을 다그쳤다. “최소한 3대 개혁법안만큼은 올해 안에 처리한다고 국민과 시민단체에 약속하지 않았느냐. 또 약속을 뒤집을 참이냐”, “인권법은 당정협의를 거칠수록 후퇴한다. 이러고도 민주당이 개혁 정당이라고 말할 수 있느냐”…. 박상증(참여연대공동대표), 홍근수(국가보안법폐지국민연대 공동대표), 지은희(시민사회단체연대회의 준비위원장)…. 이들은 3대 개혁입법안을 2001년 1월9일 끝나는 이번 임시국회 회기안에 처리할 것을 요구하고 있었다. 박석운 국보법폐지국민연대 상임집행위원장은 제·개정이 완전히 무산될지 모른다는 불안감을 드러냈다. “내년은 대선정국이 시작된다. 어느 정당도 무리하지 않을 것이다. 결국 이번에 법안을 내고 내년 1/4분기 안에 처리하지 않는다면 영원히 물건너갈 것이다.”
당정협의 거칠수록 개혁성 후퇴 일쑤
그러나 남궁석 의장의 답변은 이들을 경악케 했다. “국가보안법은 내년 2월이 돼도 안 된다. 기초적인 논의도 안 됐고, 자료도 모으지 못했다. 인권법은 당정협의가 남은 만큼 내용을 밝힐 수 없다.” 오후 3시20분. 청와대 주례보고에 다녀온 남궁석 의장은 시민단체 대표들과 다시 마주앉았다. 그러나 발언 내용은 전혀 달라지지 않았다. 시민단체 대표들은 박상중 공동대표의 결연한 한마디를 남긴 채 민주당사를 서둘러 떠났다. “우리의 우려와 지적에도 불구하고 청와대에서 제대로 논의되지 않은 것 같다. 이제 김대중 대통령과 민주당에 대한 최소한의 기대마저 포기할 수밖에 없다.” 분노하는 것은 시민단체 대표뿐이 아니었다. 그동안 사석에서 “안 고치는 것인지, 못 고치는 것인지 모르겠다”고 지도부의 소극적 태도를 비판하던 민주당의 개혁성향 소장 의원들도 “더는 참을 수 없다”면서 집단행동을 시작했다. 시민단체가 정책위의장실에 들이닥친 것과 같은 시각, 천정배·이미경·김민석·이재정·이종걸·한명숙 의원 등 소장파 초·재선의원 6명은 국회 귀빈식당에 모여 “3대 개혁법안은 그간의 의원들과 시민단체, 국민의 개혁적 요구를 최대한 반영해야 한다. 당 지도부는 이 법들의 조속 처리를 위한 실질적 조처를 취하라”고 목청을 높였다. 이들은 특히 “지도부를 물리적으로 압박해서라도 이를 관철하겠다”면서 ‘개혁입법추진위원모임’을 결성하고, 당내 동조세력 규합에 나섰다. 15명 정도가 이날 추가 합류의사를 밝혔다. 민주당 수석부총무인 천정배 의원은 실력행사에 나선 이유를 이렇게 말했다. “당의 정체성이 걸린 이런 법안들에 대해 지난 3년간 우물쭈물하면서 기득권을 가진 관료집단인 법무부의 포로가 됐기 때문에 (정권이) 이 모양된 것 아니냐. 이제 더이상 법부부 등과 어정쩡한 타협을 할 시점이 아니다. 당 지도부가 결단해야 한다.” 그렇다면 민주당은 왜 김대중 대통령이 집권 이후 지난 3년 동안 해마다 제·개정을 약속했고 시민단체가 애타게 요구해온 이들 법안을 당 안팎의 저항과 반발이 폭발할 때까지 방치한 것일까. “개혁법안을 추진하는 당 지도부가 무능함과 실수를 거듭하면서 이에 저항하는 당 안팎의 세력들을 견인할 힘을 상실했다. 한마디로 주체세력의 한계 때문이다.”(민주당 호남출신 한 3선의원) 실제 민주당이 지난 3년간 인권위원회법과 국보법을 어떻게 다뤄왔는지 살펴보면 이런 진단에 고개가 절로 끄덕여진다.
“당 안팎 견인하지 못한 주체세력의 한계”
법무부와 검찰이 인권단체와 민주당을 제치고 98년 9월 ‘특수법인형태의 인권법’ 시안을 발표한 것을 시작으로 줄곧 법 제정의 주체로 나섰기 때문이다. 72개 인권단체로 구성된 ‘올바른 국가인권기구 실현을 위한 민간단체 공동대책위’(공대위)는 “수사과정의 인권유린 행위 등 인권위의 조사 대상인 법무부와 검찰이 오히려 인권위를 외곽 법인으로 만들어 지도감독하려 음모를 꾸민다”고 반발하며 “대통령 직속 국가기구”를 요구했다. 당시 민주당 인권위(위원장 이기문 의원)도 시민단체 의견에 동조했다. 하지만 박상천 당시 법무장관(현 민주당 최고위원)은 “검찰이 동의하지 않는다”는 논리를 앞세워 인권위를 어떻게든 법무부 관할 아래 두려고 버텼다. 당은 박 장관과 법무부의 이런 저항에 맥을 못 췄다. 16대 국회가 들어선 뒤 민주당은 아예 ‘어쩡쩡한 태도’로 일관했다. 서영훈 당시 민주당 대표가 “인권법을 연내 개정하겠다”고 몇 차례 말했지만 행동없는 구호였다. 그 사이 법무부는 2000년 8월25일 다시 인권위 위상을 ‘독립적 비정부조직’으로 바꾼 수정안을 내는 집요함을 보였다. 물론 인권위원의 수를 11명으로 늘리는 등 일부 진전이 있었지만, 시행령 제정권을 법무부가 갖는 등 지배권은 그대로 유지하는 내용이었다. 공대위는 또 저항했다. 그러나 민주당은 당정협의도 열지 않은 채 양쪽의 눈치만 살폈다. “어느 쪽도 만족시킬 수 없는 만큼 끼어들지 않겠다”는 태도였다. 그런데 10월13일 김대중 대통령이 노벨평화상 수상자로 확정되자 뒤늦게 호들갑을 떨기 시작했다. “국제수준에 맞는 인권위를 만들겠다”면서 10월18일 인권향상특위(위원장 정대철 최고위원)를 구성하고 시민단체와 법무부를 불러 조율에 나섰다. 정 위원장은 특히 11월1일 “인권위를 국가기구로 만들겠다”는 의지를 피력하고, 28일에는 인권위를 ‘방송위원회와 유산한 독립적 국가기구’로 출범시키는 내용의 개정안을 확정하는 등 제법 드라이브를 거는 듯했다.
결국 법무부안보다 후퇴한 당안이라니…
그러나 민주당안은 법무부와 시민단체는 물론 민주당 소장파의 반발까지 불러왔다. 법무부는 국가기구라는 대목에 알레르기 반응을 보였다. 법무부 차관과 기획관리실장이 의원회관으로 정 위원장을 찾아와 거세게 항의하며 정 위원장의 기자회견을 막았다. 이들은 “당정협의도 안 하는 여당이 어디 있냐”는 항의와 “검찰 내 강경파를 설득할 수 있는 시간을 달라”는 읍소를 했다고 한다. 결국 유선호 당 인권위원장이 “협의중인 내용”이라며 간략히 발표하는 선에서 절충했다. 공대위도 “민주당안은 국가기관 형식을 덧씌웠을 뿐 법무부의 시행령 제정권을 보장하고, 상임위원 숫자를 법무부안보다 4명이나 줄어든 2명으로 제한하는 등 더 개악됐다”면서 분노를 폭발시켰다. 다급해진 민주당은 12월4일 서둘러 이 법안을 당 정책위의 법안심사소위에 넘겼지만 내부에서도 의견이 엇갈렸다. 결국 이해찬 정책위의장을 위원장으로 하는 이른바 ‘5인 소위’를 만들어 논의를 완결짓기로 절충했다. 그러나 최고위원회의와 5인 소위에서 박상천 전 장관이 “검찰이 받아들일 수 있어야 한다”며 국가기구안에 반대의견을 내자 난관에 빠졌다. 이런 과정을 지켜보던 천정배·이창복·이종걸 의원 등은 12월6일 최고위원회의에 “법무부안보다 후퇴한 당안은 받아들일 수 없다”면서 “제대로 해달라”고 건의했다. 결과는 묵살이었다. 분개한 이들은 12월8일 아예 시민단체 의견을 대폭 수용해 별도의 ‘인권위원회법’을 만들었다. 그리고 김원기·정균환 의원 등 중진급을 포함한 61명의 민주당 의원과 김부겸·원희룡 의원 등 한나라당 의원을 합쳐 모두 92명의 연대서명으로 이 법안을 국회에 전격 제출했다. 하지만 남궁석 정책위의장 등 지도부는 당 안팎의 이런 거센 반발에도 불구하고 12월29일 법무부와 당정협의에서 법무부안과 민주당안을 절충하기로 결정하는 등 계속 고집을 피웠다. 이날 당정회의에 참석했던 한 개혁성향의 재선의원은 “우리 당의 안은 말만 국가기구지 뼈다귀 빼고 기름 빼다보니 법무부안보다 더 후퇴한 것인데 두개 안을 절충한들 무슨 개선안이 나오겠냐”면서 “우리 당 61명 의원이 이미 서명해 국회에 낸 인권위원회법안을 관철시키는 데 주력하겠다”고 이를 악물었다. 어떻게든 관할권을 행사하려는 법무부의 집요한 저항과 눈치보기로 시간만 보내다 부랴부랴 누더기식 개악안을 낸 당 지도부가 무능과 소극적 태도가 인권법안을 사태를 이 지경까지 몰아온 셈이다.
보수세력 반발에 당 배부의 자중지란까지
그러나 2000년 ‘6·15 공동선언’이 발표되면서 국보법 개정론은 급물살을 타는 듯했다. 자민련은 격론 끝에 6월22일 “일방적 보수노선에서 벗어나겠다”며 독소조항 개정쪽으로 당론을 바꿨다. 한나라당도 극심한 정체성 혼돈을 거듭하며 찬반 양론으로 분열됐다. 이회창 총재는 상호주의 원칙을 고수하며 “개정불가” 의지를 밝혔지만 김원웅, 서상섭 의원 등 소장파는 “시대에 뒤떨어진 냉전논리에 젖어 민족 이익을 등한시하면 안 된다”면서 국보법 개정을 줄기차게 요구했다. 김대중 대통령은 7월6일 국회 연설에서 “국보법 연내 개정” 의지를 밝혔다. 민주당도 그해 8월30일 전당대회에서는 당의 정강·정책을 수정하면서 ‘연내 개정’을 명시했다. 곧 뭔가가 이뤄질 듯한 분위기였다. 그러나 민주당이 한 일은 이것이 전부였다. 당내 의견을 수렴해 법안을 구체화해야 할 시기에 민주당은 최고위원 경선전에 몰입하면서 사실상 손을 놓았다. 9월16일에야 국가보안법개정특별기획단(단장 유재건 의원)을 구성해 99년 만들어진 잠정안 등을 토대로 한 법안 마련에 착수했다. 그러나 이때는 이미 상황은 불리해진 뒤였다. 의사들의 파업(6월), 한빛은행 부정대출 의혹(8월24일), 포드의 대우차 인수 포기 선언(9월15일) 등 대형사건이 잇따르면서 남북관계에 대한 기대감이 급격히 위축된 것이다. 자민련도 ‘개정불가’쪽으로 ‘유턴’하고 있었다. 결국 이런 분위기에 맞닥뜨린 국보법개정기획단은 12월3일 “의약분업 등 다른 현안 때문에 시기를 놓쳤다”면서 연내 개정 포기를 선언했다. 시기만 놓친 게 아니다. “기획단에서 개정쪽 의견을 모으려 했지만 유삼남 의원 등 보수적 인사들의 출석율은 높았는데 진보적인 인사들은 참석율이 저조했다. 결국 유 단장이 개정쪽으로 몰아갈 수도 없는 처지였다.”(기획단 회의에 참여한 한 당직자) 개혁성향 인사들의 불성실도 한몫 했다는 설명이다. 최고위원들은 이런 기획단의 결론을 놓고 12월4일 격론 끝에 당 인권향상특위 주도로 국보법 연내개정을 계속 추진하기로 방침을 정했다. 정대철 위원장은 가속도를 냈다. 12월6일 “회기 내 개정안 제출”을 선언하고, 다음날인 12월7일 최고위원 회의에 국보법 개정 논란의 최대 걸림돌인 국가보안법 7조 문제에 대한 “정치적 결단”을 요구했다. 시민단체의 완전폐지안, 당이 마련한 엄격한 제한안, 법무부의 현행유지안 가운데 하나를 택하라는 것이었다. 그러나 이해찬 의장이 “(당 법안심사소위 등) 당내 의견수렴 및 논의절차를 거치지 않았다”고 형식절차를 문제삼아 의장직을 사임하면서 이마저 혼란에 빠져든다. 장태완 최고위원은 “개정반대론”을 줄기차게 외쳤다. 12월11일 최고위원회의에서 다시 한번 최종결론을 시도했다. 그러나 장 최고위원 등이 반대의사를 굽히지 않자 ‘국가보안법 개정을 위한 7인소위’(위원장 정대철)를 급조한다. 여기서 결정하자는 것이었다. 그러나 ‘7인 소위’에 개정 반대론자들이 절반 넘게 포함되는 웃지 못할 일이 벌어졌다. 이런 상황에서 열린 12월18일 당정회의에서 법부부는 7조를 현행대로 유지해야 한다고 버텼다. 몇몇 개혁성향 인사들이 “국가보안법 위반자의 85%가 7조 위반자”라면서 맞섰지만 결론이 나지 않았다. 결국 이런저런 시도가 모두 가로막히자 정 위원장은 지난 12월26일 “충분한 협의를 거쳐야 한다”며 회기 내 국보법개정안 제출 방침을 포기했다.
의원의 정치적 결단마저도 거부하는 행태
민주당 한 개혁성향의 386의원은 “결국 당지도부의 잘못된 정치적 판단 때문에 당내 갈등만 유발하고 문제를 해결할 기회를 놓쳤다”고 안타까워했다. “어차피 민주당이 개정안을 확정한다고 그대로 처리되는 것도 아닌데다, 국가보안법이나 인권법안은 일단 국회에 제출하면 야당에서 상당수 동조세력을 얻고 정치적 부담을 분산시킬 수 있는데도 당 지도부가 무리하게 끌어안고 가는 무능함을 보였다”는 것이다. 김근태 최고위원의 이야기는 민주당이 왜 이들 법안을 처리할 수 없는지를 극명하게 보여준다. “이들 개혁법안에 대해 최고위원회의서 당론을 모으려고 노력은 하되, 당론투표를 강요하지 말고 의원 개개인이 정치적 결단에 따라 투표하도록 하자고 주장했다. 그래도 부결되면 어쩔 수 없지 않나. 그런데 그것을 반대한다. 그도 안 된다면 법안에 찬성하는 의원들만이라도 자유롭게 행동하게 해주자고 요구했다. 하지만 그것도 반대했다. 결국 무산되는 수밖에.” 신승근 기자skshin@hani.co.kr
|
. | |||||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