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슈추적] 실명 핵폭탄에 뇌관은 있는가동방금고 불법대출 사건 정치권 뒤흔들어… ‘3K 관련설’ 놓고 여·야 전면전 양상
“동방금고를 북창동 팀(서울경찰청 정보4계)에서 내사했다가 덮어버렸다. 언론까지 실세들이 압력넣고 있다고 이야기할 정도다. 누군지 밝혀라. …. 시중에 파다하게 유포된 말씀 드리겠다. 권노갑 최고위원, 원내는 김옥두, 김홍일 의원이라 하고, 차관급인 P씨는 공보수석인 박준영씨라고 한다. 맞냐 틀리냐.” 11월2일 오후 12시10분께, 법사위의 대검찰청 국정감사에서 터져나온 이주영 의원(한나라당)의 이 발언을 도화선으로 동방금고 불법대출 사건이 결국 여의도 정가를 강타했다. 동방 사건 발생 직후부터 국회 의원회관과 증권가에는 여권 실세의 연계 의혹을 담은 이야기가 끊임없이 나돌았다. “여권 실세 ‘3K’가 정현준 한국디지탈라인 사장의 로비를 받고 뒤를 봐주고 있다.” “여권 실세 K, H 두 의원이 차명으로 한 장외기업의 지분을 갖고 있다.”…. 아주 구체적인 내용도 있다. “청와대와 민주당이 지난해 7∼8월께 16대 총선자금 확보를 위해 국제통화기금(IMF) 구제금융 사태 당시 외화도입 과정에서 커미션으로 챙겨 홍콩에 숨겨뒀던 자금을 국내로 들여오기 시작했다. 이 과정에서 자금을 세탁하고 부풀리기 위해 코스닥에서 벤처를 통해 주가를 조작했는데, 이때 정 사장과 여권 실세들이 유착됐다. 이런 사실을 알고 있는 민주당 실세의원의 보좌진과 몇몇 정책위 전문위원들이 지난해 8월 정 사장의 평창정보통신 주식을 경쟁적으로 사들였고 9월부터 11월까지 3차례에 거쳐 되팔았다.” 물론 이런 의혹은 그동안 “믿거나 말거나” 수준의 ‘설’에 불과했다. 하지만 11월2일 이 의원이 유착설의 뇌관인 ‘여권 실세 3K’의 실명을 거론하면서 의혹은 정치권 전체를 뒤흔드는 ‘핵폭탄’이 됐다.
실명 제기 뒤 폭로 수위 갈수록 증폭
일단 여야 모두 이 의원의 발언 뒤 사생결단의 자세로 맞서고 있다. 분기탱천한 민주당은 가능한 모든 수단을 동원해 반격에 나섰다. 3일 ‘한나라당식 공작정치 근절 대책위’(위원장 정동영 최고의원)를 구성했다. 4일 이 의원을 명예훼손 혐의로 고발하고, 국회윤리특위에 의원직 제명요구서까지 냈다. 정균환 원내총무 등 당직자들은 “이회창 총재 등 한나라당 지도부가 이 의원의 입을 빌려 폭로·공작정치를 펼치면서 정치가 완전히 실종됐다. 이번에는 반드시 뿌리뽑고야 말겠다”고 목청을 높이고 있다. 한나라당도 결코 물러서지 않을 기세다. 한나라당은 발언 직후 잠시 주춤거렸다. 당사자인 이 의원은 “그들이 죄를 지어서 질문한 게 아니라 국민들의 궁금증을 풀어준다는 차원에서 검찰총장에게 알고 있다면 밝히라고 요구한 것 뿐”이라고 근거가 빈약함을 실토했다. 권철현 한나라당 대변인도 3일 오전에는 “좀 나중에 거론된 사람들의 명예에 정말 누를 끼쳤다고 판단되면 ‘유감표명’ 정도 하겠다”고 말했다. “그만하자”는 분위기였다. 그러나 민주당의 심상찮은 대응에 4일 정면으로 맞불을 놨다. 이 의원에 대한 제명요구를 “야당에 대한 협박”으로 규정하고 6일 ‘동방금고 등 권력형 금융비리 진상조사특위’(위원장 이부영 부총재)를 발족시켰다. 검찰과 여권을 향한 폭로 수위도 한층 높였다. 5일 “검찰이 장래찬 전 금융감독원 국장의 자살을 방조했다”고 주장한 데 이어, 6일 국회 정무위 소속 이성헌 의원은 또다른 정·관계 연계 의혹 사건을 폭로했다. “세종증권 김형진 회장이 99년 12월 자신이 소유한 SDN 이름으로 LG텔레콤 비상장 주식 686만3천주를 1427억원에 매입(주당 2만1천원)한 뒤, 일부를 정·관계 인사 30여명에게 공짜 또는 1만4천원의 헐값으로 넘겨 막대한 시세차익을 얻도록 했다.” 한나라당 고위 관계자들은 “김 회장이 이 의원이 언급한 여권 실세 K의원과 친인척간이라는 소문이 있다”고 말하는 등 동방사건과의 연관성도 부추겼다. 동방에 이어 또다른 ‘핵폭탄’을 마련한 셈이다. 여야간 대립이 격화하면서 관심의 초점은 한나라당이 도대체 무슨 근거로 핵폭탄의 뇌관을 계속 건드리고 있느냐에 모아지고 있다. ‘실명’ 발언을 뒷받침할 구체적 물증을 가지고 있느냐는 것이다. 사실 이 의원의 발언은 국감장에서 실명을 거론했다는 것말고는 새로울 게 없다. 정형근 의원이 동방사건이 터진 이틀 뒤인 10월24일 정무위 국감장에서 “현 정권 실세인 K의원이 정 사장 소유의 평창정보통신에 40억원을 투자하고 있다”고 발언한 이후, 정 의원쪽과 한나라당 관계자들은 권노갑·김옥두·김홍일 의원과 박준영 공보수석의 이름을 공공연히 흘려왔다. 이들뿐이 아니다. 김 대통령의 또다른 한 아들과 민주당 소속 한 386 의원의 관련 의혹까지 제기했다. 물론 이 의원은 이날 발언이 돌출적인 독자행동임을 강조한다. 이 의원의 한 측근은 “이름까지 거명할 생각이 없었는데, 몇몇 조간신문 사설에서 실명을 명백히 밝혀야 한다고 말해 그렇게 했다”고 말했다.
파문의 지원지인 정형근 의원은 물증 있나
그러나 이 의원의 발언이 당 차원에서 조직적으로 이뤄졌음을 보여주는 흔적이 곳곳에 존재하기 때문이다. 먼저 이날 발언은 사전에 충분히 예고됐다. 실명 발언 당일인 2일 오전 11시를 조금 넘긴 시간에 법사위 국감장 휴게실에 정창화 총무와 목요상 정책위의장, 김기배 사무총장 등 당 3역이 갑자기 나타났다. 그리고 이들은 한나라당 간사인 최연희 의원을 휴게실로 불러내 구석에서 심각한 표정으로 3∼4분간 귓속말을 주고받았다. 그리고 11시30분께 정 총무는 아주 의미심장한 말을 남긴 채 국감장을 떠났다. “오늘 우리당 의원들의 질의를 관심갖고 지켜봐달라. 최근 초미의 관심사에 대한 자료를 갖고 있다. 오늘 민주당 최고위원회의에서 이니셜에 대해 ‘밝히라’고 요구했다더라.” 순간 기자들은 “관련자의 이름이 나오는 게 아니냐”고 긴장하며 점심시간인 낮 12시가 넘어서까지 국감장을 지켰다. 결국 12시10분께 이 의원의 실명 발언이 시작됐다. 한나라당 당직자들 사이에는 이와 관련해 은밀한 이야기가 오가고 있다. 정형근 의원이 지난 10월22일 정 사장을 서울시내 한 호텔에서 만났고 이때 여권 실세가 관련됐다는 ‘영양가 있는’ 물증을 확보했다는 것이다. 검찰 고위관계자는 “정현준은 정 의원을 만난 적이 없다고 계속 주장한다”면서 이런 가능성을 부정했다. 그러나 정 의원은 한 측근을 통해 “그렇게 생각해도 된다”고 전했다. 한나라당 한 핵심관계자도 “그 정도 사안은 이회창 총재가 결정했다고 봐야 한다”고 말했다. 결국 정 의원이 22일 정 사장으로부터 받은 ‘물증’을 이회창 총재에게 보고했고, “믿을 만하다”고 판단한 이 총재가 정 총무 등에게 실명거론을 지시함에 따라 이 의원의 입을 통해 현실화됐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정 의원이 정 사장에게서 받은 물증은 무엇일까. 정 의원쪽은 “알아서 생각하라”면서 입을 굳게 다물었다. 그러나 이 총재 주변의 한 핵심인사는 “그리 대단한 것을 갖고 있다고 생각하지 말라. 이름을 거명한 인사들 주변인물의 이름만 나와도 되는 것 아니냐”고 말했다. 때문에 정가에서는 지난해 8월 민주당 몇몇 당원들이 정씨의 평창정보통신 주식을 사들였고 여기에 여권 실세의 보좌진들도 일부 관련됐다는 의혹이 있었는데, 정 의원이 이런 수준의 물증을 확보한 게 아니겠냐는 관측도 제기되고 있다. 파괴력이 예상보다 약한 것이다. 그러나 일단 정치권에 옮겨붙은 동방 사건은 쉽사리 결말날 것 같지 않다. 우선 한나라당 고위당직자들은 물증의 비중을 떠나 사건의 성격상 “세게 붙어도 밑질 게 없다”고 판단하고 있다. “이번 사건은 단기간에 명쾌하게 해명될 게 아니다. 장래찬 전 금감원 국장이 자살하고 유조웅 동방금고 사장 등 의혹을 밝혀줄 다른 핵심 인물들도 해외로 도피했다. 결국 의혹이 커질수록 여권의 해명 책임만 커지게 돼 있다.”(이 총재와 가까운 한나라당 관계자) 실제 검찰이 정현준 펀드의 차명을 모두 확인해도 금감원 직원들처럼 직무와의 연관성이 명백이 드러나는 경우를 제외하고는 처벌이 어렵다. 더욱이 대부분 가·차명이라 이를 밝히는 데도 6개월 이상 소요된다. 또 수사를 통해 정치권 실세의 주변 인물들의 관련 사실이 드러나도 ‘실제 전주=실세’라는 것을 밝히는 것은 불가능에 가깝다. 이번 사건을 맡고 있는 검찰의 한 고위관계자도 “아직 전·현직 국회의원을 포함해 정치인이 관련됐다는 진술은 없다”면서도 “비서관 등 정치인 관계자도 없냐”는 질문에는 확답을 피했다. “정치인의 개념이 애매하고 우리가 아는 정치인도 한정된 사람 아니냐. 그런 의미에서 정치인”이라는 것이다. 더욱이 최근 국회사무처 고위관계자가 정 사장과 민주당 출입기자의 식사를 주선한 사건이 포착되는 등 관련 의혹은 계속 확대되고 있는 상태다. 한나라당이 맞대응을 계속해도 손실보다는 정치적 이익이더 많은 상황인 것이다.
“확실한 물증 없어도 손해는 없다”
때문에 한나라당 핵심당직자들 가운데는 “2002년 대통령 선거전을 생각해 이번 기회에 아예 정치검찰을 확실히 퇴출시키자”는 의견까지 나오고 있다. 이 총재의 한 참모도 “민주당이 이 총재의 대선자금 관련 테이프의 존재 가능성을 흘리고 있는 상황에서 우리도 그에 대항한 카드를 갖고 있어야 하는 것 아니겠냐”면서 “확실한 물증이 있어도 최악의 상황이 아니면 완전히 까지는 않을 것”이라고 말했다. 한나라당은 결국 이번 실명 파동을 통해 적절히 의혹을 부추기며 여권에 흠집을 내고, 대권가도에 걸림돌이 될 검찰을 손보는 ‘일석이조’의 효과를 노리고 있는 것이다. 권철현 대변인이 “동방금고 사건의 지휘부인 김각영 서울지검장과 이기배 서울지검 3차장을 사퇴시키고 수사진을 전면교체해야 한다”고 목청을 높이면서 “궁극적으로 특별검사제 도입을 요청하게 될 것”이라고 밝힌 것은 그런 가능성을 높여주는 대목이다. 결국 ‘KKK 실명 파동’은 ‘정현준 리스트’가 낱낱이 밝혀지지 않는 한 의혹이 남고, 여야는 그 의혹의 한 자락을 잡고 물고 물리는 기싸움을 계속할 것으로 보인다.
신승근 기자skshin@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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