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슈추적 ] 2000년12월05일 제337호 

[이슈추적] “구조조정, 너를 거역하마”

한전 파업철회에도 노정간 충돌의 불씨는 여전… 올 겨울은 노동계 투쟁의 계절



“IMF 3년간 구조조정이라고 한 게 사람 자르는 일 외에 뭐가 있는가. 경제위기의 책임을 노동자들에게 다 떠넘기더니 이제 2차 구조조정을 한다며 또다시 노동자들에게 칼을 들이대고 있다.”

한국전력노조의 극적인 파업철회로 한 고비를 넘기긴 했지만 노정간 정면대결 양상을 띠고 있는 한국노총과 민주노총의 이번 겨울투쟁 국면에는 노동자들의 이런 정서가 깊이 깔려 있다. 고통분담을 외치며 추진돼온 지난 3년간의 구조조정이 결국은 노동자에게 고통을 전담시키는 방식으로 이뤄져왔다는 노동계의 울분이 저항으로 이어지고 있는 것이다.

양대노총 총력투쟁 결의

이미 연대투쟁을 결의하고 공통투쟁위원회를 꾸린 양대 노총은 12월4일 산별대표자회의를 갖고 한전노조 파업철회와 관계없이 올 겨울 총력투쟁에 나서기로 결의했다. 양대 노총은 이날 회의에서 대통령과의 면담을 공식요구하고 총파업 시기와 방법은 면담 이후에 결정하기로 했다. 특히 공공부문 연대에 이어 금융, 금속, 건설부문까지 양대 노총이 연대투쟁에 나서겠다고 밝혔다.

한전 사태를 시작으로 한 산발적인 싸움은 이미 벌어지고 있다. 지난 2일 전국사무금융노련이 전면투쟁 돌입을 선언한 데 이어 5일에는 양대 노총이 일방적 구조조정 저지와 노동시간 단축을 위한 대규모 결의대회를 갖고 경고성 부분파업을 벌였다. 8일 도시철도노조의 파업에 이어 오는 15일에는 철도노조의 총파업이 예정돼 있다. 게다가 공기업 민영화 방침에 따라 한국통신공사, 담배인삼공사, 한국가스공사로 이어지는 구조조정 일정이 줄줄이 기다리고 있어 노정간 충돌의 불씨는 여전히 곳곳에 살아 있다.

노동계의 이번 겨울투쟁 이슈는 공공부문 구조조정과 노동시간단축, 이 두 가지이다. 한국전력 민영화를 둘러싼 노정 갈등으로 당장 부각되고 있는 공공부문 구조조정은 ‘누구를 위한 구조조정인가’라는 근본적인 물음을 제기하며 노동쪽이 격렬하게 저항하는 모습으로 나타나고 있다. 경제위기 극복을 명분으로 내건 정부의 국가기간산업 민영화 정책에 맞서 노동계가 체계적인 산업정책을 요구하고 있는 것이다.

한전 사태는 수그러들었지만, 그뒤에 기다리고 있는 다른 공기업 구조조정 일정도 한전 못지않게 언제 터질지 모르는 뇌관을 안고 있다. 일단 파국은 피하고 대화와 협상국면으로 들어갔지만 한전의 경우도 노사정이 민영화에 따른 고용불안 등을 계속 협의하기로 한 만큼 불씨가 완전히 꺼진 것은 아니다. 한전 노조는 “98년 이후 6234명을 감축해 기획예산처의 인원감축 가이드라인 15.8%를 이미 초과했다”며 “인원감축으로 경영 효율성을 높여놓으니까 이제는 국가기간산업의 해외매각 추진으로 또다시 고용불안을 가져오고 있다”며 반발하고 있다.

철도노조도 사정은 한전과 비슷하다. 철도노조 김상준 국장은 “96년 이후 5052명이 감축됐는데 정부가 98년 갑자기 민영화안을 들고 나오면서 내년 상반기까지 2346명을 추가감축하도록 요구하고 있다”며 “그동안 철도 공사화 약속을 위해 인력감축의 고통을 참아왔는데 정부가 또다시 고통을 강요하고 있다”고 울분을 터뜨렸다. 한국가스공사노조도 내년 2월쯤 가스공사 민영화를 위한 가스산업 구조개편촉진특별법이 입법예고될 것으로 보고 싸움을 준비중이다. 한국통신공사노조 역시 외국인 지분 소유한도를 현행 33%에서 49%로 확대하는 전기통신법안이 국회에서 통과되면 곧바로 쟁의에 나설 예정이고, 담배인삼공사노조도 민영화 추진을 위한 담배인삼업 독점폐지조항이 강행처리되면 즉각 투쟁에 나설 방침이다.

구조조정, 시간차로 밀어붙일 수도


(사진/12월4일 열린 양대노총 공동투쟁 기자회견.양대노총은 한전 파업철회와 상관없이 총파업연대투쟁을 펼쳐나가기로 결의했다)


기획예산처에 따르면 구조조정 대상 20개 공기업의 인력감축 목표 4만1천여명 중 4만여명이 이미 감축됐다. 이에 대해 기획예산처 공공관리단은 “꼭 민영화를 전제로 감축한 것은 아니지만 민영화 과정에서 기업가치를 높여 제값을 받으려면 기업을 슬림화해야 한다”고 말했다. 노동자들의 희생을 바탕으로 기업가치가 높아지자 이제는 민영화를 추진하면서 또다시 노동자들을 고용불안에 떨게 만들고 있다는 노조쪽의 불만도 그래서 나온다.

이번 양대노총 겨울투쟁의 강도를 점치기는 어렵다. 일단 겨울투쟁의 분수령으로 인식돼온 한전노조의 파업철회로 투쟁의 기세가 한풀꺾인 것만은 분명하다. 그래서 IMF 이후 몇 차례 총파업 선언이 흐지부지되고 만 경험을 이번에도 되풀이하고 마는 게 아니냐는 전망이 벌써부터 나오고 있다. 하지만 이번 겨울투쟁은 정부가 내년 2월까지로 잡고 있는 공공·노동개혁 완료시점과 맞물려 있다. 막판 시한에 좇긴 정부가 구조개혁을 다그칠 경우 노동계의 저항도 그만큼 격렬해지는 양상으로 전개될 수 있는 것이다. 노사정위원회 양완식 전문위원은 “급박한 IMF 상황에서는 노동쪽이 인력감축에 저항할 수 없었던 게 사실”이라며 “하지만 이제 구조조정이 막판으로 가면서 노동쪽에서는 생살이 떨어져나가는 고통을 받고 있다”고 말했다.

노동계가 일단 총력투쟁을 선언한 이상, 이번 노정 대결국면은 정부가 노동계에 어떤 카드를 내미느냐에 달려 있다. 한국노동사회연구소 이원보 소장은 “현재 팽팽히 맞서 있는 노정 갈등 국면의 방향타는 정부가 쥐고 있다”며 “정부가 어정쩡하게 갈 수도 있을 것이고 노동계의 요구를 절충해서 갈 수도 있을 것”이라고 내다봤다. 일단 정부는 내년 2월까지로 잡고 있는 공공·노동개혁 시간표 속에서 노동계를 자극하지 않기 위해 시간차를 두고 구조조정을 밀어붙일 공산이 크다. 줄줄이 대기하고 있는 개별 공기업들의 구조조정 시기를 조정해가면서 노동계의 반발을 분산시킨다는 것이다. 이는 동시에 노정간 대립이 내년 2월까지 지속될 가능성이 높다는 것을 말해준다.

공공부문 구조조정에 가려져 있지만 이보다 더 큰 폭발력을 가진 변수는 노동시간단축 문제다. 주 40시간으로 노동시간을 단축하는 내용을 담고 있는 근로기준법개정안은 정부의 노동개혁 일정에 따라 내년 2월까지 처리될 가능성이 높다. 민주노총은 노동시간단축이 월차휴가와 생리휴가 폐지, 토요일 무급화 등 개악된 상태로 국회에서 통과될 경우 총파업에 들어가기로 했다. 민주노총 손낙구 교육선전실장은 “노동시간단축안이 후퇴될 경우 즉각 전면파업에 돌입하기로 조합원 20여만명이 이미 결의해둔 상태”라며 “노동시간단축 문제가 본격적으로 불거지면 노정 정면충돌로 치달을 가능성이 높다”고 내다봤다.

노사정위, 타협구도가 없다


(사진/명동성당에서 농성을 하던 한국전력 노조원들)


노사정위원회는 노동시간단축법안을 연내 처리하기로 합의했지만 국제 표준화된 내용으로 개정한다는 원칙외에 구체적인 내용은 전혀 합의를 이끌어내지 못했다. 이런 상태에서, 지난 2월 민주노총이 노사정위를 탈퇴한 데 이어 지난달에는 한국노총마저 노사정위 논의를 중단해버린 상태다. 노사정위 관계자는 “국제표준화 원칙을 감안할 때 정부가 노동계의 요구를 수용하거나 절충에 나설 여지는 거의 없다고 본다”며 “앞으로 타협구도는 기대할 수 없고 시끌시끌하면서 결국 법안 강행처리로 갈 공산이 크다”고 말했다. 노동시간단축을 둘러싼 한 차례 정면충돌이 불가피하다는 것이다. 그는 공기업 구조조정에다 노동시간단축 문제까지 불거질 경우 노동계의 분노를 더욱 증폭시킬 우려가 있는 만큼 정부가 근로기준법개정안 처리는 내년 2월까지 최대한 늦출 것으로 전망했다.

노동계의 이번 저항에는 노동자들에게 일방적인 고통만 떠안겨 온 그동안의 구조조정 방식에 대한 깊은 불신이 자리잡고 있다. 경남대 임영일 교수(사회학)는 “외환위기 때는 급한 대로 넘어갔지만 일방적인 인력감축만을 구조조정으로 생각해온 데 대해 근본적으로 다시 생각해봐야 할 시점”이라며 “노동계의 반발은 잘못된 구조조정 방식에 대한 문제제기”라고 말했다. 고통을 감수하면 희망이 올 것이라는 정부의 약속을 믿고 눈물을 삼키며 정리해고를 받아들였지만 지난 3년간 돌아온 것은 고통의 지속뿐이었다는 것이다.

민주노총 손낙구 실장은 정부에 속았다며 울분에 찬 목소리로 이렇게 말했다. “김대중 정권은 기업이 살아야 쫓겨난 노동자들도 다시 일터로 돌아올 수 있다면서 노동자 10명이 다 함께 살려면 몇명이 희생해야 한다는 논리를 폈다. 그래서 노동계가 정리해고를 수용해줬는데 지난 3년의 결과는 어떤가? 또다시 우리만 희생해야 하는가?” 당시 국가부도 위기상황에서 처음에는 그런 줄 알고 참아왔는데 당해보니 그런 게 아니라는 걸 노동자들이 뼈아프게 깨닫고 있다는 것이다. 결국 노동계의 이번 구조조정 포위 투쟁은 ‘IMF식 구조조정’의 환상이 깨진 자리에서 터져나오고 있다.

박석운 노동정책연구소장도 오로지 인력감축과 정리해고에만 맞춰진 구조조정 방식이 지금의 노정 갈등을 부르고 있다고 진단한다. 그는 “우리 경제의 환부가 어디에 있는지 정확하게 파악해 도려낼 생각은 않은 채 정부가 경제파탄 책임을 노동자들 탓으로 몰아가고 있다”며 고통분담구조 자체를 비판했다. 인력감축만을 처방으로 내세운 결과가 “오직 살길은 구조조정뿐”이란 말을 3년째 되풀이하게 만들었다는 얘기다.

왜 노동자와의 합의는 없었는가


(사진/서울역에서 시위를 벌이는 철도노조원들. 철도노조는 15일부터 총파업에 들어갈 예정이다)


구조조정 과정에서 노동계를 배제시킨 결과도 노동계의 강경투쟁을 불러온 원인으로 꼽힌다. 정부가, 이해관계가 얽혀 있는데다 정리해고 등 고통이 불가피하게 뒤따르는 구조조정을 하면서 노동을 배제시키고 일방적으로 밀어붙였다는 것이다. 이는 노사정위원회에 대한 노동계의 강한 불신과 맞닿아 있다. 노동계는 노사정위의 성격을 정부가 구조조정을 차질없이 추진하기 위해 노동계를 들러리로 끌어들인 허울뿐인 제도라고 규정하고 있다. 민주노총 관계자는 “노사정위는 노동자들에게 고통을 전담시키려는 장치일 뿐 성실한 교섭이 이뤄진 적이 없다”며 “노사정위는 무늬일 뿐”이라고 말했다. 실제로 노사정위 선한승 수석전문위원은 “지난 11·3 기업퇴출 때 퇴출에 따른 정리해고가 불가피한데도 노사정위에서 전혀 협의가 이뤄지지 않은 채 정부에 의해 일방적으로 발표됐다”며 “구조조정의 원칙과 절차에 대해 노사정위에서 사전협의하기로 한 약속이 깨진 것이나 다름없다”고 볼멘소리를 했다.

노동계는 IMF 이후 몰아친 무분별한 정리해고와 임금삭감 등에 맞서 고용보장과 생존권보장을 위한 투쟁을 전개했다. 그러나 임금을 삭감당하는 대신 맺은 고용안정협약은 구조조정의 회오리 속에서 잉크가 채 마르기도 전에 휴짓조각이 돼버렸다. 98년 2월 노사정 대타협을 통해 정리해고를 수용한 대신 정부로부터 받아낸 개혁약속이 ‘현금을 주고 부도난 어음을 받아낸’ 셈이 돼버린 것이다. 인하대 윤진호 교수(경제학)는 “구조조정은 당사자들의 이해관계와 생존이 걸린 문제인데도 노동자들과 합의나 협의없이 진행되고 있다”며 “일방적으로 노동자에게 고통을 감내하도록 요구할 것이 아니라 사회통합적 구조조정 방식이 돼야 한다”고 말했다. 정부가 내년 2월까지로 시한을 못박은 채 진행되고 있는 고지점령식 구조조정이 노동계의 투쟁을 낳고 있다는 것이다.

구조조정 과정에서의 노동계 배제는 유연하지 못한 구조조정 정책에 대한 비판으로 이어진다. 현실이 변화해도 정부가 이에 아랑곳 않은 채 밀어붙이기로 일관하고 있다는 것이다. 공기업 민영화와 관련해 한 노동전문가는 “2∼3년 전에 만들어진 구조조정안을 고집하고 있는 태생의 문제”라며 “어느 한쪽에서라도 구멍이 나거나 약한 모습을 보이면 전체 개혁구도가 흐트러질까 전전긍긍하는 정부의 자세가 노동계의 투쟁을 낳고 있다”고 말했다.

대화국면으로 바뀌기는 어려울 듯

정부의 이런 태도는 경제위기의 책임을 노동쪽에 떠안기는 모습으로 나타나고 있다. 정부가 공적자금 투입조건으로 금융기관 노조의 인력감축 동의서 제출을 의무화한 데 대해 금융산업노조 현기현 부장은 “동의서 요구는 경제실패를 노조에 책임지우려는 것”이라며 “대우자동차와 한보철강 매각 실패로 인한 2차 구조조정의 고통을 노동자들에게 떠넘기고 있다”고 분통을 터뜨렸다. 국난극복을 위해 양보를 거듭해왔지만 기다리고 있는 건 ‘더 많은’ 양보 요구뿐이라는 것이다.

이제 더이상 밀릴 수 없다는 절박감이 양대 노총의 연대투쟁으로 표현됐지만, 한전노조의 파업철회에서 보이듯, 이번 겨울투쟁이 순탄치는 않을 전망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민주노총 손낙구 실장의 말은 점차 불이 지펴지고 있는 노정 대결국면이 대화국면으로 바뀌기는 쉽지 않을 것임을 보여준다. “구조조정만이 살길이라는 데 노동계가 그동안 가위눌려왔다. 구조조정에 대한 거역은 경제를 망치는 것으로 알았던 것이다. 그러나 이제 노동현장은 이를 수용하지 않는다.”

조계완 기자kyewan@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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