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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슈추적] 실패한 로비, 성공한 수사? 포항제철 납품업체 사기 친인척 측근 연루… 권력형 비리에 봐주기 의혹도
특히 ‘애꿎게’ 구설수에 오른 것일뿐이라고 하지만, 김대중 대통령의 친조카가 사건의 한 구석에 등장한다는 점에서 더욱 그렇다. 수사를 맡았던 대구지검 포항지청쪽의 설명을 바탕으로 사건을 간추려 재구성해보자.
사기혐의자가 납품재계약 시도해
지난 9월 사기혐의로 구속기소된 문창일(45·김대중 대통령의 동생인 김대현 한국사회경제연구소 이사장의 전 비서이자 문형태 전 체신부 장관의 아들)씨 등 4명이 구용회(40·세진산업 대표)씨로부터 4차례에 걸쳐 1억9천만원을 받아 나눠가진 것은 지난해 4월부터 7월 사이. 돈의 명목은 포항제철과의 납품계약을 재개시켜주겠다는 청탁조였다. 그동안 포철에 염화칼륨을 납품해오던 구씨는 당시 포철과의 거래가 끊긴 상태였다. 그는 포철과 거래하면서 납품차액을 더 챙기기 위해 가짜 수입면장을 포철에 제출했다가 들통나는 바람에 포철쪽으로부터 사기혐의로 고소돼 있었다. 이런 형편에서 자신이 포철과 거래를 다시 트는 것은 누가봐도 불가능했다. 그래서 권력층을 동원해보자는 게 구씨의 심산이었다. 구씨는 일단 과거에 자신의 회사에 다닌 적이 있던 김성권(38·정주일 전 국회의원 보좌관)씨에게 이런 고충을 털어놓으면서 권력핵심부와 끈이 닿을 수 있는지 타진했다. 이를 들은 김성권씨는 자신의 선배인 김태호(43·박재규 통일부 장관 조카사위)씨에게 다시 도움을 구했고, 김태호씨는 자신의 동업자인 건설업자 윤여성(45)씨에게 돈을 벌 좋은 기회가 생겼다며 구씨의 사정을 설명해줬다. 윤씨는 즉각 친구사이였던, 이번 사건의 한복판에 있는 문창일씨에게 알렸고 이런 과정을 거쳐 구씨는 드디어 문씨와 선이 닿게 됐다. 업자 구씨는 현직 대통령 동생의 비서인 문씨 정도라면 납품재계약을 성사시켜줄 것으로 믿었다. 당연히 청탁명목으로 문씨를 비롯한 4명에게 구씨의 돈 1억9천만원이 건너갔다. 4명은 구씨에게 “여권실세의 친동생에게 청탁해 재계약을 할수 있도록 해주겠다”고 장담했다. 청탁자금을 받은 문씨는 곧바로 ‘행동’에 들어갔다. 그러나 청탁을 하려면 포항제철 유상부 회장과 직접 만나서 얘기해야 하는데 유 회장이 자신을 만나줄 리 만무했다. 그래서 생각한 것이 당시 자신이 비서로 있던 김 대통령의 동생인 김대현 이사장의 이름을 파는 것이었다. 김 이사장을 앞세운 문씨의 요청에 대해 유상부 회장은 처음에는 거절했지만 나중에는 시간을 내 만나주겠다고 약속했다. 약속은 됐지만 정작 청탁받은 납품 재계약건을 성공시키는 게 걱정이었던 문씨는 ‘또다른’ 권력주변의 인물을 팔기로 작정했다. 그 대상이 바로 김 대통령의 친조카인 김홍석(38·항공회사 차장·김대현 이사장의 아들)씨였다. 문씨는 유 회장과의 약속 당일 “차나 한잔 하자”며 홍석씨를 불러냈다. “포철 유 회장을 만나러가는 길인데 인사나 하고 가라”며 그 자리에 끌어들인 것이다. 그리고 홍석씨는 실제로 문씨와 유 회장이 만나는 자리에 동석했다. 하지만 유 회장은 대번에 문씨의 청탁을 거절한 것으로 알려졌다. 그래서 이 일은 결국 ‘실패한 로비’로 그치고 4명이 공모해 업자 구씨로부터 청탁자금을 뜯어낸 단순 사기극으로 끝나게 됐다.
청탁자금 뜯어낸 단순 사기극일 뿐인가
사건의 파장은 청와대에도 번졌다. 수사 도중 업주 구씨가 문씨뿐만 아니라 청와대 민정수석실 4급 행정관 김상원(39)씨에게도 적극적으로 로비한 것이 밝혀진 것이다. 김씨는 구씨로부터 1억2천만원을 받은 혐의로 지난 10월20일 포항지청에 구속됐다. 구씨와 김씨는 다른 사람의 소개로 이미 연줄을 트고 있었던 사이였다. 특히 김씨는 나중에 발각될 경우를 대비해 자신이 은행에서 빌려쓴 대출금을 구씨가 대신 갚아주는 형식을 취했다. 실제로 김씨는 검찰에서 “포철 납품건과는 무관하다. 구씨로부터 단순히 빌린 돈일뿐이다”고 주장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포항지청쪽은 이런 모든 과정을 낱낱이 밝혀낸 만큼 매우 ‘성공한 수사’였다고 자부하고 있다. 과연 그런가. 이번 사건은 청탁자리에 동석한 것으로 확인된 △김홍석씨에 대한 조사 △수사결과 발표 과정 △포철의 납품 이권을 둘러싼 권력형 비리 등 세 가지 대목에서 여전히 짚어볼 여지가 남아 있다. 먼저 김홍석씨에 대한 검찰조사가 전혀 이뤄지지 않았다는 점이다. 포항지청 문규상 형사1부장검사는 홍석씨 조사와 관련해 제기되고 있는 ‘대통령 친인척 봐주기’ 의혹에 대해 “문씨와 다른 관련자들의 진술에 비춰볼 때 홍석씨는 전혀 혐의가 없고, 돈이 오고가거나 어울려 다닌 아무런 흔적도 발견할 수 없었다”며 “게다가 홍석씨가 일부 이용당한 느낌도 있어서 아예 부르지도 않았고 조사하지도 않는 것”이라고 잘라 말했다. 문 부장검사는 되레 “아예 봐줄 작정이었다면 문씨를 비롯해 관련자들을 죄다 봐주지 홍석씨만 빼준다는 게 말이 되느냐”고 되물었다. 이에 대해 홍석씨는 <한겨레21>과의 전화통화에서 “얼결에 별뜻없이 간 것이다. 유 회장과는 자기소개하는 정도로 인사만 했을 뿐이다. 형(문창일)과 유 회장이 그때 무슨 말을 나눴는지도 모른다”고 해명했다. 이어 그는 “이번 사건에 대해서도 보도난 걸 보고 나중에 알았다. 검찰로부터 전화 한통 받은 일이 없다”고 말했다.
언론 보도 뒤에 수사발표한 까닭은…
홍석씨는 전화통화에서 “얼굴도 모르는 다른 사람이 사기를 치는 이런 일들이 내 주변에 가끔씩 있다. 그래선지 누구누구가 맞느냐는 확인을 요구하는 전화도 온다”고 말했다. 국민의 정부 들어 이런 일들을 겪어온 그였기 때문에 유상부 회장을 만나는 자리에 문씨와 선뜻 동행한 것은 더더욱 말끔하지 않다. 수사발표 과정도 썩 매끄럽지 못하다. 포항지청은 수사를 마무리한 지 보름이 지날 때까지 이 사건을 공개하지 않고 있다가 <매일신문>이 이 사건을 터뜨리자 사실해명 차원에서 뒤늦게 수사내용을 공개했다. 이에 대해 문규상 부장검사는 “단순 사기사건인 만큼 발표할 가치가 없었다”고 말했다. 하지만 검찰 안팎에서는 “검찰의 수사발표 관행에 비춰볼 때 이 사건을 발표하지 않은 것은 윗선의 눈치를 본 것이 아니냐”는 말이 나돌고 있다. 특히 이번 사건은 역대 정권 때마다 말로만 떠돌던 포철 납품권을 둘러싼 권력형 로비가 현실로 드러났다는 점에서 주목된다. 과거 포철에서 근무했던 한 관계자는 “정권이 바뀔 때마다 포철 납품권을 둘러싸고 정계실력자가 개입한다는 소문이 무성했다. 비록 실패로 끝났지만 이 사건은 포철을 둘러싼 권력형 로비가 어떻게 작동되는지 드러내주는 사례”라고 말했다. 실제로 포철 감사1팀은 “포철 납품관련 계약은 자재계약과 원료구매계약 등 굵직하고 자잘한 것을 합쳐 한달에 수천건에 이른다. 요즘에도 정치권이나 권력주변 인물들이 납품거래를 청탁한다는 소문들이 심심찮게 나돌고 있다”고 말했다. 공기업이다보니 정치권력의 입김에 휘둘리기 쉽다는 확인되지 않는 풍문이 떠돈데다 포철의 덩치가 워낙 크다보니 한건만 거래를 터도 큰 돈벌이가 된다는 생각에서 권력을 앞세운 검은 시도가 끊이지 않고 있다는 것이다. 실제로 구씨는 수입면장 위조 혐의로 지난해 4월 경찰에 형사고발된 상태에서도 “포철쪽의 납품계약 해지가 억울하다”며 청와대에 진정서를 내기도 했다. 이에 대해 검찰은 “포철과의 납품거래가 자기 수입원의 대부분을 차지한데다 안정적으로 돈을 벌수 있는 루트(포철 납품거래)를 포기하고 싶지 않았을 것”이라며 “그런 만큼 계약을 되살리기 위해 자신이 이용할 수 있는 모든 방법을 동원한 것으로 보인다”고 설명했다. 사건은 일단락됐지만 이번 사건은 집권 중반을 넘긴 대통령의 친인척 관리에 경종을 울린다. 업주 구씨는 포철에 납품비리로 고소된 상황에서도 권력의 끈을 잡으면 어떻게든 재계약이 될 수 있다고 믿었고, 불가능한 일을 가능하게 해주겠다는 대통령 친인척 측근의 사기에 걸려들었다. 양쪽 모두 권력을 동원하면 일이 풀릴 것이라고 생각한 데서 공모가 시작됐고, 검찰 수사대로라면 권력 동원은 대통령 조카를 얼굴마담으로 내세운 ‘의도된 동행’으로 나타난 셈이다. 물론 결과는 불발로 그치면서 일단 사기극으로 막을 내리기 했지만. 먹을 게 있는 곳에 파리떼가 몰리듯 돈되는 곳에 사기범이 들끓는다. 그러나 포철 납품로비사건에서 보듯 권력층 빙자사기는 피해자와 가해자 양쪽의 이해가 맞물려 벌어지는 경우가 많다. 수사관계자들은 “터무니없는 사건의 피해자들일수록 어리숙해서 속는 경우도 있지만, 대부분 대통령이나 고위층의 권위에 기대 온당치 못한 이득을 취하려다 당한 것”이라고 분석했다.
권력 입김이 통하는 불투명 사회의 단면
하지만 둘째아들의 권력남용으로 무참하게 허물어졌던 ‘문민정부’의 과오가 ‘국민정부’에서 되풀이되지 말라는 법은 없다. ‘권력에 기대면 안 될 일도 된다’는 그릇된 믿음이 통용되는 한 권력을 빙자한 사기는 지속될 수밖에 없다. 이런 잘못된 신화를 깨는 길은 권력주변에 있는 사람들의 조신한 처신과 더불어 페어플레이가 이뤄지는 투명한 사회를 만들겠다는 국민 의식이 뒤따라야함은 물론이다. 김소희 기자sohee@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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