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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슈추적] 막무가내식 포로송환론 안된다 국군포로 문제의 실체와 해법 차분하게 따질 때… 당사자들의 절절한 소망에도 눈감지 말아야
포로 가족단체는 시위 불참
그러나 이를 위해서도 우리 사회는 좀더 차분해질 필요가 있다. 과연 문제의 성격은 무엇이며(실체론), 해결책은 무엇이 가장 빠른 것인지(해법론)를 따져봐야 한다. 정치적 이해타산보다는 당사자들의 목소리에 좀더 귀를 기울일 필요가 있음은 더말할 나위가 없다. 비전향 장기수 63명이 송환된 지난 9월2일 임진각에서는 시위가 벌어졌다. 납북자 가족 30여명과 6·25전몰군경유자녀회, 6·25참전전우회 등 ‘안보단체’ 회원 150여명이 참가했다. 이들은 통일대교 남단에서 국군포로와 납북자들의 즉각 송환을 촉구했다. 참가자들은 “국군포로와 납북자를 찾으러 북으로 가자”, “정부가 못하면 우리가 구출한다”는 구호를 외치며 통일대교를 넘으려다 경찰과 충돌했다. 그러나 같은 시각 국군포로 가족들의 단체인 ‘국군포로협의회’ 회장 허태석(62)씨는 집에 머물고 있었다. 당장 현장으로 달려가고픈 마음이 없지 않았지만 억눌렀다. 이 단체도 애초 시위 주최쪽으로부터 참여를 종용받았다고 한다. 하지만 참여하지 않기로 결정했다. 허씨는 말한다. “국군포로 문제를 북한이 존재조차 인정하지 않는데, 우리가 나서서 떠든다고 문제가 해결되겠습니까. 오히려 북에 있을 우리 형제들에 대해 통제가 더욱 심해지고 불이익만 가중될 것 같다고 생각했습니다.” 국군포로와 납북자 문제를 둘러싼 우리 사회 내부의 논쟁은 심각하다. 한나라당을 비롯한 보수진영에선 “비전향 장기수를 송환하는 마당에 국군포로 등은 왜 돌려받지 못하느냐”며 즉각 맞교환론을 주장한다. 반대로 정부여당은 주춤주춤하는 모습이다. 문제를 회피하려는 듯한 인상이 없지 않다가 최근 “넓은 의미의 이산가족 범주에 포함시켜 생사 확인, 서신 교환, 상봉 등의 단계를 밟아나가자”라는 입장을 정리했다. 그러나 과연 무엇이 옳고 그른지를 놓고 양쪽이 정면으로 토론하는 모습은 찾아보기 어렵다. 그러다보니 남한사회 내부의 또다른 정쟁의 소재가 된 인상마저 드리워지고 있다. 일단 국군포로 문제에 집중해보자. 첫번째로 중요한 것은 국군포로의 규모와 발생 원인 따위의 실체를 따져보는 일이다. 국방부 발표에 따르면 미귀환 국군포로는 1만9천여명으로 추정된다. 이 가운데 귀환 국군포로 등의 진술로 명단이 확인된 사람이 351명이라고 한다. 2만명에 육박하는 엄청난 숫자가 한국전쟁 종전 50년이 되도록 자의에 반해 억류되어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1만9천여명이란 숫자는 사실 누구도 자신하지 못하는 것이다. 국방부 설명에 따르면 이 숫자는 97년 10월 병적부를 전산화하면서 실종 상태였던 4만1971명 가운데 유가족 신고와 증언자료를 토대로 2만2562명을 전사처리하고, 남게 된 인원(1만9409명)이다. 즉 남쪽에서 확인되지 않은 사람은 자동적으로 북한에 억류돼 있는 것으로 추정한 수치일 따름이다. 북한까지 들어가서 확인하기는 곤란하다 하더라도 그 밖의 다른 여러 형태로 실종됐을 가능성을 덮어둔 채 이들 모두를 미귀환 국군포로로 분류하는 단순 도식이 등장한 것이다.
반공포로 출신 단체의 시각
지난 몇해 사이 북한을 탈출해 귀환한 포로들의 증언에 따라도 국군포로의 전체 현황 규정은 여전히 어렵다. 94년 귀환한 조창호씨는 51년 5월 제101 포병대대 관측장교로 작전중 강원도 인제에서 중공군에게 붙잡혔다고 한다. 조씨는 자신을 활용하려는 인민군의 회유에도 불구하고 이를 거절하고 탈출을 시도했다가 다시 붙잡혔다. 52년 2월 북한당국은 그에게 ‘월남을 기도한 반동분자’라는 낙인을 찍어 13년 노동교화형에 처했다. 따라서 그는 종전 당시 포로 송환 대상에 오르지도 못했다고 증언했다. “본인의 자유의사에 반해 억류한 국군포로는 1명도 없다”는 북한쪽 주장이 사실과 다르다는 사례로 볼 수 있는 셈이다. 반면에 9월 초순 정부가 발표한 탈북 국군포로 세 사람의 면면은 성격이 조금 다르다. 이 가운데 김아무개(71·일병)씨는 50년 12월에 횡성에서 붙잡혔다가 51년 6월에 사상전향을 했으며 그뒤 인민군에 복무했다고 관계당국의 조사에서 진술했다. 그는 또한 73년 11월21일에는 노동당에도 입당했다고 한다. 또다른 귀환 포로 허아무개(68·이등중사)씨는 53년 5월4일 금화에서 포로가 됐으며 북한 생활중 62년 7월19일 역시 노동당에 입당했다고 한다. 이들이 사상전향을 했으며 노동당에 입당했다고 해서 고향인 남한으로 되돌아와서는 안 된다는 이야기는 물론 아니다. 세상 삶에는 여러 변화가 있게 마련임을 누구나 이해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들의 사례는 최소한 ‘1만9천여명’ 전원이 한국전쟁 종전 당시 자의에 반해 강제로 북한에 남은 것은 아님을 시사하는 단서임에는 분명하다. 국군포로 문제는 실체론뿐 아니라 해법론도 간단하지 않다. 9월2일 납북자 가족 및 안보단체들의 임진각 시위를 앞두고 거제도 반공포로 출신 단체인 통일안보중앙협의회도 참여 제의를 받았다고 한다. 그러나 이들은 거절했다. “떠들고 나선다고 해결될 문제가 아닌데다, 북한쪽이 거제도 반공포로들을 돌려보내라고 주장하면 어떻게 할 거냐”라는 생각 때문이었다.
역대 정권, 너무 소극적이었다
남한 정부는 그동안 국제기구를 통해 송환문제를 간간이 제기하긴 했다. 97년 11월에는 세계제대군인연맹 총회에서 국군포로 송환촉구 결의안을 채택하도록 했으며, 98년 4월에는 국제한국전참전향군연맹 집행위원회가 결의안을 채택해 국제사면위원회에 전달하도록 했다. 98년 10월에는 대한적십자사를 통해 국제적십자위원회에 국군포로 문제 해결에 나서주도록 요청했다. 이에 따라 국제적십자위원회는 북한쪽에 생존 여부와 서신 교환을 단계적으로 추진하자고 제안했으나 99년 3월 북한은 이를 거부했다.
그러나 정부 차원에서 국군포로 문제에 소극적이었다는 지적은 역대 정권을 가릴 것 없이 피하기 어렵다. 남북기본합의서를 이끌어냈던 6공화국과 정상회담 일보 직전까지 갔던 김영삼 정부, 정상회담을 성사시킨 현 정부 모두 정치적 치적으로 남을 큰 틀의 합의 도출에 무게를 실었고, 국군포로 문제 등과 관련한 당사자들의 절절한 목소리에 진지하게 귀를 기울인 흔적은 적기 때문이다. 이에 따라 국군포로협의회의 경우는 자신들의 형제를 제3국을 통해 은밀하게 탈북시키는 방안을 유일한 해법으로 꼽고 있다고 한다. 회장인 허태석씨는 “정부나 여야 정치권 모두에 기대를 잃은 지 오래다. 다만 제3국행 단계까지 성공시킨 국군포로의 국내 귀환 문제라도 정부가 도와줬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박창식 기자cspcsp@hani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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