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
|
|
[이슈추적] 장기수의 교환상대는 북파간첩! 국군포로와 인민군포로의 참역사에 대한 올곧은 접근을 위하여
즉각송환론의 역사왜곡성
엄연한 역사적 진실인 북파간첩의 존재, 인민군포로의 불법적 억류, 납남자의 존재 등을 인정하는 선결조건이 이루어지지 않는 상태에서 국군포로나 납북자 등의 즉각송환을 요구할 수 없다. 이는 우격다짐 논리이고 무조건 빨갱이로 몰아 멋대로 단죄하는 반공매카시즘의 재현이다. 그러나 더 심각한 문제는 우리의 일부 수구 언론이나 정략적이고 선동적인 정치세력들이 즉각송환론의 비합리성과 역사왜곡성이라는 문제점을 잘 알면서도 이를 지속적으로 부추기고 있으며, 이를 잘 모르는 일반 대중이 이에 심정적으로 동조하고 있는 데 있다. 전쟁포로의 문제는 휴전협정에서 가장 우여곡절이 많았던 논란거리였다. 전쟁포로 송환원칙의 합의 과정에서 미국과 북한·중국 사이의 의견충돌로 무려 19번의 휴회가 있었고, 199일간(1952년 10월8일∼1953년 4월25일)의 최장기 휴회가 있을 정도였다. 다른 의제인 군사분계선, 휴전감시 국제기구 구성, 군사력 증강 억제문제 등은 빨리 합의를 이루었으나 바로 포로송환 문제 때문에 전쟁이 거의 2년 가까이 지연되었다. 이 지연으로 전쟁은 소모전에 들어가 남쪽이 13만, 북쪽이 25만명 가까이 사상자를 내는 반인도주의적 결과를 낳았으며, 남북 주민의 전쟁참화와 고통은 더 심화했다. 또 결과적으로 국군포로나 인민군포로의 이산가족 문제를 대거 남겼다. 이의 근본적 요인은 미국이 스스로 조인하고 비준한(1951년 5∼6월경) 1949년 제네바협정 11조(전쟁이 끝나면 전쟁포로는 지체없이 석방되고 본국으로 송환되어야 한다)의 자동송환 원칙을 비준 한두달 만(1951년 7월5일)에 위배한 데서 비롯되었다. 미국이 군 심리전 책임자가 제안한 자유송환 원칙을 전격적으로 요구한 것이다.
국제사회의 지탄을 받은 자유송환 원칙
그러나 이 자유송환 원칙은 미국 스스로 조인하고 비준한 것을 겨우 두달 만에 뒤집는 이율배반적 행위로 국제사회의 지탄을 받게 되고, 북한에 수용되어 있는 미군포로의 송환을 보장받지 못할 수 있다는 문제점을 안고 있었다. 그래서 당시 변호사 출신인 에치슨 국무장관과 미군 사령관인 릿지웨이 및 미국 국방부조차 이를 반대하였다. 그런데도 미국은 반공매카시즘에 힘입어 자유송환 원칙을 채택하고 북한과 중국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대대적인 폭격과 무력공세의 강화로 이를 관철시켰다. 전쟁포로를 비교하면 우선 그 숫자에서 인민군포로가 국군포로보다 훨씬 많다. 또 남한은 인민군포로에 대하여 불법행위를 많이 저질렀다. 인민군포로로 북쪽 송환자가 7만6천명 정도이고, 남쪽 송환자가 7600명 정도이다. 또한 이승만 당시 대통령은 이른바 ‘반공포로’라는 이름으로 2만5천∼2만7천명을 불법적으로 석방하여 남쪽에 잔류시켰다. 여기에다 방장련씨 등이 밝혔듯이 인민군으로 남부전선에 참전하다 인천상륙작전으로 퇴로가 막혀 빨치산이 되어 결국 포로가 되었지만 포로로 분류되지 못하고 국방경비대법 등으로 남쪽에 억류된 숫자가 한 포로수용소에만 200∼300명 정도로 전체가 약 1천명에 이를 것으로 추정된다. 또 45년의 옥살이로 세계 최장기수 기록을 가졌던 김선명씨와 같이 인민군으로 체포되었으나 제네바협정에 따른 전쟁포로로 분류되지 못하고 국방경비대법에 따라 부역죄와 간첩죄를 뒤집어쓰고 사형되거나 장기수가 된 경우도 있다. 또 남쪽 송환자 7600명 가운데는 고문이나 폭력에 의해 강제적으로 남쪽을 택할 수밖에 없었던 포로가 상당히 많을 것으로 추정된다. 그래서 남쪽에 남게 된 인민군포로 약 3만6천∼3만7천명 가운데는 비자발적으로 잔류한 숫자가 상당히 많을 것으로 추정된다. 인민군포로에 관하여 남한과 미국의 불법성이나 문제점은 아래와 같은 사항에서도 잘 드러난다. 미국은 이승만의 ‘반공포로’ 석방에 당혹하여 이승만을 제거할 쿠데타를 계획했다가 마지막 순간에 철회하기도 했다. 또 포로수용소에서는 반공·친공 포로간에 자유송환 심사 과정을 둘러싸고 살육전이 전개되었고, 이 와중에 거제도 포로수용소장인 도드 준장이 포로에게 납치되었다. 이를 계기로 포로들에 대한 잔학행위, 강제심사 등이 알려져 미국에 대한 비판여론이 세계적으로 고조되기도 하였다. 이러한 수용소 내의 살육행위에 염증을 느낀 인민군포로 97명은 남과 북을 모두 등지고 인도나 브라질로 떠났다. 인민군 장교 주영복은 20일간의 반공특공대의 고문과 구타에 못 이겨 도망을 쳐 결국 브라질을 택했다. 중국군포로 가운데 1만5천명은 주로 대만 특수부대의 노골적 폭력에 의해 대만으로 강제송환되어 이산가족이 되었다.
국군포로, 인민군포로에 비해 훨씬 적어
장기수 최하종씨의 증언에 의하면 국군포로에게 “국방군 생활중 배가 고프지 않았나? 교육을 제대로 받을 수 있었나? 인간대접 제대로 받을 수 있었나?”고 물으면 모두들 부정 일변도였다 한다. 그러면 인민군에 가면 배가 고프지 않고 뒤에 교육도 무료로 받을 수 있고, 인간대접도 제대로 받을 수 있다고 하면 대부분 인민군으로 지원했다는 것이다. 이러한 ‘교화’가 불법적인지, 아니면 귀순인지는 논쟁거리다. 그러나 북한은 이미 1946년 친일파를 청산하고 토지개혁을 통해 민중중심의 사회로 이행이 되어 남쪽의 핍박한 민중생활과는 대조를 이루고 있어 국군포로가 자발적으로 인민군 편입을 원했을 가능성은 높았다. 또 일부의 증언에 따르면 실제로 상당한 숫자가 자원했다. 또 브라질로 간 손천기씨의 회고에 의하면 포로생활 역시 남쪽과는 달리 북쪽에서는 “가혹행위는 없었고 나무 베기 등 노동과 학습·토론이 전부여서 포로들 사이 대립 역시 없었다”고 한다. 인민군포로 가운데 인도나 브라질 행을 택한 숫자는 97명이지만 국군포로로서 제3국행을 택한 숫자는 겨우 2명뿐이다. 이 가운데 한 사람인 손천기씨는 포로수용소의 살육전 때문에 제3국행을 택한 남쪽에 수용된 인민군포로와는 다른 요인 때문에 브라질을 택했다. “종삼(서울 종로3가 사창굴) 출신인 내가 서울로 돌아간들 사람 구실을 할 것 같지 않아 외국행을 택했다.” 국군포로에 대한 북한의 강제억류가 없었다고 보기는 힘들겠지만 최근 남한으로 귀환한 국군포로만을 두고 북한이 국군포로의 자유의사를 무시하고 강제로 억류시켰다고 주장할 수는 없다. 이들은 휴전 당시는 북한에 자발적으로 남았을 수 있고 또 인민군에 편입되었을 수도 있다. 그러나 북한의 최근 식량난과 경제난 때문에 늦게나마 남쪽 귀환을 시도하면서 본인의 의사를 무시하고 강제억류하였다고 주장할 가능성이 충분히 있기 때문이다.
물밑접촉 통한 점진적 해결을
국군포로의 송환이나 상봉추진은 당사자와 그 가족의 현실적 고통을 덜어주는 인도주의에 있다. 진정 이들의 현실적 고통을 들어주려면 실현 불가능한 즉각적이고 자기 부정적인 공개적 접근이 아니라 물밑접촉을 통한 점진적인 해결을 추구해야 한다. 그런데도 일부 정치세력이나 수구언론이 즉각송환을 주장하는 것은 그 의도가 불순할 뿐 아니라 실제 되는 일도 망치게 한다. 피해가족이나 일반인들은 이들의 불순성을 제대로 꿰뚫어보아야 할 것이다.
강정구/ 동국대 교수·사회학
|
. |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