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슈추적 ] 2000년09월20일 제326호 

[이슈추적] 장기수의 교환상대는 북파간첩!

국군포로와 인민군포로의 참역사에 대한 올곧은 접근을 위하여



무릇 역사의 진실과 일반 대중의 역사인식 사이에는 깊은 장막이 가로놓이는 경우가 많다. 특히 과거의 역사가 반민주 독재체제, 파시즘, 반공매카시즘 등으로 점철된 경우에는 이러한 진실과 인식 사이의 괴리가 깊게 마련이다. 우리 현대사에서 바로 이러한 골이 가장 깊은 부분이 한국전쟁일 것이다. 우리 일반 대중의 한국전쟁 인식은 선과 악이다. 북한은 모두가 악(惡)이었다. 대조적으로 이곳 남한은 언제나 피해자였고, 책임은 없고, 민족적이었으며, 북한에 책임을 떳떳이 물을 수 있는 당당한 입장으로 선(善)이라는 것이다. 이것이야말로 한국전쟁에 관한 판에 박은 ‘정답’이다. 이 정답과 조금만 다르면 빨갱이로 낙인찍히고 이 결과 잘못하면 목숨까지 잃을 정도였다.그러나 이러한 일방적 한국전쟁 인식이 역사적 진실과 얼마나 가까운가? 또 남북화해와 통일을 추진하는 오늘의 시점에 걸맞은 인식인가? 이에 대한 성찰을 위해 최근 비전향장기수의 북송을 계기로 상호주의 원칙에서 국군포로의 즉각적인 송환 주장을 내세우는 국군포로 즉각송환론의 문제점을 살펴보겠다. 이를 통하여 한국전쟁에 대한 일방적 남한의 인식이 얼마나 진실과는 거리가 멀며, 이에 기반한 국군포로 즉각송환론이 얼마나 단선적이고 즉흥적이며 일방적 주장인지를 점검해 보겠다.

즉각송환론의 역사왜곡성


(사진/52년 7월 거제도 포로수용소를 방문한 이승만 대통령이 반공포로들의 환영을 받고 있다)


먼저 상호주의원칙에서 장기수의 등가교환 상대는 북파간첩이지 국군포로나 납북자가 아니다. 남한이 보낸 북파간첩 가운데 실종된 사람이 7726명이고 미군이 보낸 간첩 가운데 실종자가 3천명에 이른다 한다. 또 국군포로의 상대는 인민군포로이고 납북자의 상대는 납남자이다. 최소한 이러한 등가교환의 대칭적 상대를 인정할 줄 알고 이 바탕 위에서 이산가족 문제의 해결을 시도해야 한다.

엄연한 역사적 진실인 북파간첩의 존재, 인민군포로의 불법적 억류, 납남자의 존재 등을 인정하는 선결조건이 이루어지지 않는 상태에서 국군포로나 납북자 등의 즉각송환을 요구할 수 없다. 이는 우격다짐 논리이고 무조건 빨갱이로 몰아 멋대로 단죄하는 반공매카시즘의 재현이다. 그러나 더 심각한 문제는 우리의 일부 수구 언론이나 정략적이고 선동적인 정치세력들이 즉각송환론의 비합리성과 역사왜곡성이라는 문제점을 잘 알면서도 이를 지속적으로 부추기고 있으며, 이를 잘 모르는 일반 대중이 이에 심정적으로 동조하고 있는 데 있다.

전쟁포로의 문제는 휴전협정에서 가장 우여곡절이 많았던 논란거리였다. 전쟁포로 송환원칙의 합의 과정에서 미국과 북한·중국 사이의 의견충돌로 무려 19번의 휴회가 있었고, 199일간(1952년 10월8일∼1953년 4월25일)의 최장기 휴회가 있을 정도였다. 다른 의제인 군사분계선, 휴전감시 국제기구 구성, 군사력 증강 억제문제 등은 빨리 합의를 이루었으나 바로 포로송환 문제 때문에 전쟁이 거의 2년 가까이 지연되었다. 이 지연으로 전쟁은 소모전에 들어가 남쪽이 13만, 북쪽이 25만명 가까이 사상자를 내는 반인도주의적 결과를 낳았으며, 남북 주민의 전쟁참화와 고통은 더 심화했다. 또 결과적으로 국군포로나 인민군포로의 이산가족 문제를 대거 남겼다.

이의 근본적 요인은 미국이 스스로 조인하고 비준한(1951년 5∼6월경) 1949년 제네바협정 11조(전쟁이 끝나면 전쟁포로는 지체없이 석방되고 본국으로 송환되어야 한다)의 자동송환 원칙을 비준 한두달 만(1951년 7월5일)에 위배한 데서 비롯되었다. 미국이 군 심리전 책임자가 제안한 자유송환 원칙을 전격적으로 요구한 것이다.

국제사회의 지탄을 받은 자유송환 원칙


(사진/전쟁포로문제는 휴전협정에서 가장 유여곡절이 많았던 논란거리였다. 미국과 북한·중국 사이에 무려 19번이나 휴회가 있었다)


미국이 내세운 포로 자유송환은 포로들에게 자유의사를 물어 그들이 원하는 곳으로 송환하는 것으로 도덕적이고 휴머니즘적이어서 국제사회의 지지를 받는다는 것이었다. 물론 자유송환 원칙은 겉으로 보기엔 인도주의적 측면이 있긴 하지만 포로들을 적국에서 관리하기 때문에 포로들에게 폭력, 고문, 협박, 거짓 등으로 자유송환이 아니라 강제억류를 할 수 있다는 데 문제점이 있다. 49년의 제네바협정도 공정한 자유의지 확인이 현실적으로 어려운 점이 고려되어(물론 다른 요인도 있지만) 자유송환 대신 자동송환 원칙이 채택되었다. 미국은 상대적으로 인민군포로가 수적으로 많고, 이 인민군포로 가운데 의용군으로 입대한 남쪽 출신이 있어 이들이 남쪽을 선택할 것이라는 계산을 깔고 있었다. 비록 집이 남쪽이기 때문에 남쪽을 선택한 인민군포로까지 공산주의가 싫어서 남한을 택하였다고 선전할 수 있게 된 것이다.?????

그러나 이 자유송환 원칙은 미국 스스로 조인하고 비준한 것을 겨우 두달 만에 뒤집는 이율배반적 행위로 국제사회의 지탄을 받게 되고, 북한에 수용되어 있는 미군포로의 송환을 보장받지 못할 수 있다는 문제점을 안고 있었다. 그래서 당시 변호사 출신인 에치슨 국무장관과 미군 사령관인 릿지웨이 및 미국 국방부조차 이를 반대하였다. 그런데도 미국은 반공매카시즘에 힘입어 자유송환 원칙을 채택하고 북한과 중국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대대적인 폭격과 무력공세의 강화로 이를 관철시켰다.

전쟁포로를 비교하면 우선 그 숫자에서 인민군포로가 국군포로보다 훨씬 많다. 또 남한은 인민군포로에 대하여 불법행위를 많이 저질렀다. 인민군포로로 북쪽 송환자가 7만6천명 정도이고, 남쪽 송환자가 7600명 정도이다. 또한 이승만 당시 대통령은 이른바 ‘반공포로’라는 이름으로 2만5천∼2만7천명을 불법적으로 석방하여 남쪽에 잔류시켰다. 여기에다 방장련씨 등이 밝혔듯이 인민군으로 남부전선에 참전하다 인천상륙작전으로 퇴로가 막혀 빨치산이 되어 결국 포로가 되었지만 포로로 분류되지 못하고 국방경비대법 등으로 남쪽에 억류된 숫자가 한 포로수용소에만 200∼300명 정도로 전체가 약 1천명에 이를 것으로 추정된다.

또 45년의 옥살이로 세계 최장기수 기록을 가졌던 김선명씨와 같이 인민군으로 체포되었으나 제네바협정에 따른 전쟁포로로 분류되지 못하고 국방경비대법에 따라 부역죄와 간첩죄를 뒤집어쓰고 사형되거나 장기수가 된 경우도 있다. 또 남쪽 송환자 7600명 가운데는 고문이나 폭력에 의해 강제적으로 남쪽을 택할 수밖에 없었던 포로가 상당히 많을 것으로 추정된다. 그래서 남쪽에 남게 된 인민군포로 약 3만6천∼3만7천명 가운데는 비자발적으로 잔류한 숫자가 상당히 많을 것으로 추정된다.

인민군포로에 관하여 남한과 미국의 불법성이나 문제점은 아래와 같은 사항에서도 잘 드러난다. 미국은 이승만의 ‘반공포로’ 석방에 당혹하여 이승만을 제거할 쿠데타를 계획했다가 마지막 순간에 철회하기도 했다. 또 포로수용소에서는 반공·친공 포로간에 자유송환 심사 과정을 둘러싸고 살육전이 전개되었고, 이 와중에 거제도 포로수용소장인 도드 준장이 포로에게 납치되었다. 이를 계기로 포로들에 대한 잔학행위, 강제심사 등이 알려져 미국에 대한 비판여론이 세계적으로 고조되기도 하였다.

이러한 수용소 내의 살육행위에 염증을 느낀 인민군포로 97명은 남과 북을 모두 등지고 인도나 브라질로 떠났다. 인민군 장교 주영복은 20일간의 반공특공대의 고문과 구타에 못 이겨 도망을 쳐 결국 브라질을 택했다. 중국군포로 가운데 1만5천명은 주로 대만 특수부대의 노골적 폭력에 의해 대만으로 강제송환되어 이산가족이 되었다.

국군포로, 인민군포로에 비해 훨씬 적어


(사진/포로들의 자유송환은 강제억류의 가능성이라는 문제점을 안고 있었다.포로수용소 내의 유혈폭동을 진압하는 UN군)


이에 비해 국군포로는 숫자도 훨씬 적고 ‘반공포로’ 석방과 같은 불법행위가 북쪽에서는 별로 드러나지 않고 있다. 국군포로로 남쪽 송환자는 8300명 정도이고, 북쪽 송환자가 330명 정도이다. 국군포로 전체의 숫자가 인민군포로에 비해 훨씬 적은 것은 첫째, 인천상륙작전과 같이 국군의 퇴로가 차단되어 바로 포로가 되거나 빨치산이 되었다 포로가 되는 숫자가 상대적으로 적었다. 둘째는 국군포로 가운데 많은 숫자는 북한의 ‘교화’에 따라 인민군으로 편입되었다. 아마 국방부에서 최근 미귀향 국군포로의 숫자가 1만9천명이라는 이야기는 이들 편입된 국군포로도 포함한 숫자일 것이다.

장기수 최하종씨의 증언에 의하면 국군포로에게 “국방군 생활중 배가 고프지 않았나? 교육을 제대로 받을 수 있었나? 인간대접 제대로 받을 수 있었나?”고 물으면 모두들 부정 일변도였다 한다. 그러면 인민군에 가면 배가 고프지 않고 뒤에 교육도 무료로 받을 수 있고, 인간대접도 제대로 받을 수 있다고 하면 대부분 인민군으로 지원했다는 것이다. 이러한 ‘교화’가 불법적인지, 아니면 귀순인지는 논쟁거리다. 그러나 북한은 이미 1946년 친일파를 청산하고 토지개혁을 통해 민중중심의 사회로 이행이 되어 남쪽의 핍박한 민중생활과는 대조를 이루고 있어 국군포로가 자발적으로 인민군 편입을 원했을 가능성은 높았다. 또 일부의 증언에 따르면 실제로 상당한 숫자가 자원했다.

또 브라질로 간 손천기씨의 회고에 의하면 포로생활 역시 남쪽과는 달리 북쪽에서는 “가혹행위는 없었고 나무 베기 등 노동과 학습·토론이 전부여서 포로들 사이 대립 역시 없었다”고 한다. 인민군포로 가운데 인도나 브라질 행을 택한 숫자는 97명이지만 국군포로로서 제3국행을 택한 숫자는 겨우 2명뿐이다. 이 가운데 한 사람인 손천기씨는 포로수용소의 살육전 때문에 제3국행을 택한 남쪽에 수용된 인민군포로와는 다른 요인 때문에 브라질을 택했다. “종삼(서울 종로3가 사창굴) 출신인 내가 서울로 돌아간들 사람 구실을 할 것 같지 않아 외국행을 택했다.”

국군포로에 대한 북한의 강제억류가 없었다고 보기는 힘들겠지만 최근 남한으로 귀환한 국군포로만을 두고 북한이 국군포로의 자유의사를 무시하고 강제로 억류시켰다고 주장할 수는 없다. 이들은 휴전 당시는 북한에 자발적으로 남았을 수 있고 또 인민군에 편입되었을 수도 있다. 그러나 북한의 최근 식량난과 경제난 때문에 늦게나마 남쪽 귀환을 시도하면서 본인의 의사를 무시하고 강제억류하였다고 주장할 가능성이 충분히 있기 때문이다.

물밑접촉 통한 점진적 해결을


(사진/남한이 보낸 북파간첩 가운데 실종·사망한 사람이 7726명 이고 미군이 보낸 간첩가운데 실종자는 3천여명에 이른다.장기수의 교환상대는 바로 이들이다)


이제까지 살펴본 대로 이승만 정부는 인민군포로에 관한 한 많은 불법행위를 자행했다. 이러함에도 국군포로 즉각송환을 주장할 수는 있다. 그러나 이에는 전제조건이 따른다. 곧, 남한 정부가 과거 인민군포로 처리과정에서 자행한 불법성 등에 대하여 늦게나마 공식적으로 인정하여야 한다. 또 이 피해 인민군포로들에 대한 북송의사를 지금이라도 확인하여 원하는 사람에게 국군송환과 맞교환할 채비를 갖춰야 한다. 그러나 남한정부가 이러한 과거의 불법사실을 계속 부인해 왔으므로 이 시점에서 이를 시인하는 것은 엄청난 부담이 되어 거의 불가능하다. 북한 역시 상대적으로 부담은 덜하지만 그래도 자기부정을 해야 하므로 이를 수용하기 힘들 것이다.

국군포로의 송환이나 상봉추진은 당사자와 그 가족의 현실적 고통을 덜어주는 인도주의에 있다. 진정 이들의 현실적 고통을 들어주려면 실현 불가능한 즉각적이고 자기 부정적인 공개적 접근이 아니라 물밑접촉을 통한 점진적인 해결을 추구해야 한다. 그런데도 일부 정치세력이나 수구언론이 즉각송환을 주장하는 것은 그 의도가 불순할 뿐 아니라 실제 되는 일도 망치게 한다. 피해가족이나 일반인들은 이들의 불순성을 제대로 꿰뚫어보아야 할 것이다.

강정구/ 동국대 교수·사회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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