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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사풍] 꿈꾸는 미래는 삶을 속인다 지워지지 않는 변방의 그늘진 얼굴… 끝없이 내일을 기약해야 하는 사람들
공간이 가지고 있는 상징성으로 인해 이 두 지역만큼 서울을 배경으로 하는 문학작품과 영화 속에서 자주 등장하는 곳도 없다. 시인 유하가 양귀자의 소설 <비오는 날엔 가리봉동에 가야한다>의 제목을 따 <바람부는 날엔 압구정동에 가야한다>를 써내려간 것은 그 대표적인 예일 것이다. 예술작품에서 묘사하는 가리봉동을 추체험하는 것은 압구정동보다 고통스럽다. 단순히 묘사되는 외견의 남루함 때문이 아니다. 상승과 하강, 부러움와 환멸이 역동적으로 혼재하는 압구정동이 달콤쌉싸름한 맛을 주는 반면 상처와 좌절이 절대적인 비중을 차지하는 가리봉동은 지독한 씁쓸함만을 안겨주기 때문이다. 신경숙의 자전적 소설인 <외딴 방>이 기억하는 가리봉동 동신전기주식회사에서의 소녀 시절이나 영화 <박하사탕>에서 엉망이 된 가리봉동우회의 야유회 장면은 실로 원치 않는 놀이기구에 동승하는 불편함을 전한다.
내몰린 사람들의 거처, 심야만화방
“가리봉동에는 유난히 만화가게가 많았어요. 그곳의 만화가게는 적당히 주변이면서도 사실은 80년대의 치열한 현장입니다. 그때 그 현장에 있었던 사람들은 ‘가리봉동’이 갖는 역사적 울림을 잊지 못할 겁니다.” 가리봉동 일대는 1963년 정부의 수출산업 육성방안의 일환으로 ‘구로공단’이 조성되면서 70년대 이후 노동자들의 소비와 문화의 중심지로 부상했다. 80년대 이곳은 치열한 노동운동의 현장이자 상경한 노동자들의 유일한 놀이공간이기도 했다. 가리봉 오거리에는 경찰의 살벌한 감시를 아슬아슬하게 피한 불법 유인물이 뿌려졌고, 주말 저녁 때면 노동에 지친 육신을 달래려는 젊은이들이 삼삼오오 허름한 선술집으로 모여들었다. 그러나 지나가는 이들이 어깨를 부딪힐 정도로 북적이던 가리봉 오거리와 가리봉 시장 일대는 80년대 후반부터 찬바람이 일기 시작했다. 수출 절대 의존국이었던 미국과 일본이 장기불황을 겪고 인건비가 상승함에 따라 구로공단의 많은 사업장이 파산하거나 안산, 시화 등 경기도 일대로 이동하면서 노동자들의 이주행렬도 이어졌다. 노동자들이 기거하던 두평, 세평짜리 쪽방들은 90년대 초반 가출한 10대들의 집성촌으로 변모한다. “가리봉동이란 동네 참 묘한 동네 같아요. 시간이 정지된 느낌이랄까. 영화를 찍던 94년도에 87년 당시의 의상이나 소품 따위를 구하기 위해 청계천을 뒤지고 다녔는데 결국 다 이 동네에 남아 있더군요. 동네의 경관도 노래방과 단란주점이 들어선 것 말고는 87년의 모습 그대로였어요. 80년대 이곳을 채우던 사람들만 사라졌지요.”
거리의 주인은 바뀌어도 표정은 여전
“동시녹음이라 비행기 소리 때문에 애 많이 먹었어요. 촬영 후반기에는 소리만 들어도 스태프들이 화물기다, 747기다 척척 알아맞힐 정도였으니까요. 제게는 도달할 수 없는 이상향처럼 가리봉동 하늘을 나는 비행기가 만화가게나 쪽방보다 더 강렬한 가리봉동의 이미지로 남아 있습니다.” 시나리오에는 없었지만 결국 비행기는 영화에서 가장 인상적인 두 장면에 등장한다. 가리봉 시장의 새벽거리에 서서 커피를 마시는 동팔의 머리 위에 서 있는 동시상영관의 초라한 간판 위로 비행기가 날아가는 장면과 동팔이 죽고 난 뒤 게딱지 같은 가리봉동의 벌집들을 조망하는 옥상 위로 비행기가 지나가는 장면이 그것이다. 가리봉동에 남은 건 비행기 소리만이 아니다. 영화에 등장하던 가리봉 시장통 지하의 만화방이 포스터만 갈아 입은 채 서 있고 미스 오가 커피를 나르던 다방도 여전하다. 거리 곳곳에서 조악한 간판을 단 동시상영관은 이제 심야만화방 대신 갈 곳없는 이들의 쉼터가 되고 있다. 영화에서 내부는 세트였지만 ‘만화나라’로 이름을 바꾼 만화방의 내부도 <장미빛 인생>에 등장하던 때와 크게 다르지 않았다. 만화방에는 영화에서 본 듯한 그 얼굴들이 만화책에 고개를 파묻고 있거나 더러는 누워서 잠을 청하고 있었다. “이제 가리봉동도 폐동이 다 되었어요. 번성할 때는 방, 부엌, 방, 부엌만 빼곡하게 지은 벌집들도 방이 모자라 난리였는데, 이제는 무너뜨린 시장 건물터에도 나서서 지으려는 사람이 없어요. 용역회사가 많다보니 싸움질도 많고, 2년 전부터는 조선족 동포들이 가리봉 시장에 제일 많이 다닙니다.” 11년째 만화가게를 운영하며 촬영 당시에도 많은 도움을 주었던 주인 장병남(71)씨의 말이다. 공장 노동자에서 가출 청소년들로, 그리고 이제 연변 출신의 조선족 노동자들로 가리봉동 거리의 주인은 변하고 있다. 가리봉 시장에 부쩍 늘어난 중국식당에서는 자장면이 아닌 ‘동북식’ 보신탕과 개고기 볶음이 메뉴에 등장하며 식료품점들은 서울에서 구하기 힘든 중국식품들을 판다. 노래방들은 노동에 지치고 향수병에 신음하는 동포들을 위해 중국 노래를 레퍼토리로 올리고 있다. 하나의 이야기, 한 시대가 마감을 해도 천형처럼 이 땅의 주변인들을 빨아들이는 가리봉동의 현실은 지속되고 있는 것이다. 아직까지 완강하게 변경으로 남아 있는 가리봉동에 비해 영화의 또다른 촬영지였던 구로3, 4동 지역은 이미 빠른 변화를 겪고 있다. 구로지역 안에서도 최빈층에 속하던 이 지역에는 지하철 7호선 남구로역이 들어섰고 촬영 당시 가득했던 벌집들 자리에는 말쑥한 빌라들이 들어섰다. 동네 아래쪽으로 한참 올라가고 있는 고층아파트 공사장의 요란한 굉음은 변방에서 중심으로의 진입을 위한 격전장처럼 느껴진다. 처절하면서도 쓸쓸하다.
이삿짐 싸는 풍경, 다시 변경을 향해
동팔의 어깨에는 빨간 장미 문신이 새겨 있었다. 고2 때 학교에서 잘리고 가출하면서 이 문신을 새길 때 그는 ‘언젠가 내게도 이 장미처럼 잘 나가는 세월이 오겠지’ 하는 생각을 했다. 그러나 배운 것 없고 가진 것 없는 동팔의 어깨에 새겨진 ‘장밋빛 인생’은 엄지만화방의 벽에 걸려 있던 ‘하면 된다’는 현판처럼 어색하기만 하다. 언젠가, 언젠가는 가리봉동에도 장밋빛 미래가 펼쳐질 거다. 이 미래에 자리를 내주기 위해 오늘도 가리봉동 벌집의 식구들은 부지런히 이사짐을 싼다.
김은형 기자dmsgud@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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