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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사풍] 세상이 서러운 '청량리 드림' <영자의 전성시대>/근대화 언저리를 맴도는 매춘여성의 인생유전… 무너지고 해어진 욕망의 그림자들
“물이 완전히 갔어요. 허리케인인지 태풍인지 지난 겨울 쓸고간 다음부터는 밤이 되도 별볼일이 없어. 차비 챙기기도 빠듯하니까. 십년 전만 해도 낮에도 그럭저럭 손님들이 왔었어. 밤만 되면 거리가 온통 시루 안의 콩나물 대가리처럼 사람들 머리통으로 꽉 찼더랬어. 이제는 이 동네도 다 끝난 거라고 봐야지.” 골목 앞에서 서성이던 늙은 팸프(포주)가 역시 심드렁한 말투로 이야기를 꺼낸다. “요즘엔 사람구하기가 하늘의 별따기야. 단속 심해지면서부터는 외곽으로 많이 빠져나가고, 있던 아이들도 단골 생기면 따로 방 구해서 직접 영업한다고 나가고…. 저기 나와 있는 아가씨들도 자가용 타고 출퇴근하는 사람들이 태반이에요.”
아직도 그 시절을 그리워하는 사람들
올해로 67살이라는 팸프 아주머니는 남대문 뒤에서 아가씨들을 데리고 윤락업을 하다가 도시정비를 할 무렵 이곳으로 옮겨왔다고 한다. 아이들도 장성해 다른 일을 해보고자 80년 말 일을 정리했었지만 결국 다시 돌아왔다. 용돈이나 벌어보기 위해서란다. “시외버스터미널이 연결되고 아직 통행금지가 있던 무렵에는 경기 좋았어요. 낮에도 심심치 않고 6시만 되면 가게마다 손님들이 북적였으니까. 파릇파릇한 아가씨들 구하기도 쉬웠지. 지금처럼 미성년자 단속이니 하는 것도 없었고.” 70년대 이곳에는 아직 시골티를 벗겨내지 못한 아가씨들이 몰려들었다. 하루 18시간의 고된 공장 노동과 버스 차장 일에 지치고 극악스런 도시로부터 상처입은 젊은 여성들이 꾸역꾸역 청량리로 밀려왔다. 한국전쟁으로 폐허가 된 서울 변두리에 둥지를 튼 이 유곽촌은 도시에 하나둘 고층건물이 들어서는 속도에 맞추어 붉은 전구의 수를 늘려갔다. 서울의 도시화가 본격화된 70년대부터 88올림픽으로 도시정비가 정점에 이른 80년대 말까지 청량리 588은 전성기를 구가하면서 1천명이 넘는 매춘 여성들이 구겨진 이불 아래 몸을 뉘었다.
“70년대 초반 잡지에서 한 창녀의 기구한 인생유전에 관한 기사를 읽은 적이 있어요. 4·19 시위 현장에서 진압경찰의 유탄에 맞아 팔이 잘린 여학생이 사창가로 흘러들게 된 이야기였죠. 자주 어울리던 젊은 예술인들과 술자리에서 영화를 만들고 싶다는 이야기를 했는데 마침 그 자리에 있던 소설가 조선작씨가 단편 하나를 꺼내더군요. 상경한 처녀가 창녀가 되는 과정을 그린 소설이었는데 거기에 살을 입히기로 의기투합했지요.” 상경은 이 영화의 가장 중요한 모티브다. 근대화가 시작된 60년대부터 70년대 말까지 양손에 보따리를 든 상경객들로 북적이는 서울역은 서울의 대표적인 풍경이었다. 60년대 말 80만명에 불과하던 서울인구는 70년 550만명으로 불어났다. ‘기회의 땅’ 서울로 향하는 이들 가운데 많은 이는 초등학교나 중학교를 졸업한 단발머리 소녀들이었다. 이들에게는 병든 어머니의 약값과 남동생의 학비를 벌어야 하는 소임과, 핸드백을 메고 높은 빌딩으로 출근하다가 건설회사나 무역회사에 다니는 남자를 만나 결혼하는 꿈이 있었다. 그러나 배우지 못한 여성들이 선택할 수 있는 것은 세 가지뿐. 부잣집에 식모로 들어가는 운이 따라주지 않으면 남는 것은 먼지 자욱한 봉제공장과 위험한 버스 뒷문이었다. 두 갈래로 머리를 묶고 앞에는 돈주머니를 찬 소녀들은 가녀린 팔로 억세게도 사람들을 버스 안으로 밀어넣으며 첫차부터 막차까지 쉬지 않고 ‘오라이’를 외쳤다. 문도 닫히지 않는 만원 버스에 매달려 다녔던 ‘누나’들의 위험천만한 묘기는 70년대 서울의 빼놓을 수 없는 초상이었고 신문에서는 간간이 이들의 예견된 죽음을 1단 기사로 보도했다. 버스에 매달려 있던 영자를 다른 버스가 스치면서 잘린 영자의 팔이 고층 빌딩 위로 떠오르는 장면은 희생양을 필요로 했던 고속도로 근대화의 비극을 압축해서 보여주는 명장면이다.
그늘진 자리, 누가 거기에 있는가
앞서 늙은 팸프의 회고처럼 70∼80년대 대표적인 유곽인 청량리 588은 근대화의 거대한 배설물 같은 곳이었다. 숨막히는 노동과 탄압의 현장에서 개처럼 복종해야 했던 남성들을 위해 근엄한 정권은 욕망의 배설구를 묵인하면서 사실상 권장했고 산업현장의 잉여인간으로 분류된 여성들은 이곳에서 고단한 산업역군들을 위무할 임무를 부여받았다. “지금 돈으로 한달에 십만원도 안 되는 돈을 시골집에 부치는 아가씨가 있었어요. 가끔씩 놀러와서 편지를 써달라고 했는데 내용은 ‘구로공단에 취직해서 일하고 있다’ 이런 내용이었어요. 겉봉에 쓸 마땅한 주소가 없으니 나중에 작은 옷가게라도 차린 뒤에 보낼 거라며 가져가곤 했는데 옷가게 차렸을까 요즘에도 가끔씩 떠올라요. 서울 올라올 때 꿈이 영화배우였다며 엑스트라라도 써달라기에 잠깐 등장시켰던 아가씨도 어떻게 살고 있는지 궁금하고. ‘그짓’을 할 때 시간을 때우는 제일 좋은 방법은 ‘껌씹는 거’라며 씹던 껌을 늘 벽에 붙여두었던 그 앳된 아가씨도 지금쯤은 마흔이 넘었을 텐데….” 아마도 그 시절의 많은 영자들은 ‘정든 유곽’을 벗어나지 못했을 것이다. 588에서 만난 팸프가, 젊은 매춘부의 반값에 손님을 끌어다준다는 30대 후반의 매춘여성도 ‘열여덟살짜리 처녀가/ 남자가 뭔지도 모르고 들어 와/……/ 손님들이 모다 남같지 않어서/……썩은 몸뚱어리도 좋다고/ 탐허는 손님들이/ 인자는 참말로 살붙이 같어’(송기원 <살붙이> 중) 이곳을 떠나지 못하고 있는 건지도 모른다. “젊은 혈기에 현장감을 살린다며 588의 한 매춘업소를 무대로 촬영했습니다. 낮손님도 적지 않을 때라 이웃 가게들에서 원성이 많았어요. 촬영 현장에 돌도 날아오고 촬영장을 어슬렁거리는 어깨들의 위협으로 근처 파출소 순경들도 자주 들락날락했지요.” 시멘트 바닥에 슬레이트를 올린 잿빛 건물들로 필름에 우울한 정조를 물들이던 588도 그동안 많이 변했다고 한다. 25년 전에는 없던 유리문과 네온사인이 빛을 발하고 부스스한 속옷차림으로 행인의 팔을 억세게 끌던 아가씨들도 이제는 몸매를 노출한 옷차림으로 유리문 안에 앉아 긴 담배를 입에 물고 손님을 기다린다. “옛날에도 이곳에서 돈벌어 나간 아가씨들은 별로 없지만 지금 아가씨들은 그때 아가씨들보다 씀씀이가 훨씬 커요. 머리 손질은 물론이고 요즘에는 손톱도 전문업소에 가서 손질받고 마사지 다니고 그래요. 여기서 번 돈으로 주말마다 압구정동에 가서 놀다가 온다는 아가씨들도 있어요. 그때는 그래도 순진한 꿈을 버리지 못하고 돈벌러 왔다는 아가씨들이 많았는데 이제는 용돈벌이하러 왔다고 당당하게 말하는 아가씨들이 많아요.” 80년대 초부터 이곳에서 중국집이며 쌀가게를 해온 정아무개씨의 말이다.
산업화의 폭력에 망가진 뒷골목 인생
영화에서 영자에게는 애인이 있다. 영자가 가정부를 할 무렵부터 만난 창수(송재호) 역시 시골서 상경한 때밀이다. 유곽에서 망가지는 영자를 안타깝게 지켜보다가 영자와 손님의 싸움에 휘말려 감옥까지 갔던 창수는 몇년이 지난 뒤 영자와 해후한다. 유곽에서 나온 영자는 공사판에서 일하는 남자와 아이까지 낳고 살림을 차린 상태여서 두 사람은 안타까운 눈길만 나눈 채 헤어진다. 그리고 영자의 남편과 창수는 “우리 친구할까요?” 따위의 유치한 대화를 나누면서 함께 자전거를 달리며 영화는 억지스런 해피엔딩으로 끝난다. “처음에는 영자가 자살을 기도하던 염천교 아래서 끝내려고 했어요. 서슬이 퍼럴 때였잖아요. 가뜩이나 영화도 침울한데 비극으로 끝나면 검열에서 좋을 게 없다고 생각했어요. 그래서 구원쪽으로 결말을 돌린 거예요. 물론 청계천 봉제공장 신만 해도 15장면이 잘리고 전체적으로 10여분 정도 삭제한 필름을 개봉할 수밖에 없었지만요.” 그러나 해피엔딩으로 보이는 마지막 장면도 그다지 행복해 보이지는 않는다. 개발이 시작된 여의도 고층아파트와 국회의사당을 배경으로 공사장 천막에서 갈고리 손으로 빨래를 너는 영자의 모습은 산업화의 폭력이 한 인간을 어떻게 망가뜨리는지 선명하게 각인시켜줄 뿐이다. 1975년 설 때 개봉한 이 영화는 서울 국도극장에서만 36만1천여명의 관객을 동원하며 그해 최고의 흥행영화가 됐다. 같은해 가을 개봉한 흥행작 <바보들의 행진>의 주인공 영자와 함께 여주인공 이름에서 ‘영자의 전성시대’를 열기도 했다. <영자의 전성시대>는 70년대 넘쳐나기 시작한 ‘창부영화’의 효시로 꼽히기도 하지만 도시빈민의 몰락을 통해 산업사회의 그늘을 통찰한 1970년대 한국영화의 대표작 가운데 하나로 평가받는다. 김은형 기자dmsgud@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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