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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섹션 : 논단 등록 2003.10.22(수) 제481호

[논단] 권태/ 이욱연

삶이 권태로웠다고 한다. 그래서 입에 올리기도 민망하다는 스와핑을 하게 되었단다. 당사자들에게는 권태가 최후의 성적 금기를 건드릴 정도로 존재를 위협하는 절박한 것이었을 수 있겠지만, 대다수 사람들은 그들의 권태에 전혀 관심이 없다. 이런 일이 벌어지면 늘 그렇듯이 사람들은 갑자기 성직자와 공자로 변해 성적 타락을 질타하고, 다른 한편에서는 매스컴이 유포하는 집단적 관음증에 홀려 있다.

상류층의 권태, 밑바닥의 권태

권태는 부도덕한 그들만의 것이다. 쇼펜하우어는 궁핍이 민중의 재앙이라면 권태는 상류세계의 재앙이라고 했다. 삶의 기아선상에서 끊임없이 중노동에 시달리거나 생존을 위해 나날이 전쟁을 치르는 사람들은 권태로울 시간이 없다는 것이고, 권태란 대다수 민중과는 다른 생존방식과 경제적 지위를 지닌 특수한 계층에 한정된 지극히 계급적 성격을 띤 감정이라는 지적이다. 우리 사회가 그들의 권태에 무감각한 것은 이 때문이다. 그러고 보면, 대다수 참가자들이 사회 상류 계층이라는 이번 스와핑 사건을 두고 벌어진 논란에는 성의식과 관련한 윤리적 감각의 차이 못지않게 우리 사회의 계층별 낙차감도 작용하고 있는 셈이다.

하지만 좀더 넓게 생각해보면, 권태가 꼭 돈 있고 시간 남아도는 강남 부인들만의 사치스러운 감정은 아니다. 특정 계층만의 삶의 경험은 아닌 것이다. 권태는 시간 감각이 있는 인간만이 느낄 수 있는 고유한 감각이다. 시간이 더 이상 의미 있는 계기로 작동하지 않을 때, 시간이 물처럼 고여 썩어갈 때, 과거도 미래도 없이 오직 현재의 끊임없는 연장으로서 현재의 시간만이 무한 반복된다고 느낄 때, 존재의 뿌리 자체를 위태롭게 하는 파멸적 권태가 찾아온다. 권태란 밀폐된 시간과 공간 속에서 미래에 대한 상상력을 잃은 누구에게나 닥칠 수 있는 치명적인 악마인 것이다.

계층적으로 차이가 있다면 권태 자체가 아니라 권태를 표출하는 방법이다. 꿈을 다 이룬 뒤 더 이상 이룰 것이 없는 상태에서 찾아든 상류층의 권태는 스와핑 같은 것이 그 출구로 등장한다. 하지만 나날이 반복되는 힘겨운 노동에 시달리고, 몸부림치며 살아도 삶의 출구가 보이지 않는 밑바닥 사람들은 한진중공업 노조원처럼 타워크레인에서 뛰어내려 월 100만원의 권태로운 삶에 종지부를 찍는다.

권태가 하나의 시대의 병으로, 한국 사회의 집단적 경험으로 자리잡아 가는 무서운 징후를 느낀다. 그도 그럴 것이, 사실, 한국인들은 만성적인 과잉 억압과 과잉 경쟁에 시달리고 있다. 냉전의 억압, 가부장적 억압, 경제적 억압 등 갖가지 과잉 억압에 시달리고, 학교에서 직장에서, 요람에서 무덤까지 과잉 경쟁에 시달리고 있다. 하지만 그것을 단절할 어떤 계기나 희망을 발견하지 못한 채 삶은 여전히 쳇바퀴를 돌고 있다. 정권이 바뀌어도 한순간만 새로운 뿐 현실은 다시 낡은 것으로 되돌아가고, 현실은 출구도 없이 여전히 권태롭다. 더구나 그런 출구 없는 현실이 자식 세대까지 유전될 수 있다는 공포가 퍼져간다. 그래서 출구를 찾아 외국으로 떠나는 모양이지만, 그것도 불가능한 사람들은 어떻게 할 것인가. 스와핑을 할 수도, 타워크레인에서 떨어질 수도 없는 가운데 권태로운 삶의 출구를 어떻게 찾을 것인가.

열정을 찾아줄 계기는 무엇일까

작가 이상의 산문 가운데 <권태>라는 작품이 있다. 벽촌의 여름날을 배경으로 하루 일과를 적고 있다. 장기를 두는 일도 푸르른 녹음도 도무지 즐거움이나 놀라움을 가져다주지 못한다. 내일이라는 것이 있기는 하지만, 그 내일은 이미 “오늘이 되어버린 내일”이고, 그 속에서 숨이 막힌다. 출구 없는 현실, 희망으로 흐르지 않는 고인 시간의 반복뿐이다. 그런데 권태에 사로잡힌 이상 앞에 불나비가 달려들어 불을 끈다. 그런 불나비에서 이상이 본 것은 정열이다. 불을 찾아다닐 줄 알고 불을 보면 뛰어들 줄도 아는 정열. 그래서 이상은 말한다. “불나비라는 놈은 사는 방법을 아는 놈이다.”

그렇다. 문제는 온몸을 바칠 불도 없고, 불을 찾으려는 정열도 식으면서 사는 방법을 잃은 사람들이 늘어간다는 데 있다. 그런 가운데 권태의 독버섯만 번져간다. 권태에 빠진 이상에게 오래 전에 잊혀졌던 ‘희망과 야심’이 다시 번뜩이고 “한번만 더 날아보자꾸나” 하고 열정의 불을 다시 지펴준 계기는 정오의 사이렌이었다. 권태로운 한국인들에게 다시금 열정의 날개를 돋게 해줄 정오의 사이렌은 무엇이고 어떻게 울릴 것인가 실로, 우리 시대의 공안(公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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