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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섹션 : 논단 | 등록 2002.08.08(목) 제421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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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단] 장상 청문회를 보며 나처럼 오랜 세월 여자로 살았다면, ‘장상씨와 그 여성계 일당’을 쥐어박는 것도 그를 치마폭으로 감싸안는 것도 아픈 마음 없이는 되지 않았을 것이다.
여름철이라 나도 며칠간은 옷을 벗었다. 나잇살, 스트레스살, 술살이 골고루 분포된, ‘무너지고’ ‘망가진’ 몸을 드러낸다는 게 친구들 앞에서조차 좀 그랬다. 수영장 탈의실에서 내 몸은 일행의 딸들인 초등학생 다섯명의 농담거리가 되었는데, 친구 2세들의 이 악의 없는 놀림조차 주눅든 마음엔 상처가 되었다. 아무리 남성적 시선에 의한 억압적 미의 기준이니, 몸과 계급적 허위의식의 관련성이니 하고 이론 재무장을 빵빵하게 해도, 아무리 “눌러주는 인간 프레스들이 없어서” 따위의 농담으로 얼버무리려 해도, 여전히 자신조차 타인의 취향으로 자신의 몸을 감정하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을 때의 그 찝찝함이란!
내가 대답하지 않은 이유
그래도 몸의 옷을 벗을 때가 낫다. 더 끔찍한 것은 마음의 옷마저 벗기를 강요당하는 순간이다. 장상씨 관련한 시시비비가 한창일 때 소금강 자락에 묻혀 있다가 청문회 하는 날 돌아왔다. 며칠 더 있다 올걸 싶으면서도 눈은 절로 화면으로 갔는데, 결국은 중간에 꺼버렸다. 정서적이고 정치적인 여러 복합적인 반응이 칵테일로 뒤섞여 체내에서 화학반응을 일으키는 바람에, 보는 내가 더 속이 들볶였다. 평소 여성과 정치, 여성과 권력에 대해 거품을 물었던 전과 탓에 그가 지명되는 즉시 일종의 ‘축사’를 써달라는 청탁을 받았고, 그가 스캔들의 봉세탁기 속에서 구석구석 얻어맞고 ‘탈수’돼가고 있을 때와 그가 채 입지도 않은 옷을 다시 벗었을 때 ‘소감’을 질문당했지만 모두 대답할 권리를 반납했다. 계급과 성, 현실정치의 이해가 맞물린 이 한판의 쇼는 순발력 있는 소감문을 쓰기엔, 대체 어떤 공식을 들이대야 좋을지 모를 너무 어려운 수학이었다. 로널드 레이건 대통령 시절인 1991년, 미 연방 대법원 판사에 최초로 흑인 법관인 클래런스 토머스가 지명되었다. 당시, 젊고 아름다운 법학교수 아니타 힐이 그로부터 성희롱을 당했다는 충격적인 커밍아웃을 했고, 미국사회의 ‘단층대’로 불리는 인종문제와 성문제가 결합된 토머스의 인준청문회는 활자와 TV 전파를 타고 미국사회를 구석구석 들쑤셔놓았다. 보수와 진보가 대립하고 남성과 여성이 대립했으며 여성 내부가 대립하는, 그야말로 전방위적인 집단 대결이 벌어졌다. 아프리카계 미국인 여성들은 특히 그 내면의 갈등이 심했는데, 최초의 흑인 연방 대법원 판사에 대한 열망과 여성으로서의 자의식과 계급의식의 지각판들이 지표면에서 충돌을 일으키면서 그들 내부를 사분오열시켰다. 흑인 미식축구 스타 O. J. 심슨이 백인 아내 니콜을 살해한 사건도 인종과 계급, 성이라는 인류의 3대 차별문제가 뒤섞여 ‘소수자’의 집단무의식을 시험한 시대의 사건이었다. 그 결과? 클래런스 토머스는 들끓는 여론에도 불구하고 무사히 청문회를 통과해서 종신 연방 대법원 판사직을 수행하고 있고, O. J. 심슨은 무죄판결을 받았으며, 미국사회의 단층대는 여전히 활발한 지각운동을 하며 지진을 예비하고 있다.
나를 위하는 이기심
후유, 흥미진진한 구경꾼이었던 그때가 좋았다. 장상씨 지명 앞에서 나는 지레 숨이 멎었다. 내 문제였기 때문이다. 사회의 단층대 사이에 끼여서 호흡곤란을 느끼리라는 걸, 내 의식의 비빔밥 속에서 고기와 콩나물과 밥알을 가려내는 지난한 작업을 해야 하리라는 걸 예감했기 때문이다. 여태 그 작업을 하느라고 말 한마디 하기가 쉽지 않았다. 그렇다고 내가 마냥 그렇게 똑똑지 못한 것만은 아니다. 딴지일보 사이트에 들어갔다가 장상씨 논란을 다룬 “여성계는 계모임인가?”라는 제목의 논평을 보게 되었다. ‘여성계는 계모임이다’라는 결론을 내린 듯한 그 글에 대해서는 순발력 있는 확실한 소감을 한 가지 가지게 되었는데, 이 글쓴이는 가려내야 할 비빔밥의 재료가 나보다 최소한 한 가지는 적었구나, 라는 것에 대한 부러움이었다. 나처럼 오랜 세월 여자로 살았다면, ‘장상씨와 그 여성계 일당’을 쥐어박는 것도 그를 치마폭으로 감싸안는 것도 아픈 마음 없이는 되지 않았을 것이기 때문이다. ‘박근혜를 둘러싸고 요란스레 찧고 까불던… 그 페미니스트’라는 글쓴이의 표현대로, 연초에 ‘박근혜 연대론’을 말함으로써 난 벌집을 건드렸다. 실수가 아니라면, 벌집을 건드리는 목적은 물리기 위해서가 아니라 꿀을 따기 위해서일 것이다. 떼벌침을 맞고 나서야 깨달은 사실인데, 그 꿀이란 결국은 ‘나를 위하는 이기심’이었다. 요람에서 무덤까지 나를 찔러대는 존재의 가시, 성차별. 나를 아프게 하는, 내 살에 박힌 가시의 존재를 세상에 고발하기 위하여 무소의 뿔로 만든 나팔처럼 떠들어댔던 것이다. 내가 나를 위하지 못한다면 누가 나를 위해줄 것인가? 그래서 어제는 혼자 방 안에서 이렇게 떠들었다. 그래, 나 그 페미니스트다, 어쩔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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