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논단] ‘이견’이 두려운가

한-미정상회담 뒤에 있었던 김대중 대통령의 간담회 중계를 우연히 보았다. 보수적 싱크탱크 주최로 열린 이 자리에서 그는 미국의 기자, 정치인, 학자들과 한 시간이 넘도록 토론을 벌였다. 쏟아지는 질문에 대해서 어떤 메모에도 의존하지 않고 논리적으로 답하는 그의 ‘실력’에 탄복했다. 지난 3년간 별다른 의미있는 개혁을 이뤄내지 못한 김 대통령의 리더십에 비관하고 있던 나로서는 그날 잠시 동안 즐겁고 동시에 안타까웠다. 물론 나는 민족주의자가 아니기 때문에 ‘우리의 자랑스러운 대통령!’식으로 생각하고 있었던 것은 아니었다. 단지 지난 대선 주요 후보 중 유일하게 서울대를(아니 대학조차) 나오지 않았던 그의 지적 수준과 식견에 다시 한번 놀랐을 뿐이다(사실 내 주변의 반학벌주의자들은 바로 그 이유 때문만으로도 그를 찍었다고 당당하게 말한 적이 있다). 그리고 미국의 의심 많은 ‘검열관’들 앞에서 대북 화해정책의 정당성을, 신중하고 논리적인 언어로 설득하려는 그의 고군분투에 지지를 보냈을 뿐이다.

언론이 고소해한다?

서론이 길었다. 여기서 사실 생각해보고 싶은 것은 이번 회담에서 드러난 ‘이견’을 접하는 한국사회의 태도다. 대부분의 언론들은 부시 정부가 김대중 정부의 대북 포용정책에 대해서 제동을 걸었다고 보도했다. 한국 언론의 국제문제 보도를 별로 믿지 않는 나로서는 바다 건너 신문을 다 읽어보고서야 그것이 사실임을 확인할 수 있었다. ‘인식차’는 있어도 ‘정책차’는 없다는 한국 정부쪽의 설명은 눈가리고 아옹하기이지만 문제는 한-미간의 ‘이견’(異見)에 대해서 난리치는 언론의 관점이다. 부시 대통령과 김대중 대통령의 입장차이가 표면으로 부상하자 한국의 언론은 ‘드디어 올 것이 왔다’는 식으로 보도했다. 70년대 후반 이래로 ‘가장 악화된 한-미관계’의 장래에 대해 염려하는 논조가 주를 이뤘다. 그러나 내가 확인한 것은 대북정책에 대해 사사건건 시비를 걸던 냉전주의적 언론들이 이번 ‘이견’ 사건을 보면서 ‘고소해한다’는 느낌이었다. 가령 “이번 한-미정상회담에서 우리가 해야 할 우려와 걱정을 미국이 해준 측면도 없지 않다”는 점잖은 비판이 나왔다. 행간을 읽자면 ‘거봐! 우리가 하던 얘기가 맞았지? 미국 정부조차도 등돌리잖아’ 하며 부시 정부의 김 대통령에 대한 노골적 견제를 환영하는 목소리다. 냉전 언론들이 박장대소하고 싶은 욕망을 참느라 얼마나 고생했을까?

이런 태도는 뭘 암시하는가? 미국의 새 공화당 정부의 지원에 기대어서 현 한국 정부의 대북정책에 제동을 걸려는 한국의 냉전세력을 ‘반민족 사대주의자’로 몰고 가고 싶은 생각은 추호도 없다. 그런 딱지가 과거 독재정권에 의한 민주화운동 탄압을 정당화하는 데 교묘하게 활용된 역사를 알기 때문이다. 또한 ‘자주외교’를 외치면서 미국의 ‘오만한 제국주의’를 규탄할 생각도 없다. 반미민족주의가 한반도 평화를 위한 국제 연대적 노력을 오히려 가로막을 위험을 충분히 인식하기 때문이다. 부시의 대북정책 변화 조짐은 정권교체시에 흔히 볼 수 있는 과도기적 대응 혹은 전략적 겁주기일 수도 있다. 다만 미국의 잣대가 그렇게 절대적이라면 왜 한국의 냉전주의자들은 클린턴 정부 말기의 북-미관계 개선 정책에 사사건건 비판을 일삼았는지 묻지 않을 수 없다. 논리적으로 해석한다면 그들의 유일한 잣대는 미국이 아니라 냉전주의라는 얘기다. 미국 전문가인 이삼성 교수의 표현을 빌리자면 사실 한-미관계의 핵심은 ‘한국 내 냉전세력과 미국 내 군사주의 세력간의 비대칭적 동맹’이다. 그러한 동맹관계가 한국과 미국에 존재하는 ‘군산언학’ 복합체의 기득권 유지에 필연적이라는 것은 잘 알려져 있지 않은가? 결국 한국의 냉전 세력이 두려워하는 것은 이러한 동맹관계를 변화시킬 가능성이 있는 갈등과 ‘이견’이다. 물론 김대중 정부가 추구하는 것은 동맹관계의 변화에는 턱도 못 미치고 그럴 생각도 없을 것이다.

때론 이견이 필요하다

현 정부의 방향은 다만 한반도의 평화와 남북관계 개선을 위해서 필요한 대북 포용정책의 일관성이다. 그것을 위해서는 당연히 보수층과 군산업체의 입김이 강한 미 공화당 정부와의 일정한 의견 차이는 불가피하다. 물론 국제정치의 현실에서 미국의 존재를 거부하거나 무시할 수 없다. 또한 돌출적이고 감정적인 언행은 과거 김영삼 정부 시절에 경험했듯, 미국 정부를 설득하는 데 그다지 도움이 되지도 않는다. 문제는 한-미간의 ‘이견’ 자체가 아니라 어떻게 하면 그것을 지혜롭게 활용하여 한반도에 평화를 정착시키는 방향으로 끌고 갈 것인가 하는 점이다. ‘이견’은 때로는 필요하다. 북한에 대한 ‘의구심’을 명분으로 한 대북 강경책이 한반도를 전쟁으로 몰고 간다 해도 당신은 미국과의 ‘동견’(同見)을 추구하겠는가?

권혁범/ 대전대 교수·당대비평 편집위원 kwonhb@dragon.taejon.ac.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