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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음, 그리고 낭보 한 부음을 들었다. 민주화투쟁과 통일운동에 평생을 바치며 <전태일사상연구소>를 설립해 운영해오던 오경환 선생이 “이 세상에서 내가 할 일은 다 했다”며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고 한다. 향년 65살. 유서에는 자신이 돌아갈 시간을 미리 기록해놓았으며, 그 시간에 그는 돌아갔다. 어떤 허명도 좇지 않았던 지상에 남은 가벼운 육신 한구는 이미 해부연구용으로 기증해놓은 상태였다.
박정희의 타살과 전태일의 자살
혹자는 물을 것이다. 왜 하필 자살이냐고. 우리 사회가 가지고 있는 ‘죽음’에 대한 터부는 종종 자살을 ‘삶’에 대척되는 악으로 규정하곤 한다. 모든 살아 있는 것들은 가장 자연스럽게 죽음의 과정에 놓여 있는 것이라는 다소 추상적인 일반론은 차치하더라도, ‘자살’이라는 이유로 ‘어떤’ 죽음이 터부시될 이유는 없다. 인간으로서 자신의 존엄을 지키며 살 권리만큼, 자신의 존엄을 지키며 스스로의 죽음을 결정할 권리 또한 있는 것이다. 누구나 죽지만 누구나 아름답게 죽지는 못한다. 한국근대사에 폭압의 암흑기를 만든 박정희의 ‘타살’이 사랑의 이름으로 스스로의 몸에 불을 댕긴 전태일의 ‘자살’과 비교될 수 없는 것처럼. 또 혹자는 의아해할 것이다. 전태일 사상이라고? 전태일의 삶은 의로웠지만, 초등학교조차 졸업하지 못한 한 노동자인 그에게 사상이라니. 그러나 진정 아름다운 사상의 숲은 이렇게 만들어진다. 사상은 활동이다. ‘과정’으로서의 사상이 아니라면 그것은 죽은 사상-단순한 지식이거나 이론일 뿐이다. 자신을 비추어보고 반성하게 하는 삶이 있다면 그것을 자신의 것으로 가져와 매일의 삶을 사는 일. ‘사상’을 ‘살’ 때에만 사상은 사상이 된다. 30년 전 전태일이 “우리는 기계가 아니다”라고 절규했을 때, ‘노동자=기계’의 삶을 속수무책으로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던 거대한 질서는 조금씩 균열되기 시작했다. 사람들은 서서히 ‘기계인 노동자’를 거부하기 시작했고 거부할 수도 있는 것임을 자각하기 시작했다. 우리가 성취했다고 믿었던 근대화의 신화는 한국적 근대의 주역이었던 노동자에 의해 부인되기 시작한 것이다. “우리는 기계가 아니다.”-이 가장 정당한 절규이자 허명의 근대를 발가벗기는 가장 ‘불온’한 사상의 씨앗은 아카데믹한 지성으로부터 오지 않았다. 오히려 그들은 언제나 한발 늦다. 한 낭보를 들었다. 70년대 한국여성노동자와 민주노조운동을 다룬 논문으로 영국에서 박사학위를 받고 귀국한 전태일 열사의 동생 전순옥씨가 최근 노동현장으로 돌아갔다고 한다. 영세한 가내의류공장의 3번 시다인 박사 전순옥씨. 큰오빠 전태일 열사가 스물두살의 나이로 분신하던 해인 1970년에 그는 열여섯살 소녀였다. 낮에는 평화시장 여공으로, 밤에는 야간중학교에 다니던 그도 오빠의 뒤를 이어 노동운동에 뛰어들었다. 80년대 말 노동자들의 국제적 연대에 필요성을 느끼고 유학길에 오른 그는 최고의 논문이라는 격찬과 함께 카디프대학에서 전임교수직 제의까지 받았으나 이를 마다하고 돌아왔다. 그는 말한다. “일하는 사람들이 일 속에서 행복을 찾을 수 있는 해답을 꼭 찾고 싶다”라고. 그의 소식을 접하면서 참으로 오랜만에, 진실로 아름다운 사람이 나지막하게 뿜어내는 따뜻하고 강단진 에너지를 느낀다. 나는 조심스럽게 타진해본다. ‘세계화’라는 옥쇄를 든 전 지구적 자본주의 시스템의 막강한 제국 아래, 가속화되는 일국 내 빈익빈 부익부와 국가간 빈부차를 견인해낼 수 있는 노동자들의 국제적 연대가 우리에게도 과연 가능할 것인가. 나는 또, 노조도 못 만든 채 항상적인 해고 위협에 놓여 있는 영세사업장의 여성노동자에 대한 그의 문제의식에 뜨거운 지지를 보낸다. 이것은 지배와 억압이 지배자와 억압자뿐만 아니라 피억압자 내부에서도 이루어지곤 하는 구체적 현실의 가장 복잡한 얼개를 풀어내려는 일이기 때문이다. 비정규직노동자, 여성노동자, 외국인노동자에 이르기까지 2중, 3중으로 타자화되어가는 약자들-타자 속의 타자들은 어떻게 연대할 것인가.
한때의 진보는 영원한 진보가 아니리
하나의 부음과 하나의 낭보. 이 두 소식의 꼭지점에는 영원한 청년노동자 전태일이 있다. 내가 이 두 소식을 들은 무렵은 타는 가뭄이었고, 가뭄중의 노동자파업이 비도덕적이라는, 도대체 말이 되지 않는 여론몰이가 언론에서 행해지고 있었으며 20세기의 유물처럼 여겨지던 폭력 진압과 함께 많은 사업장의 파업이 ‘불법’이 되는 이상한 일이 여전히 일어나고 있었다. 희망의 징후를 발견하는가 싶으면 여지없이 그것은 절망이 되곤 한다. 민주주의는 피를 먹고 자란다는 말이 있다. 여기에 바친 피-그중엔 전태일의 피도 있다. 그러나 이 민주주의는 아직도 목마른 듯하다. 지금 이 절망이 더 날카롭게 느껴지는 것은, 한때의 진보가 영원한 진보가 아니라는 사실의 뼈아픈 확인 때문일 것이다.
김선우/ 시인 ksw2100@hite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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