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배경록/ 한겨레21 편집장 peace@hani.co.kr
박정희 전 대통령은 아무리 봐도 ‘뜨거운’ 사람이다. 살아 있을 때야 현직 대통령이었으니 그럴 만도 하지만 죽은 뒤에도 그는 늘 화제를 몰고 다닌다. 최근 그는 영화 <그때 그사람들>과 한-일 협정 및 육영수 여사 저격 사건에 대한 정부의 비밀문서 공개로 또다시 우리 사회를 뜨겁게 달구고 있다. 그가 죽은 지 26년이 흘렀는데도 말이다. 조만간 정부의 과거사 진상조사위원회가 본격적으로 활동하게 되면 그는 대부분의 사건들에서 중심에 서게 될 것이고, 조사 결과에 따라 우리 사회를 ‘폭발’시킬 수도 있는 파괴력을 갖고 있다. 때문에 벌써부터 ‘올해의 인물’이 될 가능성이 가장 높아 보인다.
박 전 대통령이 편히 잠들지 못하는 것은 독재의 그늘 때문이다. 한편에서는 ‘한강의 기적’을 내세우며 그것을 인정하려 들지 않기 때문이기도 하다. 독재의 폐해와 고도성장의 업적을 있는 그대로 평가할 수만 있다면 그는 편히 잠들 수 있을 것이다. 그의 아들 박지만씨는 한 언론사와의 인터뷰에서 최근 아버지가 다시 입길에 오르내리고 있는 데 대해 “돌아가신 아버지가 그렇게 두렵나요. …아버지가 살아 있는 것 같아요”라며 불편한 심기를 드러냈다. 대단한 착각이다. 두려워서가 아니라 우리 사회가 미래지향적인 동력을 얻기 위해서는 그의 아버지로 상징되는 과거사에 대한 정확한 평가가 이루어져야 하기 때문이다. 독재는 그의 사후에도 민주화와 인권의 발목을 잡았고, 고도성장은 긍정적인 평가가 있기는 하지만 재벌과 빈부격차와 부패를 낳았다. 청산해야 할 것과 계승해야 할 것을 가려내는 지혜와 혜안은 정확한 평가에서 비롯됨을 박지만씨는 잘 모르는 것 같아 안타깝다.
박 전 대통령에 대한 얘기를 하다 보면 헤리티지재단이 최근 펴낸 <성공하는 대통령의 조건>(김영사)을 다시 한번 들춰보게 된다. 역대 미국 대통령들의 국정운영 스타일을 평가한 이 책은 대통령직을 성공적으로 수행하는 데 필요한 8가지 핵심 과제를 제시하고 있다. 그 가운데 눈에 띄는 것은 대통령 당선 뒤 성공적인 정권 인수는 어떻게 해야 하며, 대통령의 의제 설정은 어떤 과정을 거쳐야 하고, 백악관의 운영과 새 행정부의 조각, 의회와의 관계는 어떻게 해야 하는지에 대한 대목이다. 민주적인 절차에 의해 당선돼 충분한 시간과 비전을 갖고 정권을 인수하고 국가 어젠다를 성실하게 수행할 수 있는 조직을 꾸려 국민의 지지를 이끌어내는 미국식 모델이 부럽기만 하다. 쿠데타로 시작된 박정희 시대의 18년은 박 전 대통령 한 사람의 의제만 있었을 뿐, 국민과 시스템은 존재하지 않았다. 실패한 정권으로 규정될 수밖에 없는 이유다.
10·26 사건이 나고 한 세대가 바뀌고 있지만 박 전 대통령에 대한 평가는 늘 평행선을 달리고 있다. 그 시대를 살았던 40대 이상들은 그에 대한 기억이 차츰 희미해지고 있고, 그를 모르는 20·30대들은 애써 관심을 가지려 하지 않는다. 어쩌면 그를 바라보는 이런 세대간의 시각차가 그에 대한 올바른 평가를 더욱 어렵게 만드는 것인지도 모른다.
그래서 <한겨레21>은 이번 설 합본호를 박정희 시대를 재조명하는 내용으로 과감하게 꾸며봤다. 훈훈해야 할 설 분위기에는 다소 어울리지 않을 수도 있지만, 이 시점에서 박정희 시대를 음미해보는 것이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 모두에게 그 어느 것보다 중요할 수 있다고 여겼기 때문이다. 온 가족이 둘러앉아 우리가 몰랐던 박정희 시대에 대해 서로의 경험과 생각을 나눠보는 설 연휴도 나름대로 의미 있고 색다르지 않을까 싶다.
넉넉하고 편안한 고향길 되시길….